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주얼리
보석의 역사를 말할 때, 왕실을 빼놓을 수 없다. 왕관 위 다이아몬드, 세대를 거친 반지 등 왕실 주얼리는 시대를 품은 기록이자 권위의 언어였다. 과거의 빛은 현재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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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은 아름다운 보석으로 그들의 존재를 부각해왔다. 국가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신성한 운명을 대변하기 위해, 그리고 정략과 외교의 수단까지. 하이 주얼리의 뿌리는 고대 왕실의 화려한 보석에서 시작되었고, 오늘날까지 그 유산을 이어온 브랜드들은 왕실과의 깊은 연계를 통해 성장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왕실의 공식 주얼러로 불리며 역사의 중심에 자리한 수많은 보석 하우스가 이를 증명한다. 그라프는 영국 왕실에 세공된 다이아몬드로 명성을 얻었고, 쇼메는 나폴레옹의 황후 조세핀을 위한 티아라로 명성을 얻으며 성장했다. 부쉐론은 러시아 황실의 주문을 받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부티크를 열었으며, 까르띠에는 20세기 초 영국과 스페인 왕실의 공식 주얼러로 임명되며 전성기를 맞았다. 이처럼 하우스 주얼리 브랜드의 정체성은 왕실이라는 무대에서 탄생하고 발전해 왔다. 하이 주얼리의 세밀한 결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왕실의 유산. 신성의 상징이던 보석은 어느새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자 이야기가 되었고, 전통은 변화 속에서도 그 찬란함을 잃지 않았다. 그 빛의 여정을 따라가보자.

고대~중세: 신의 뜻을 입은 보석들
고대와 중세의 왕실 주얼리는 신성한 권위의 물질적 증거였다. 이집트에서는 금과 청금석으로 장식된 장신구가 파라오를 살아 있는 신으로 선언하며 영생을 약속했다. 대표적으로 금과 청금석으로 만든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는 파라오의 신성을 극적으로 시각화한 예다. 로마 제국의 황제는 월계관과 보석 장식을 통해 통치의 정당성을 ‘하늘의 뜻’에 연결했고,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보석이 박힌 왕관으로 신성한 권위를 드러냈다. 중세 유럽에 이르러서는 교회와 왕권이 결합하며 주얼리가 정치적 도구로 진화했다. 대관식에서 사용된 보석은 군주의 신성성과 통치의 정당성을 상징했으며, 정략결혼에서 교환된 금목걸이와 반지는 왕조 간 동맹을 공고히 한 외교적 약속으로 기능했다. 1477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와 부르고뉴 공작의 딸 메리의 결혼식에서 주얼리가 교환되며 동맹을 강화한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 주얼리는 혈통의 연속성과 왕실의 신성한 운명을 드러내는 필수 요소였다.
르네상스~로코코: 보석 위에 핀 광기와 예술
르네상스 시대에 주얼리는 예술과 권력의 융합으로 화려함을 추구하며 혁신을 맞았다. 진주와 다이아몬드는 왕실의 세련미를 상징하는 예술적 소재로 자리 잡았고, 초상화 속 군주의 정체성과 국가 위상을 드러내는 매개체로 깊이를 더 하기 시작했다. 1588년에 스페인 아르마다 함대를 격파한 후 그려진 초상화에서 엘리자베스 1세가 진주로 장식된 드레스를 입고 ‘처녀 여왕’의 순수함과 권위를 동시에 과시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로 들어서며 주얼리는 더욱 극적인 사치품이 되었다. 거대한 보석은 궁정 문화의 중심인 동시에 왕실의 무한한 부와 절대 권력을 대중 앞에 펼쳤다. 루이 14세가 탐험가 장 바티스트 타베르니에로부터 구입한 거대한 블루 다이아몬드는 궁정 보석 세공사 시우르 피토에게 재가공을 맡기면서 ‘프렌치 블루’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이 주얼리는 프랑스 왕관에 세팅되어 ‘태양왕’의 위엄을 빛냈다. 1885년, 러시아의 금세공사 피터 칼 파베르제는 알렉산드르3세의 부활절 선물로 보석이 박힌 첫번째 파베르제 에그를 제작해 왕실의 부와 예술적 세련미를 찬란히 드러냈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접어들며 주얼리는 개인적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남편 앨버트 공과 사별 후 빅토리아 여왕이 늘 지니고 다니던 앨버트 공의 머리카락이 담긴 펜던트는 애도와 추모를 상징했다. 이 시기 주얼리는 권력의 상징을 넘어 인간적 내러티브를 담는 도구로 변모했다.

