15평을 설계하며 구조보다 먼저 정한 풍경
버드나무를 바라보는 일상에서 시작된 공간 디자이너의 집과 작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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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서른세 살 공간 디자이너 이이레입니다. 10년 가까이 공간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일하다가, 독립해 지금은 파트너 김수빈 대표와 함께 저희의 스튜디오 '논워터'를 꾸리고 있어요. 저는 취미를 하는 게 취미예요. 그러다 보니 LP를 한 장 한 장 모으기도 하고, 현장에서 나온 돌멩이를 주워 와 모으기도 하고, 틈틈이 사진을 찍고 책을 읽어요. 최근에는 달항아리가 만들고 싶어서 도예를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그릇과 잔까지 빚게 됐어요. 그렇게 만든 것들을 소중한 지인들에게 선물하기도 했어요. 어느 하나 깊게 파고들기보다, 일상의 작은 순간에서 낭만을 찾는 걸 좋아해요.
공간을 소개해 주세요.
서울 강북구 빨래골, 북한산이 보이는 한적한 마을의 51㎡ 단층 단독주택을 고쳐 올해부터 살고 있어요. 반려동물 없이 혼자 지내는 제 집이자, 낮에는 파트너와 함께 일하는 논워터의 작업실이에요. 집 이름은 '카바농 드 워터'예요. 카바농은 르 코르뷔지에가 지중해 바닷가에 지은 네 평 남짓한 오두막으로, 그가 여름마다 머물며 쉬고 일했던 곳이에요. 작지만 충만한 그 태도를 빌려오고 싶었어요.
'워터'에는 이 장소의 기억과 저희가 지향하는 푸름을 담았어요. 빨래골은 옛 빨래터에서 이름이 비롯된 동네예요. 땅 아래로 사라진 그 물길의 기억을 이 집이 다시 이어가요. 그리고 푸를 청(靑)은 청춘의 청이기도 해요. 새순처럼 돋아나 뻗어가는 생명력, 그 푸름을 공간에 담고 싶었어요.
오래된 집에 다시 숨을 불어넣은 이곳이 그 시작이에요.
현재 공간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마치 서울의 틈 속에 숨어 있는 듯한 골목길, 하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그 안의 풍성한 버드나무와 고즈넉한 신비로운 분위기가 인상적이었어요. 집을 둘러보는데, 이 자리에 앉아 조용한 시간에 버드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저희의 모습이 그려졌어요. 평수나 구조보다, 바로 그 장면이 이 집을 고른 결정적인 이유였어요. 그리고 저희만의 온전히 사적인 작은 마당이 있다는 점, 역과 가까워 파트너와 손님이 오가기 좋다는 것도 이점이었어요.
거실, 침실, 주방, 화장실 등 각 공간의 특징을 간단히 공유해 주세요.
현관과 이어진 작은 마당: 버드나무 앞의 짙은 목대문을 열면 작은 마당이 나와요. 한 단 올라 마당에 들어서는 자리에서 신발을 벗기 때문에, 이 집은 마당부터 이미 실내처럼 시작돼요. 기존의 담장을 1m쯤 높여 정돈되지 않은 시선을 걸러냈고, 잔잔한 수공간이 현관까지 길을 안내해요.
작업 공간: 맞춤 제작한 금속 테이블이 중심에 놓인 공간이에요. 비워낸 미니멀한 실내에 짙은 금속 테이블이 묵직한 무게감을 더해줘요. 수납과 작은 주방은 모두 벽 안으로 숨겨서 정제된 질서가 흐트러지지 않게 했어요. 큰 창을 열면 작업 공간과 마당이 하나의 거실이 되고, 닫으면 다시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가요.
방: 개인 방과 화장실, 샤워실 같은 프라이빗한 공간은 모두 히든도어로 만들어 벽처럼 보이게 했어요. 문이 있는지 모르고 지나치다가 벽을 열면 공간이 나타나서, 마치 비밀의 공간에 들어가는 것 같아요. 그중 방은 일을 마치고 잠드는, 온전히 저만을 위한 개인적인 고요의 방이에요. 붙박이장은 벽 안에 숨겨 두고, 200년 된 나무로 만든 선반 위에 아끼는 소장품들을 올려두었어요.
화장실: 건식으로 만든 화장실 안에 작은 정원을 들였어요. 세면대 아래에는 자연의 결이 그대로 살아 있는 고재 상판을 두었는데, 멀리 평택까지 가서 고심 끝에 고른 거예요. 처음 오신 손님들이 화장실 문을 열고 "와" 하실 때가 많은데, 작은 집 안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시선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게 저도 좋아요. 제가 특히 마음이 가는 공간이기도 해요.
