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사랑해, 죽도록 미워해
엄마와 싸운 뒤 적어보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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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였으면 말도 안 섞었을 것이다, 엄마랑은. 초중고 내내 같은 반이었어도 급식 한 번 겸상 안 했으리라 확신한다. 오은영 박사님 말처럼 그냥 이름만 알고 있을 뿐, 마주치면 인사하는 같은 반 애일 뿐, 절대 친구는 아닌 사이. 엄마는 내가 싫어하는 타입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분명 내가 좋아하지 않는 요소를 모두 갖춘 여자다. 예민하고, 까탈스럽고, 세상 모든 작은 것에 잘 놀라고, ‘왜 저래?’ 싶을 정도로 겁 많고, 과하게 교양 차리면서 주변을 마이크로매니징하는 자존심 센 통제광, ‘내가 이런 걸 싫어하는구나’라고 학습하게 된 모든 경험의 레퍼런스이자 원본. 엄마를 겪으면서 나는 내 반(反) 취향의 아우트라인을 그렸다.
사랑? 물론 사랑하지 ,엄마를. 근데 누누이 말하지만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일이다. 세상에 발주되기 전부터 이미 내 안에 프로그래밍된 기본 하드웨어 시스템이며, 애초에 내가 조립된 공장이 그녀의 뱃속인 걸 부정할 순 없다. 나는 10개월 훌쩍 넘게 그녀의 골수까지 쪽쪽 빨아먹고 그녀를 닮은 얼굴로 그녀를 찢고 나온 기생수다. 심지어 나는 주수를 꽉 채우고도 나가기 싫다고 버티는 진상이어서 예정일을 보름이나 넘기고 끌려 나왔다. 엄마 입장에서는 악성 재고이자 아들도 아닌 불량품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은 내 입장에서 엄마를 사랑하냐 안 하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 짜증 나게도 그건 우주의 섭리 레벨에서 절대 명제로 정해진 자연 현상이다. 나는 그 사랑 위에 고작 미움이나 얄미움 같은 걸 토핑처럼 얹을 수 있을 뿐.
하지만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얘기가 아주 달라진다. 사랑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면 좋아함은 선택이다. 내 취향과 상황적 합리성을 고려해 조절할 수 있는 철저한 옵션. 스위치로 딸깍 눌러서 켜져버리는 알전구 같은 게 사랑이라면, 좋아함은 다이얼로 돌려 광도를 조절하는 섬세한 고급 조명이다. 기분 따라 언제든 1부터 10까지 정도를 조절할 수 있고, 그 결과가 흡족하다. 당연하지, 다이얼을 돌린 게 나니까. 하지만 저놈의 스위치는 무슨 고스톱도 아니고 낙장불입이라니까. 내가 켠 것도 아닌데 한번 켜놓으면 도대체 꺼지지 않는다. 어쩌다 뭔 짓을 해서 껐다고 생각해도 소용없다. 저 벽 뒤에 두꺼비집 스위치는 여전히 올라가 있거든. 전기세가 또 자동이체라 통장에 잔고가 없어도 마이너스로 빼가요. 그게 엄마에 대한 나의 사랑이다.
영화 <레이디 버드> 스틸컷
근데 좋아하진 못해. 그럴 순 없어. 엄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마 내 심정 그대로에 징그러움까지 추가되지 않았을까. 원본을 손상시켜 가며 하드 카피로 출력된 복제본이 제일 질색하는 짓만 골라 하고 다닌다면, 게다가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자신에게 퍼붓는다면? 나는 대한민국 5대 악녀 따위의 타이틀로 뉴스를 장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랑은 하지만 좋아하기는 힘든 사람. 그것이 엄마와 내가 서로를 정의하는 관계. 근데 더 최악인 건 뭐냐고? 서로 상대방이 자기를 좋아해 주길 바란다는 것. ‘사회 윤리에 합당한 모성애나 도리’라는 최소 조건에 만족 못 하고 서로 자신을 인간적으로 좋아해 주기를, 그게 진심이기를 당당히 요구한다. 심지어 다른 사람보다 더 특별히.
