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순이 코와 발이 없는 코끼리를 통해 발견한 것들
엄정순이 코끼리의 여정을 따라 바라보는 것. 자신만의 긴 여정에서 발견한 백만 가지 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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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킷은 Niche2night. 링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는 개관 10주년 기념전 <우리의 몸에는 타인이 깃든다>가 한창이다. ‘배리어 프리’가 보조 수단 개념이 아닌 예술의 한 장르로 표현되는 공간에서 당신의 ‘코 없는 코끼리 no. 2’(2024~2025)는 관람자에게 무엇을 묻고 있나
코끼리에게 코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대체 불가한 권력 혹은 반드시 있어야 할 것으로 묘사돼 왔다. 그 존재를 이름 짓게 만든 코가 사라진 형상 앞에서 그간 당연시했던 인식 구조가 붕괴된다. “정말 없으면 안 됐던 거야?”라고 자문하면서 말이다. ‘코 없는 코끼리’ 시리즈에는 다양한 크기와 신체를 지닌 코끼리들이 있다. 처음에 코를 없앴다면 점차 다리도 없애고 서서히 몸의 일부가 사라지고 있는데, 사라진 자리에 대체할 ‘무언가’를 넣는다. 그러니 ‘없는’ 상태가 아닌, 무언가가 ‘생기는’ 상태인 것이다. 이번 전시작인 ‘코 없는 코끼리 no. 2’는 다리가 두 개뿐이다.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가느다란 금속 봉이라는 이질적 물성을 채워 넣었다. 관람자는 있어야 할 것이 사라진 자리를 집중해서 들여다볼 것이다. 왜 그에게는 코와 다리가 없는지, 없다면 그 자리에 무엇이 있을지 질문하면서.
이 외에도 전시에 무장애와 장애, 참여, 상호작용 예술을 연구해 온 다섯 팀의 장애와 비장애인 작가들의 신작과 대표작으로 경계를 허무는 시도가 관찰된다. 벽면에는 촉감 바를 설치하고 ‘관람자’라는 표현 대신 ‘참여자’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코 없는 코끼리’는 직접 만져볼 수 있다는 게 특이점이다
작품을 눈으로만 관람하는 것은 어쩌면 시각 중심의 감상법일지도 모른다. 물체에 손을 대고 그만큼 가까이 다가가면 경계는 더욱 유연하게 허물어진다. 이 전시 제목처럼 관람자가 내 작품 안에 깃들게 하려는 시도의 일부다. 지난 2023 광주비엔날레에서도 약 30만 명의 관람자들이 코끼리를 만졌고, 그로 인해 보풀이 생겼는데 이것들을 모아 다시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사람의 체온을 재료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도 물론이지만 감각과 몸에 대한 탐구에 가깝다. 우리는 몸의 감각을 당연시한다. 나는 감각이 하나 없거나 약한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작업해 오다 보니 거꾸로 내게 약한 감각이 무엇인지 반추하게 됐다. 감각 또한 공부하듯 수련해야 온전히 누릴 수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감각의 세계를 인지해야 한다. 나는 시각 장애인들과 함께 그런 작업을 지속하는 사람이다.
1996년부터 거의 30여 년간 ‘우리들의 눈(Another Way of Seeing)’ 프로젝트 디렉터로 시각 장애인과 예술적 관계를 나눠 ‘본다’는 행위의 근원을 찾아왔다. 단순 복지나 교육 목적이 아닌, 예술 생산 주체로서 그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말이다
사회가 장애인을 대하는 것에는 복지적 관점과 의학적 관점 등 여러 갈래가 있지만, 나는 예술적 방법으로 관계를 맺어왔다. 서로가 ‘보는 방식’에 대해 의심하고, 용기 있게 변화를 거듭하고, 서로 자극을 주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관계는 각자의 감각에서 추출한 자기표현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예술 장르에서만 가능하다. 끊임없이 주변을 설득해야 할 정도로 그들의 세계에 다가가는 게 꽤 어려웠지만, 30년 전 독일 유학에서 돌아와 대학 전임 교수로 근무하다 충주의 한 장애인 학교 학생들과 함께한 미술 수업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운동장 한쪽의 컨테이너를 빌려 살다시피 하면서 시각예술가와 시각 장애인이 함께 ‘본다는 것’의 의미를 찾는 여정이 시작됐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과 무언가를 해내면 봉사로 간주하거나 주체를 악마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 또한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웃음).
