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싸움이 시작됐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생애 첫 집이 생겼다. 헌 집을 처음에 걸맞는 새집으로 꾸미기 위해 공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돌연 1층 할머니가 집주인 얼굴을 한 채 나타났다.::서촌, 옥인연립, 건축, 집, 리빙, 인테리어, 집가꾸기, 라이프스타일, 레노베이션, 결혼생활, 에세이, 이주연, 엘르, elle.co.kr:: | ::서촌,옥인연립,건축,집,리빙

지금 산 집과 새로 산 집의 거리는 불과 100미터. 본격적인 공사를 앞두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카메라를 장만한 것이었다. 매일 현장을 찾아 집이 되어가는 과정을 기록하고 싶었다. 주변 사람들을 괴롭혀 카메라를 추천 받고, 잘 쓸 줄도 모르면서 고사양의 카메라를 큰 맘 먹고 구입했다. 그런데 공사를 시작하자마자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같은 동 1층에 사는 할머니가 건물주 행세를 하고 나타난 것이다. 순간 아차, 싶었다. 매매 계약서에 도장 찍기 전, 우리는 먼저 입주해 있던 분들에게 거주지로서 옥인연립의 장단점을 물었다. 그때 돌아온 대답은 대부분 긍정적이었으나, 한편으로는 하나같이 입 모아 지적한 단점이 있었다. 관리인이 따로 없는 대단위 연립인 이곳에는 동마다 터줏대감이 있는데, 그들 대부분이 자신을 건물주라고 착각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여기서 더 흥미로운 점은 그들이 한결같이 ‘1층에 사는 할머니’라는 사실이다. 이 묘한 공통점이 하도 궁금하여 하루는 술자리에서 서촌 토박이에게 물어보니 층마다 오래 산 노인 분들이 계셨는데, 2~3층은 거동하기에 불편하니 끝내 이사 나가고, 1층에 살던 노인 분들만 남았다고 한다. 노인 중에서도 할머니인 이유는 여자가 남자보다 평균 수명이 길기 때문인 것 같고. 아무튼 우리 1층 할머니는 처음에는 집주인이 집을 무책임하게 오래 비우는 바람에 관리비가 연체됐다며, 그걸 잔금 치르기 전에 받지 않으면 우리가 손해 볼 수 있다며, 상냥한 얼굴을 한 채 아군처럼 접근했다. 젊은 사람이 들어오니 마음이 놓인다며 내내 호의적인 태도를 내비쳤으나, 주고받은 대화 속에는 “방은 트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집주인 같은 조언과, “2층집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아 내가 한 달 만에 내쫓았다”는 협박에 가까운 말이 섞여 있었다.철거 후 뻥 뚫린 집물론 벽을 트는 일은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으로서 걱정거리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안정성이 확보된데다, 실제로 옥인연립의 너무나 많은 집들이 벽을 트고 살고 있다. 우리는 방 하나만 남겨놓고 벽을 다 틀 계획이었으므로 철거할 때 최대한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워낙 작은 집이어서 베란다를 트고 나니 밖에서 속이 그대로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잠자코 있었다. 우리는 안도했다. 그런데 철거를 다 마치고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 되자, 할머니가 집주인 같은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우리가 벽을 철거한 여파로 건물 전체에 금이 갔다며 노발대발하는 게 아닌가.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우리보다 더 놀란 설계 소장님이 혼비백산이 되어 현장을 보러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런데 건물에 생긴 균열마다 페인트 자국이 선명했다. 애초에 금이 가 있었다는 의미였다. 우리는 그제야 가슴을 쓸어 내릴 수 있었지만, 할머니의 관리인 같은 태도는 그 이후로도 이어졌다.철거 후 집을 둘러보는 남편방을 하나만 남겨놓는 대신 거실을 작업실과 휴식 공간으로 나눠 쓸 요량으로, 그에 맞춰 창도 한 쪽은 통유리, 다른 쪽은 부분 창을 낼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베란다를 없애고 부분 창을 낼 벽에 벽돌을 쌓았는데, 그걸 발견한 할머니가 소장님을 소환하여 건물에 통일성을 망쳤다며, 흉물스럽다고 당장 통유리로 바꾸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우리는 엄연히 동등한 권리를 가진 집주인인 것을. 왜 내 집 창호를 내 마음대로 못한다는 걸까. 설계 소장님은 괜히 할머니와 관계가 틀어져 민원이라도 넣으면 공사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며 분개한 우리를 달랬다. 그리고 우리끼리 창문 크기를 좀더 키운다는 결론을 내놓고, 그것이 할머니의 고견을 수렴한 결과인 것처럼 소장님이 얘기하여 분쟁을 잠시나마 틀어막을 수 있었다. 집 공사를 맡은 서재원 소장님은 내가 3년 전 신사동 가로수길에 호기롭게 가게를 차렸을 때, 인테리어를 해준 분이다. 사실 설계하는 친한 친구에게 맡겼는데, 그 친구가 다른 일정으로 빠지면서 파트너였던 소장님이 공사를 떠맡았다. 생면부지에게 일을 맡기려고 하니 두려움이 앞섰지만, 일하는 태도가 나랑 묘하게 겹쳤으며, 알고 보니 친한 지인의 지인이기도 했다. 단호한 눈빛과 말투의 소장님은 처음 제시한 견적과 일정을 정확하게 딱딱 맞춰나갔으며, 끝내 기대했던 것 그 이상의 결과물을 안겨줬다. 어련했으면 그 다음에 들어온 전혀 다른 분위기의 가게가 아직까지 그 인테리어를 그대로 쓰고 있을까.얼굴이 ‘열일’하는 서재원 소장님이번 집을 덜컥 사고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소장님이었으나, 나는 선뜻 연락하지 못했다. 소장님이 워낙 욕심이 많아 분명 우리 예산을 훌쩍 뛰어넘는 견적을 제시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소장님과 정 반대의 성향을 지닌 듯한 분을 소개받아 그분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도저히 포기가 안 되어 소장님을 다시 찾은 것. 물론 공사비는 우리가 처음 짠 예산, 옥인연립의 다른 집들이 통상 썼다는 금액을 넘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을 우리보다 더 예쁘게 만들고 싶어하는 이상한 마인드의 소장님이 있어 우리는 별고 없다는 듯 무탈하게 지낸다. 내가 알기로 소장님도 한 성격 하는데, 그런 분이 1층 할머니 비위 맞추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한 게 만감이 교차한다. 물론, 잘생긴 얼굴이 ‘열일’한다는 사실은 안 비밀. 이전편 보러가기 >  다음편 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