19~20세기: 왕관에서 심장으로
20세기 왕실 주얼리는 여전히 전통의 무게를 품고 있었지만, 점차 개인의 서사와 시대의 감각을 반영하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과시적 화려함을 억눌렀지만, 역사적 주얼리는 오히려 왕실의 불변성과 정통성을 되살리는 조용한 닻이 되었다. 1928년, 인도의 파티알라 마하라자는 부쉐론에 왕실 보물의 세공을 의뢰하며 동서양의 보석 미학이 만나는 상징적 교차점을 만들었다. 부쉐론은 이를 계기로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다. 이 사례는 왕실 주얼리가 하나의 국경을 넘어 세계적 문화 교류의 장이 되었음을 방증한다. 왕실 주얼리는 점차 고전적 권위에서 벗어나 감성과 대중성의 조화를 모색했다. 1956년, 할리우드 스타 그레이스 켈리와 모나코 레니에 3세 공의 결혼은 그 흐름의 전환점을 보여준다. 반클리프 아펠은 왕비가 되는 그녀를 위해 진주와 다이아몬드를 소재로 한 네크리스·귀걸이·브레이슬릿 세트를 제작했고, 이는 전통적 가치에 현대적 감성을 더한 왕실 주얼리의 새로 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개인의 품격과 낭만적 감성을 담은 이 주얼리 세트는 모나코 왕실의 정체성을 재정립했고, 반클리프 아펠은 공식 주얼러로 자리 잡는다. 주얼리가 공식성과 권위의 상징에서 감정의 영역으로 확장된 흐름은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의 사파이어 약혼반지를 통해 더욱 선명해진다. 이 반지는 생전 그녀가 대중의 사랑을 받은 상징이었으나 그녀의 사망 후에 모습을 감췄다. 그러다 2010년 윌리엄 왕자의 프러포즈 반지로 다시 등장하며 세대를 잇는 매개체가 된 것. 이처럼 20세기의 왕실 주얼리는 혈통을 잇는 상징을 넘어, 감정과 기억을 품은 문화적 진화의 산물로 거듭났다.
21세기: 절제된 화려함, 지속 가능한 선택
오늘날의 왕실 주얼리는 여전히 화려함과 권위의 빛을 품으면서, 시대적 가치와 책임을 함께 아우른다. 지속 가능한 소재와 재활용 보석, 간결한 디자인은 환경에 대한 책임의식을 드러내는 동시에 개성과 실용성을 강조한다. 영국 왕자비 메건 마클은 2018년에 올린 결혼식에서 1932년에 제작된 메리 여왕의 방도 티아라를 착용했다. 이 티아라는 1893년에 제작 된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재활용한 보석으로, 지속 가능성과 전통의 공존을 보여주는 선택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다른 유럽 왕실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스웨덴의 빅토리아 공주 역시 2010년에 올린 결혼식에서 가족의 유산인 카메오 티아라를 선택했다. 이 티아라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조세핀 황후에게 선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보석 착용을 최소화함으로써 화려함 대신 실용적 가치와 대중성을 내세우며 왕실의 현대적 이미지를 제시하기도 한다. 이렇듯 이 시대의 왕실 주얼리는 더 이상 고정된 권위의 상징이 아닌, 시대의 감각을 반영하고 대중과 소통하는 창구로 기능한다. 왕실 주얼리는 무엇을 말할까? 신의 뜻을 품었던 고대의 빛, 예술과 권력이 교차한 르네상스의 찬란함, 상실과 사랑을 새긴 빅토리아 시대의 추억, 그리고 지속 가능성과 개인의 이야기를 담은 오늘날의 반짝임까지. 왕실 주얼리는 늘 시대의 얼굴이자 감정의 언어였다. 그 반짝임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시간의 결, 기억의 무게, 그리고 영원의 숨결이 스민 세대와 세대를 잇는 이야기의 파편으로 남는다. 21세기 주얼리 하우스들은 과거의 영광을 현재로 끌어오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향한 책임을 준비한다. 그 찬란한 빛이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하다. 왕실에서 시작된 빛은 지금, 우리 안에서 다시 반짝인다.

Credit
- 에디터 김성재
- 아트 디자이너 강연수
- 디지털 디자이너 강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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