맹학교의 아이들, 당신이 그때 마주한 예술적 주체들은 무엇을 보고 있었나
그들의 시야는 다양하다. 엄정순이 180°의 선명한 앵글로 세상을 본다면, 어느 시각 장애인 친구의 시야에는 까만 점이 패턴처럼 떠다닌다고 한다. 학생들에게 “넌 어떻게 보이니?”라고 물으면 처음에는 다들 “그저 시야가 좁다”는 식으로 뭉뚱그려 말하지만, 끈질기게 물으면 그들이 꺼내놓는 다양한 눈의 스펙트럼에 놀라게 된다. 빛과 어둠만 구별하는 눈, 시야의 반이 어둠인 눈, 가로로 층이 생겨 세상이 수평으로 보이는 눈, 반달 모양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는 눈까지. 어쩌면 누구도 묻지 않았던 질문이자 시각 장애인끼리도 주고받지 않았던 질문이다. 우리 사회는 다양한 눈을 보지 못하고 그저 시각 장애인을 한덩어리로 본다. 시각에는 ‘사고력’이 동반되기 때문에 ‘시각 장애’보다 ‘시야 장애’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3년은 내 30년 작업의 예고편이었다. 비장애인도 모두 다르게 세상을 바라본다. 하지만 소위 왕따가 될까 봐, 내 말이 거짓말이라고 할까 봐 다르게 보기를 포기한다. 점잖고, 안전하고, 멋져 보이는 말만 찾으면서.
어릴 때 녹슨 수도꼭지에서 녹물이 흘러나오는 걸 보고 “오렌지주스가 나온다”고 보이는 대로 말했다가 엄마에게 ‘거짓말쟁이’로 혼난 걸 계기로 ‘보는 것’에 대한 탐구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어쩌면 억울함이 당신의 예술적 동력인가
억울함은 나만의 감각이었다(웃음). 그간 우리가 타성적으로 배워온 감각과 관념이 있다. 문고리는 대충 그렇게 생겼고, 하늘은 파란색, 수저는 은색이고…. 모두 학습한 대로 보지 않고 자기식으로 세상을 보면 엉뚱하거나 ‘4차원’이라는 식으로 매도당한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랬다. 숟가락에 반사돼 구부러진 내 얼굴을 보고 괴물이 나타났다고 말하면 가족은 “너는 대체 왜 그러니? 오렌지주스가 나온다는 것도, 괴물이 나온다는 것도 거짓말이야”라고 꾸중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사춘기 때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본 것들을 내 식으로 얘기하면 또 거짓말이라고 할 테니까. 누군가에게는 별일 아니겠지만 내게는 이 경험이 시각적 트라우마가 됐다. 내가 본 것에 관해 소통하지 못하니 세상과 불통하고 있다는 느낌이 내면에 쌓였다. 그때 하나의 질문이 자라났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대체 세상을 어떻게 보는 거야?” 내가 무엇을 잘못 보고 있는지 억울해서 궁금함과 분노가 뒤섞인 채 기필코 그 정답을 알아내겠다며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너무 거대한 질문이라 아직 정답을 찾지 못했지만 계속 탐험할 수 있어 좋다. 그 질문이 상상하지 못했던 시각 장애인의 세계와 협업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2024년에는 전국 어린이 학교를 순회하는 프로그램 ‘코끼리 만지다’의 여정을 바탕으로 쓴 논픽션 책 <코끼리를 만지면>을 출간했다. 본문 중 한 시각 장애인 학생은 “코를 만지는데 손이 콧구멍 속으로 쑥 들어가버렸어요. 끈적거리고, 무진장 컸고, 그 속에서 바람이 불었어요”와 같은, 세상에 없는 코끼리들에 대한 감각과 묘사를 드러낸다. 그런 경험을 책으로 담아내기로 결심한 이유는
아이들에게 “코끼리가 지상에서 제일 크대. 너한테 가장 큰 건 뭐야?”라고 물으면 그들은 이미지로 기꺼이 답한다. 그 대담을 다양한 형태로 담았다. 얼마 전 출판사 무제의 유튜브 채널에서 배우 박정민 씨가 이 책을 소개해 주었다. “책의 취지 이상으로 재밌고 가치있다”고 평한 점이 인상 깊었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대하는 방식이나 그들에 대한 반응은 실제로 만났을 때와는 달리 천편일률적이다. ‘장애를 극복하고…’ 어쩌고저쩌고. 장애는 극복하지 못한다. 누구나 겪는 자신만의 인생 숙제가 있듯, 자신의 몸과 화해하고 사는 다채로운 방식에 관한 경이로움을 유쾌하고 통쾌한 방식으로 풀고 싶었다.