예상했겠지만 엄마랑 한판 뒤집어지게 싸우고 쓰는 글이 맞다. 새벽에 스마트폰 액정이 터질 것같이 길고 긴 비난의 카톡을 주고받고 마지막 일갈할 한 마디를 차지하려고 구질구질하게 서로 말꼬리를 잡다가 결국 한 명이 먼저 카톡 방을 나가버림으로써 소정의 승리를 쟁취하는 그런 뻔한 다툼. 내가 죽어서라도 나로 인해 상처받길 원하고, 또 나 때문에 상처받았을까 봐 걱정과 후회로 잠 못 이루는 그녀와 나. 잠깐만, 이거 완전 애인 사이잖아. 정말 기분 나쁘네. 생각해 보니 헤테로 여성들이 결국 아빠 같은 남자를 만나게 된다는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듣는 것처럼 나는 묘하게도 가장 가까웠던 여성들이 모두 엄마랑 비슷한 타입이긴 했다. 사람은 결국 자기랑 비슷한 사람한테 끌리기 마련이니까. 세상에서 엄마랑 안팎으로 가장 닮은 사람이 누구겠냐고.
내가 싫어하는 엄마의 모든 성향이 전부 내 안에 있다. 세상에 감추려고 애쓰는 내 모습을 그녀에게서 확인할 때마다 내 오랜 노력이 한순간에 부질없는 것 같아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래 봤자 넌 어쩔 수 없이 너(나)야’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근데 그 요소들을 다른 사람에게 느끼면 그게 또 괜찮게, 때로는 심지어 귀엽게 보인다는 게 정말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다. 예민함은 섬세함으로, 까탈스러움은 정교한 취향으로, 겁 많은 건 여림으로, 통제성은 든든한 리더십으로 탈바꿈해 쉽게 내 호감을 산다. 나는 엄마를 사랑하지만 사랑할 수 없는 마음을 제3자에게 투영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금 타이핑하면서 문득 떠올라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나는 굴절 분노가 아닌 굴절 사랑을 하는 거 아니냐고.
영화 <레이디 버드>의 감독 그레타 거윅은 대부분의 여성이 청소년 시절 각자의 어머니와 아름답고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한 관계를 맺는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면 나는 40년째 끝나지 않는 청소년 시절을 보내는 중이다. 아름답고 골치 아픈 이 관계의 형태는 엄마든 나든 한쪽이 관 뚜껑을 덮기 전까지 계속될 것 같은 예감. 정말이지 지독한 사랑이다. 안타까울 만큼 서로에게 닿지 못하는 두 여인이 마지막 순간까지 엇갈리면서 ‘이게 사랑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촌스러운 클리셰.
나는 스스로 증오하지 않기 위해 엄마를 미워하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엄마를 사랑한다. 하염없이 사랑하려고 노력한다(여기서 ‘하염’은 ‘사랑’에 걸리는 게 아니라 ‘노력’에 걸리는 부사다). 엄마가 미워. 엄마를 사랑해. 엄마 같은 엄마는 필요 없어. 엄마가 없으면 어떡하지? 원고 요청을 받고 막막하던 차에 시기적절하게 싸워줘서 고마워. 부정적 감정으로만 작동하는 내 창작력의 가장 큰 영감이자 불쏘시개가 돼주는 여자. 이건 내가 그녀에게 보내는 화해의 러브 레터다. 이제 마지막 엔터를 치고 다시 카톡 방에 들어가야지. 그녀에게 차마 사랑한다고는 말 못 하지만 미안하다고 해야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하트를 쏘는 바보 같은 이모티콘으로 숨기면서.
에리카
여성 전용 헬스장 ‘샤크짐’ 공동대표. 사무직 직장인으로 살다가 30대에 완전한 ‘운동인’으로 각성했다. <떼인 근력 찾아드립니다>를 펴냈다.
Credit
- 에디터 전혜진
- 아트 디자이너 이소정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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