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7일 오전 10시, 파리의 튈르리공원. 칼 라거펠트의 2010 F/W 컬렉션을 취재하기 위해 쇼장으로 걸음을 재촉하던 중, 화들짝 놀라 공원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저기, 한 여인이 바닥에 누워 있다. 검은색 레깅스를 신고 상반신엔 쓰레기 봉투를 둘둘 두른 채. 재빨리 머리를 굴려 본다. 순차적인 추측. 1. 갈 곳 없는 거지다 → 2. 주목받고 싶은 행위예술가다 → 3. 패션쇼장 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 권익 보호 단체다. 생각의 회로를 유영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그녀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어라, 저게 뭐지, 메시지가 적혀 있다. “Size Zero, Kills.’ 제로 사이즈에 대한 경고 문구와 함께 거리에 누워 있던 사람은 퍼포먼스 아티스트이자 작가인 헤일리 호건(Haley Hogan)이었다. 20대 초반을 패션 매거진과 깡마른 모델들에 심취해 지냈던 그녀는 그로 인해 거식증으로 오랜 시간을 시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와 같은 퍼포먼스를 (90파운드의 체중을 감량한 칼 라거펠트의 쇼장 앞에서) 벌인게 된 것이라고. 패션 매거진이 제시하는 ‘미’에 대한 관점이 깡마르고 기괴한 것에서 벗어나 좀 더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향해야 한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지나치게 마른 모델들에 대한 문제는 이미 몇 해 전부터 제기돼 왔지만 여전히 패션 월드에는 볼륨감 있는 몸매보다는 마른 몸을 가진 소녀들이 훨씬 더 많다. 그리고 대중들 역시 ‘깡말라야 예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더 많다. 문득, 얼마 전 인터뷰 내용이 생각난다. 개인적인 스타일링 비법에 대한 질문에 한 패션 모델은 나에게 우스갯소리로 답했다. “이번 시즌에 가장 필요한 아이템이요? 마른 몸? 하하하하!”
44사이즈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디자이너들이야 당연히 누구에게나 잘 어울리는 옷을 만들어 더 많은 이들이 입기를, 정확히 말해 더 많은 이들에게 팔리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그들이 만드는 옷의 대부분은 여전히 스키니한 몸매에(만) 어울리는 것들이다. ‘뉴 미니멀리즘’이란 말로 설명되는, 이번 시즌의 클린한 라인의 테일러링. 셀린이나 프라다, 질샌더의 옷들을 살펴보라. 그 옷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칼 같은 재단만큼이나 단호한 말투가 환청처럼 저 멀리로부터 들려 온다. “오, 저런저런, 나를 입으려면 그 군살부터 해결하고 오시지?” 옆구리의 살을 방치한 채 어찌 셀린의 가죽 소재 티셔츠를 입을 것이며, 무슨 용기로 보기 싫게 튀어나온 허벅지살을 프라다의 버뮤다 팬츠에 구겨넣을 수 있겠는가. 질샌더의 똑 떨어지는 코트의 직선이 몸 양 옆의 살을 따라 흉측한 곡선으로 바뀌기라도 하는 날엔, 이 다음 하늘나라에서 어찌 질샌더 여사를 마주하겠느냐는 말이다. 이뿐 아니다. 이번 시즌의 키 트렌드인 미래적인 요소가 섞인 스포티즘, 구찌나 발렌시아가와 같은 룩 역시 가늘고 긴 직선적인 몸에 어울리는 디자인이다. 스텔라 맥카트니나 아크리스 등의 쇼에 등장한 롱 앤 린 실루엣의 롱드레스 역시 꼬챙이 같은 몸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디자인의 옷들이다.
1 인형처럼 가늘고 긴 모델을 세운 미우미우의 이번 시즌 광고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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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디토라도 괜찮아 매거진 <글래머>는 오는 6월호를 위한 커버 모델로 알레산드라 앰브로시오, 브루클린 데커 그리고 크리스털 렌을 선택했다. 놀라운 점은 크리스털 렌은 패션 모델의 표준 몸매라고 할 수 있는 사이즈 0(30-22-32)보다 훨씬 큰 사이즈 12(38-30-40)의 몸매를 가진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라는 점. 자신의 자서전 <배고픔>에서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되기까지의 자신의 역경을 공개하기도 한 이 빅 걸은 "패션 업계의 사람들이 더 다양한 아름다움에 눈뜨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녀는 매거진의 지난 1-2월호에서 깡마른 모델 재클린 자블론스키(Jacquelyn Jablonski)와 저지 소재의 미니드레스, 퓨처리즘이 가미된 스포티한 의상 등 같은 옷을 입고 나란히 등장하기도 했는데, 마른 몸이나 통통한 몸이나 각각의 매력이 있음을 몸소 보여주었다.
런던에서 컬렉션을 여는 디자이너 마크 페스트는 빅 사이즈의 모델들을 기용하는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그는 통통한 몸매를 가진 몇 명의 모델들을 스키니한 몸매의 모델들과 한 무대에 세운다. 라이크라 소재의 그의 옷이 어떤 체형에나 잘 어울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런던 컬렉션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에디터는 의외의 말을 던졌다. “마크 페스트의 쇼를 보고 정말 놀랐어. 왜냐고? 통통한 모델과 날씬한 모델이 번갈아 나오는데 통통한 모델이 훨씬 더 예뻐 보이더라고. 라이크라로 만든 니트웨어를 마른 애들이 입으니까 어딘가 모르게 초라해 보였어. 통통한 모델이 입었을 때 직선적인 디테일이 몸의 굴곡을 따라 부드러운 곡선을 만드는데, 그게 훨씬 섹시하고 건강해 보였지.” 그렇다. 분명한 사실은 체형에 따라 어울리는 룩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시즌에는 커비한 몸을 가진 이들이 두 손을 들고 환영할 만한 빅 트렌드들이 여럿 존재한다. 그 중심에는 란제리 룩으로 대표되는 뉴 로맨티시즘이 있다. 코르셋과 레이스 톱, 뷔스티에 등은 가슴에 껌딱지 두 개 붙어 있는 마른 몸매의 소유자는 절대로 소화할 수 없는 아이템이다. 돌체 앤 가바나가 표현한 섹시한 이탈리안 아가씨 룩, 그리고 프리다 지아니니가 구찌 쇼에서 선보인 과감한 슬릿 장식의 저지 미니드레스, 그리고 랑방의 너울거리는 랩 드레스 역시 커다란 곡선들이 모여 만든 커비한 몸매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오해하진 마시길. 이것은 온몸에 덕지덕지 붙은 군살을 방치해도 좋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체형에 관한 이야기다. 본래 커비한 체형을 가진 이들과 직선적인 몸을 가진 이들이 가야 할 길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절친한 친구인 케이트 모스와 베스 디토가 전혀 다른 룩을 선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2 이번 시즌 루이비통 광고 모델이 된 라라스톤은 다른 모델들 보다 훨신 커비한 몸매를 가졌다. 3 런던의 디자이너 마크 패스트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세우는 것으로 유명하다.
*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4월호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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