팬데믹 이전에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로 매년 시각 장애 학생들과 태국 치앙마이에 코끼리를 만나러 가기도 했다. 만지고, 느끼고, 거대한 코끼리와 교감한 아이들은 각자가 ‘본’ 코끼리를 다양한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코가 없거나, 코만 있거나, 납작하게 펼쳐져 있거나…. 보이지 않아 더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했던 이 경험은 ‘보는 것’을 탐구해 온 당신의 예술적 여정에 여전히 영향을 끼치나
한국 사회에서 ‘장애’로의 접근은 문턱이 높고, 다가가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불교 경전 <열반경>에는 익히 잘 알려진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표현이 있는데, 전체를 보지 못하면서 자신이 본 것만 주장하는 인간의 우매함을 비유하던 말은 어느덧 시각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로 변질됐다. 하지만 ‘본다’의 본질을 꿰뚫는 단어이지 않나. 우리에게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대상을 볼 때와 그 이미지가 없을 때 대상을 느끼는 방식은 다르다.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프로젝트를 위해 펀딩하고, 아이들의 부모와 학교를 설득하고, 스태프를 구성하고, 현지 일정을 꾸려가는 과정이다. 즉 제각각을 대상으로 한 설득 과정에서 많은 걸 배웠다. 이 프로젝트에 관한 다양한 반응을 수집해 가며. 과거에는 스튜디오에서 혼자 그리고 싶은 것들을 그리고 만들었다. 지금처럼 타인과 끊임없이 균열을 일으키고 타협하고 이해하는 과정 없이 말이다. 조형적 고민은 있었지만, 마찰의 경험이 없던 때와 정반대 작업을 하는 예술가가 돼서 기쁘다. 편견에 쌓인 막을 계속 뚫어나가는 일, 불가리아 출신 예술가 크리스토의 표현처럼 ‘설득이 내 작업’이다. 사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품은 이후, 아무리 유명한 책과 그림을 봐도 잘 모르겠더라. 휼륭하고 좋다는 건 알겠으나, 내 질문에 답을 제시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육체적으로 힘들 때가 많고 어떤 오해도 가끔 신경 쓰이지만, 자기 질문을 던져놓고 그것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예술이 무엇인지, 예술가로 산다는 건 무엇인지 조금씩 배워가는 것 같다.
우리 사회 소수자들이 겪는 것처럼 600년 전부터 이주와 추방을 거듭해 온 디아스포라의 상징적 동물로서 오래도록 ‘보는’ 여정을 함께해온 코끼리는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가
코끼리와의 첫 대면은 동남아 여행 중 우연히 일어났다. 야생 코끼리와 어쩌다 눈이 마주쳤는데, 그 눈이 ‘우리를 재빨리 근원으로 데려 가라’고 말하고 있더라. 돌아와서도 이 문장이 잊히지 않았다. 근원은 무엇이고,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로 데려간다는 건지. 이 단어의 조합을 시각적으로 찾아가는 과정을 지속해 오고 있다. ‘우리’라는 건 그야말로 사회다. 다양성이자, 나와 너의 이야기다. 코끼리는 내게 ‘본다’는 질문에 관한 근원적 메타포다.
앞으로는 어떤 것을 ‘볼’ 계획인가
그간 대중을 상대로 ‘쓸모없는 안경’을 만드는 워크숍을 꾸준히 진행해 왔다. 시각의 상징적 존재가 되는 안경을 참여자 각자의 사연과 이야기로 꾸미다 보면 그런 장식 때문에 시야가 가려지고, 결국 불편한 물건이 된다. 그래서 이름 붙이길 ‘멋진 불편한 안경’들이다. 바깥세상을 보려고 사용하는 물건으로 스스로를 보게 되는 멋진 경험이다. 참여자는 ‘불편미’를 장식한 채 시각장애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체험하게 된다. 참가자 중 어느 중년 남성의 말이 여전히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첫아들이 약시라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데, 그땐 그걸 모르고 구박했습니다. 왜 세상을 삐딱하게 보냐고요. 지금은 아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한쪽에는 눈물이 흐르고 한쪽에는 승리의 왕관을 쓴 안경을 만들었어요. 그럼에도 아들이 세상을 잘 버텨줬기 때문에 이 안경의 이름은 ‘빅토리’입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미감이 있고, 그 아름다움은 불편함에서 오기도 한다. 이것이 내 작업의 궁극이다.
엄정순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후 독일 뮌헨대학교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1996년부터 사단법인 ‘우리들의 눈’을 설립해 맹학교 미술 교육, 출판, 전시, 아트 프로젝트 등 예술 교육 관련 프로젝트를 이끈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아트선재센터· 소마미술관·두손갤러리 등에서 전시를 열었고,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박서보 예술상을 수상했다.
Credit
- 에디터 전혜진
- 사진가 영배
- 스타일리스트 이진혁
- 헤어&메이크업 아티스트 서채원
-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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