샤워실: 바닥을 계단처럼 단을 내려서, 샤워실이면서 욕조가 되도록 만들었어요. 큰 타일로 감싸고 천장 가장자리에 조명을 숨겨, 은은한 빛 속에서 물을 받아 몸을 담글 수 있어요.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는 공간이에요.
르 코르뷔지에의 카바농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수많은 건축물 중에서도 카바농의 어떤 철학이나 태도가 마음을 움직였나요?
"나는 코트다쥐르에 성을 하나 가지고 있다. 3.66m × 3.66m짜리. 아내를 위한 것인데, 편안함과 다정함이 넘쳐난다." — 르 코르뷔지에
카바농을 두고 그가 한 말이에요. 네 평 남짓한 오두막을 '성'이라 부른 데서, 그가 이 집에 얼마나 큰 가치와 애정을 두었는지 느껴져요. 파트너와 이 집을 어떤 공간으로 만들지 함께 고민하다, 저희가 함께 떠올린 집이 바로 카바농이었어요. 공간 규모가 아담하기도 하고, 그 작은 집을 채운것은 형태나 크기가 아닌 삶의 밀도였기 때문이에요. 부피나 면적이 아니라 삶에 맞춰진 집, 그래서 그 안에서 자족하며 충만해지는 집. 카바농 드 워터도 51㎡라는 작은 규모 안에 그런 밀도를 담고 싶었어요.
공간 디자이너의 집이라고 하면 완벽히 계산된 공간이 떠오릅니다. 실제 본인의 집을 꾸밀 때도 디자이너의 시선으로 접근하나요? 아니면 개인의 취향과 감각을 더 자유롭게(느슨하게) 반영하는 편인가요?
뼈대는 디자이너로, 채우는 건 개인의 취향으로 했어요. 구조와 동선, 수납, 마감처럼 한 번 정하면 바꾸기 어려운 것들은 파트너와 함께 철저하게 계산했어요. 수납과 기능을 벽 안에 숨기고 경계를 흐리게 한 것도 모두 그 단계에서 정한 거예요. 대신 그 안을 채우는 일은 느슨하게 두었어요. 현장에서 주워 온 돌멩이, 한 장씩 모은 LP, 직접 빚은 달항아리, 그리고 파트너가 해외에서 하나둘 데려온 자기와 소품들까지 그때그때 마음이 가는 것들이 자리를 찾아가요. 단단한 뼈대가 있으니까, 오히려 그 안에서는 마음껏 느슨해질 수 있더라고요.
공간을 디자인하는 사람으로서 생각하는 '좋은 집'의 조건은 무엇인가요? 실제 이 집에 살면서 그 기준이 달라진 부분도 있을까요?
처음에는 주어진 공간을 아름답게, 심미적으로 잘 디자인하는 것에 만족했어요. 그런데 이 집에 직접 살아보니, 사소한 것들에 담긴 추억과 시간, 그 이야기가 하나씩 이어지는 게 더 좋더라고요. 늘 큰 것을 보며 일해 왔는데, 작은 것들에도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고 그걸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는 걸 배우고 있어요. 그렇게 지내다 보니 집이 제가 되고, 제 삶이 곧 집이 되어가요. 지금 생각하는 좋은 집은 사람과 공간이 함께 삶을 영위하며 하나가 되어가는 집이에요. 그래서 요즘은 공간을 의뢰받으면, 도면보다 그곳에 담길 삶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요. 조금 느려도, 그게 결국 좋은 집에 닿는 가장 빠른 길이더라고요.
집에서 보내는 평범한 일상은 어떤 모습인지?
저는 보통 새벽에 일을 시작해요. 커피를 마시며 일하다 보면 파트너가 출근하고, 그렇게 하루가 본격적으로 시작돼요. 낮에는 수공간과 버드나무가 어우러진 고요한 정경을 바라보며 함께 일하고, 가끔은 LP를 한 장 올려두고 잠깐 쉬어 가요. 아이디어나 설계가 잘 풀리지 않는 날에는 큰 창을 활짝 열어요. 그러면 작업 공간과 마당이 하나의 거실이 되는데, 그곳에 누우면 오롯이 파란 하늘과 바람에 흔들리는 잎들만 보여요. 그렇게 가만히 바라보며 머리를 비우기도 하고 영감을 채우기도 해요. 파트너가 퇴근하고 나면 카바농은 온전히 사적인 공간이 돼요. 단을 내려 만든 욕조에 물을 받아 몸을 담그고, 그날의 일상을 천천히 되짚어 보며 하루를 마무리해요.
낮에는 작업실, 저녁에는 온전한 개인의 공간이 되는 집이에요. 하루 중 이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과 장소는 언제, 어디인가요?
이른 아침, 새벽이에요. 방에서 나와 복도에 서면, 하루 중 햇빛이 가장 깊게 거실 공간으로 들어와요. 저희가 이 집에서 찾은, 이 집만의 고유한 빛이에요. 아직 동네도 잠든 고요한 시간, 그 빛이 비어 있는 공간을 천천히 채워가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하게 정돈돼요. 하루를 시작하기 전의 이 짧은 순간을 가장 좋아해요.
