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버리의 귀환,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잘라냈나
멀버리가 런던 패션위크로 돌아왔습니다. 크리스토퍼 케인의 첫 컬렉션이 남기고 잘라낸 것들에 대하여.
전체 페이지를 읽으시려면
회원가입 및 로그인을 해주세요!
멀버리가 런던 패션위크로 돌아왔습니다. 복귀의 키를 쥔 주인공은 크리스토퍼 케인입니다. 멀버리 여성 레디투웨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합류한 그가 2027 봄 여름 컬렉션을 통해 브랜드의 새 방향을 처음 공개했습니다.
중요한 건 돌아왔다는 사실보다, 무엇을 남기고 돌아왔느냐입니다. 컬렉션의 제목은 ‘City, Town, and Country’. 도시와 마을, 그리고 전원인데요. 지리적인 구분처럼 들리지만, 이번 컬렉션은 영국 생활 안에 공존하는 서로 다른 풍경을 들여다봅니다. 기성 문화와 서브컬처, 고급스러움과 실용성, 자연과 산업, 획일성과 개성. 하나의 영국을 정의하려 하기보다 서로 다른 영국의 얼굴을 한 컬렉션 안에 겹쳐 놓은 셈이죠.
그리고 크리스토퍼 케인은 새 출발을 위해 오히려 오래된 것부터 꺼냈습니다. 서머셋에서 시작된 브랜드의 역사, 가죽과 장인정신, 베이스워터. 그리고 브랜드 이름과 로고의 모티프가 된 멀버리 나무인데요. 이번 컬렉션을 관통하는 상징은 이 나무와 도끼입니다. 나무가 뿌리와 성장이라면, 도끼는 가지치기입니다. 오래된 가지를 잘라내야 다시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는 이치죠.
그래서 이번 컬렉션이 휘두른 도끼는 파괴보다 갱신을 향합니다. 과거를 지우는 대신 무엇을 남길지 다시 결정하기. 이 은유는 옷의 구조가 됐습니다. 날카로운 컷아웃이 미니드레스와 가죽 코트, 시어 스커트를 가로지르는 한편, 도끼의 형태는 백과 슈즈 안에서 추상적인 실루엣으로 바뀌었죠. ‘잘라내고 다시 연결한다’는 행위가 하나의 디자인 방법론이 된 셈입니다.
그 재편의 중심에는 베이스워터가 있습니다. 멀버리의 대표적인 가방이죠. 하지만 이번 시즌 베이스워터는 완성된 아이콘으로 소환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해체됐습니다. 특유의 각진 플랩 형태는 코트와 스커트의 가죽 패널이 되는가 하면, 재킷과 니트, 드레스의 절개선으로 이어집니다. 이렇듯 아카이브를 다루는 태도가 이번 컬렉션에서 특히 흥미롭더군요. 멀버리는 과거를 복원하지 않았습니다. 분해했습니다. 베이스워터에서는 플랩의 선을 꺼냈고, 헤리티지 체크에서는 패턴 대신 그 안의 익숙한 색을 골라 새로운 팔레트로 확장했습니다. 과거의 이미지를 반복하지 않고 여전히 유효한 요소를 골라 새로운 자리에 옮긴 것이죠.
‘가지치기’라는 은유가 가장 설득력을 갖는 것도 이 지점입니다. 무엇을 버렸느냐보다, 무엇을 남겼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토퍼 케인과 멀버리의 만남이 흥미로운 이유는 또 있습니다. 멀버리가 이어온 영국성과 케인이 경험한 영국은 결이 달라 보이는데요. 케인이 성장한 스코틀랜드의 풍경은 전형적인 전원 이미지와는 달랐다고 합니다. 그에게 더 가까웠던 것은 산업도시와 콘크리트의 풍경이었죠.
그래서 이번 컬렉션의 영국성도 목가적이거나 고전적인 전원 이미지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교복과 럭비 셔츠, 파카가 가죽과 테일러링 옆에 나란히 놓입니다. 1990년대 오리지널 멀버리 스웨트셔츠를 거의 그대로 되살린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결국 이번 컬렉션이 넓힌 건 옷보다 ‘영국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전원과 장인정신뿐 아니라 산업도시와 거리, 풋볼 서브컬처까지 모두 같은 영국의 일부로 끌어들였습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첫 시즌은 흔히 변화의 크기를 증명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죠. 하지만 변화가 크다고 해서 반드시 새로운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멀버리는 반대의 방법을 택했습니다. 브랜드를 알아보게 만드는 최소한의 단위를 추려냈습니다. 그런 크리스토퍼 케인의 첫 시즌 목적이 앞으로 반복할 코드의 기준을 세우는 것이었다면, 이 화법은 꽤 효과적이었습니다. 쇼가 끝난 뒤에는 기립박수가 이어졌습니다. 새로운 멀버리의 첫 무대를 향한 현장의 기대와 환영은 분명했죠. 멀버리는 이번 시즌 어느 가지를 남기고, 어느 가지를 잘라낼지는 정했습니다. 다시 자랄 준비를 마쳤습니다.
Credit
- 사진 MULBERRY
2026 가을 필수템은 이겁니다
올가을 활용하기 좋은 패션·뷰티 힌트는 엘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