공간을 비워내는 설계와 좋아하는 물건을 수집하는 취향이 흥미로운 대비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물건을 들이고 배치할 때 공간의 여백과 균형은 어떻게 조절하나요?
공간을 비워내는 건 비어 있는 상태가 좋아서가 아니에요. 비움은 채움을 위한 준비예요. 수납이 벽 안에 숨어 있어서, 밖에 나와 있는 물건은 자연스럽게 제가 정말 좋아하는 것들만 남아요. 그래서 물건을 둔다기보다 하나씩 '자리를 내어준다'는 느낌으로 배치해요. 달항아리 하나, 돌멩이 몇 개처럼 한 자리에는 하나의 이야기만 두려고 하고, 주변을 충분히 비워서 그 물건이 숨 쉴 수 있게 해요. 비어 있는 공간이 있어야 물건이 더 또렷하게 보이더라고요. 애써 꾸미지 않아도, 그렇게 놓인 물건들은 공간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요.
공간을 채운 사물 중 각별한 애정을 지닌 가구나 오브제가 있다면?
현장에서 모은 돌멩이: 신입 때부터 현장에서 남은 돌들을 조금씩 모아 왔어요. 예전에는 방 한쪽에 오브제처럼 두었는데, 이 집으로 오니 그 돌들이 놓일 자리가 꼭 맞더라고요. 제가 거쳐 온 현장들의 작은 조각이라, 돌 하나하나에 그때의 시간과 기억이 담겨 있어요.
200년 된 나무로 만든 선반: 한 클라이언트께서 선물해 주신 선반이에요. 일본에서 200년을 지나온 나무로 만든 것인데, 지금은 제 방에 두고 아끼는 소장품들을 올려두었어요. 오랜 시간을 견딘 나무가 새로 시작하는 이 집에 놓여 있다는 게 참 좋아요. 함께 공간을 만들었던 분의 마음이 담겨 있어서 더 각별해요.
직접 빚은 달항아리: 어느 날 문득 달항아리가 만들고 싶어져서 도예를 시작했어요. 하다 보니 그릇과 잔도 빚게 됐고, 몇 점은 소중한 지인들에게 선물했어요. 그중 달항아리 하나는 파트너에게 선물했는데, 지금은 저희 작업 공간에 놓여 있어요.
최근 구매한 인테리어, 리빙 아이템은? 나아가 구매하고 싶은 아이템이 있다면?
최근에 알론맨션의 타나 스툴(Tana stool)을 들였어요. 오래된 티크 고재로 손으로 만든, 블랙의 멋스러운 스툴이에요. 이 집의 가구는 의자 몇 가지를 빼면 대부분 저희가 디자인한 제작 가구인데, 이 스툴은 처음부터 이 공간을 위해 만든 것처럼 잘 어울려요. 손님이 오시면 가방을 올려두는 자리가 되기도 하고, 평소에는 오브제를 올려두는 작은 받침이 되기도 해요.
알론맨션은 고요한 분위기에 자연의 결이 살아 있는 물건들이 많아서, 이 집과 결이 닮아 저희가 특히 애정하는 브랜드예요. 그래서 앞으로 들이고 싶은 것도 알론맨션의 제품들이에요. 손님이 앉을 의자로는 세린 체어(Serene chair)를 눈여겨보고 있어요. 티크 고재 프레임에 손으로 엮은 시트가 저희의 짙은 금속 테이블과 잘 어우러질 것 같아요. 그리고 마당에는 쿠노 러스틱 스툴(Kuno rustic stool)을 두고 싶어요. 가공을 최소화한 투박한 고재 스툴이라, 이 집을 처음 봤을 때 상상했던 것처럼 마당에 앉아 조용한 시간에 버드나무를 바라볼 자리가 되어줄 것 같거든요.
공간을 정의(대표)하는 3가지 키워드는?
고요 · 푸름 · 여백
고요 — 고즈넉한 마을과 정제된 공간
푸름 — 자연과 공간이 어우러지는 푸른 생명력
여백 — 비워 둔 자리, 그 자리를 천천히 채워가는 이야기
끝으로, 앞으로 공간에 더해 보고 싶은 변화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정원이요. 이사하면서 취미가 하나 더 생겼는데, 그게 바로 정원이에요. 마당과 화장실 안의 작은 정원을 돌보다 보니 식물 욕심이 점점 나더라고요. 요즘은 이 집에 어울리는 식물을 찾고 있어요. 계절마다 다른 초록이 자라는 다채로운 푸름을 들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지는 집으로 천천히 채워가고 싶어요.
Credit
- 사진&글 @nonnw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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