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는 TV 롤러코스터 | 엘르코리아 (ELLE KOREA)

tvN <재밌는 TV 롤러코스터>의 '남녀탐구생활'은 달라도 너무 다른, 서로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남녀의 차이를 속시원히 까발린다. 무엇보다 보고 있으면 즐겁다. |

30분째다. 30분이 지나도록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아 연락했더니 오고 있는 중이란다. 그렇게 또 기다리길 30분. 역시 그 잘난 얼굴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알면서 속는다. 도합 한 시간째다. 한 시간이면 커피도 마시고 쇼핑도 하고 오락실에 들려 게임도 한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는다. 속이 다 타들어 구멍이 날 때쯤 그녀가 나타난다. 눈은 울고 있는데 입은 웃고 있는, 어느덧 익숙해진 미안한 표정으로 “많이 기다렸지?”라고 묻는다. 속으론 ‘알면서 그러는 거냐?’며 피를 토하지만 애써 웃으며 괜찮다고 말한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랬다. 먼저 와서 기다리는 경우는 서울 하늘의 별처럼 적었다. 대체 여자는 뭘 하길래 그리도 열심히 지각 도장을 찍는 건지 그 속내가 궁금했다. 만남의 장소를 하릴없이 배회하고 있는 멀끔한 차림의 남자들 열에 아홉은 비슷한 심정일 거다. 이것말고도 여자들의 이해 못할 행동들은 알림장 한 권을 빽빽이 채울 만큼 많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답을 구할 수 없다. 이성 친구에게 현답을 기대해도 “그게 왜?” “어째서?”란 되물음만 날아온다. 그러고 보니 그녀들도 나에게 묻는다. “남자들은 왜 그러는데?” 여자도 남자에 대해 이해 불가능한 부분들이 많다는데 똑 부러지게 이유를 설명하기도 쉽지 않다. 원래 그래왔고,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으니까. tvN 의 히트 꼭지인 ‘남녀탐구생활’은 누구나 그러려니 하고 지나갈 수 있는 남녀 차이에 청진기를 댔다. 내심 궁금하지만 물어보지 못했던 남녀의 속내를 심층적으로 탐구해 보겠다며 나선 거다. 화장실, 목욕탕, 헬스장 등의 공간 혹은 감기에 걸렸거나 쇼핑을 하고 인터넷을 할 때의 상황에서 전혀 다르게 반응하는 남녀 행동과 사고의 차이를 세밀하게 담아냈다. 반응은 공감 반, 충격 반. 남자는 정형돈이 능청스럽게 연기하는 갑남에 “맞아, 맞아”라 무릎을 치며 빠져들고, 여자는 “설마, 진짜 저런다고?”라며 경악해 한다. 반대로 여자들은 정가은의 새침한 을녀 캐릭터에 공감지수를 높이고, 남자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여기에 정형돈, 정가은의 열연과 문어체 식의 기발하고 재치 있는 대사, 시니컬한 성우의 내레이션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쉴 새 없이 웃음 폭탄을 빵빵 터트리니 케이블 동시간대 시청률 1위란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다.보통 남자 vs. 보통 여자‘남녀탐구생활’은 대본의 힘이 크다. 배우들의 대사 없이 성우의 내레이션으로 모든 내용을 전달하기 때문. “대본이 나오면 서로 ‘이게 뭐지?’ ‘이거 진짜야?’ 그래요. 동성의 눈에는 너무 당연한 것도 이성의 눈에는 희한하고 신기하게 보이는 내용들이 많거든요.” 남자 에피소드를 맡는 김기호 작가의 얘기다. 프로그램이 남자와 여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대본도 남자, 여자 작가가 따로 작업한다.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다. 이것이 정형돈, 정가은이 연기하는 남녀의 모습이 디테일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갑남을녀의 롤 모델이 따로 있는 걸까? 정형돈 캐릭터는 털털하고 무던한 성격의 34세, 보통 남자로부터 태어났다. 김기호 작가는 대본을 쓸 때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돌이켜본다. 물론 그가 대한민국 평균 남자라고 단언할 순 없다. 하지만 남자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부분들이 꼭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정가은 캐릭터 역시 여자 에피소드를 책임지고 있는 김지수 작가의 일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본적인 부분은 제 이야기로 해요. 하지만 정가은 씨가 연기하는 캐릭터처럼 제가 유난을 떠는 것도 아니고, 개인적인 이야기만으로 대본을 채울 수 없어 20대 여자라면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있겠지라는 고민을 많이 해요.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놓칠 수 있는 부분은 친구들에게 검증받고요.” 작가의 말처럼 대본이 나오면 검증은 필수다. 공감대를 이끌어내야 하기 때문에 ‘이 정도면 모두 맞장구치겠지’라는 지레짐작은 금물. 혼자만의 이야기는 의미가 없다. 대한민국 평균 남녀의 잣대를 세우는 건 정교해야 하고 쉽지 않은 작업이다. “여자 부분의 대본을 쓸 때 허영심에 대한 표현을 자주 써요. 남자들은 잘 모르고, 여자들은 쉽게 공감해 양쪽 모두가 재미있어 하거든요. 그렇다고 있지도 않은 캐릭터를 만드는 건 아니에요. 모든 여자들이 그렇다곤 할 순 없잖아요. 표현 방식에 재미를 주더라도 인물의 행동을 과장하지 않으려 해요.” 지금까지 두 작가가 빚어낸 화성인 남자와 금성인 여자는 좌표가 불확실했던 평균점에 제대로 안착한 것이 분명하다. 프로그램이 지금과 같은 인기를 얻고 이슈가 된다는 건 많은 사람들이 남녀 캐릭터에 공감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니까. 자신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주변에 그런 친구가 하나쯤 있기 마련이고,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 있다면 공감대의 폭은 더욱 커진다. 정가은도 대본을 받고 ‘어머나!’ 했던 부분이 꽤 된단다. “감기몸살 에피소드에 많이 공감했어요. 조금이라도 아프면 이러다 더 큰 병이 생길까 난리를 피우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렇더라고요. 냄비 두 개로 나눠 라면을 끓이는 것도 저만 그런 줄 알았어요.” 서혜정 성우는 정형돈이 연기하는 남자의 생활 모습에도 공감대를 느낀다. “전 아들을 키우고 있는데 정형돈 씨 캐릭터와 아들의 생활이 굉장히 비슷해요. 방송을 보면서 ‘아, 우리 아들만 그러는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남녀탐구 원정대평균과 오버의 경계에 대한 고민은 촬영현장을 지휘하는 이성수 PD의 숙제이기도 하다.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담으면 재미가 없어요. 그렇다고 조금이라도 과장하면 리얼리티에서 멀어지고 콩트가 돼버려요.” 프로그램엔 배우들의 대사가 거의 없다. 정형돈, 정가은이 내뱉는 대사는 혼잣말 정도. 촬영현장은 굉장히 조용하다. 동시녹음까지 해야 하니 모두가 숨을 죽인다. “다른 프로그램과 시트콤에서 일했던 스태프들이 그러더라고요. 코미디 프로그램인데 왜 하나도 안 웃기냐고요. 코미디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웃지도 않고 일만 하다 가는 거죠.” 이성수 PD와 함께 촬영현장을 조율하는 김경훈 PD가 거든다. “공개 방송에선 방청객들의 반응이 바로바로 오잖아요. 저희 촬영장에는 그런 게 없으니까 정형돈 씨도 처음엔 ‘제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하는 게 맞아요?’라고 계속 물었어요.” 남자 에피소드 촬영현장은 그나마 분위기가 나은 편이다. 현장 인원의 절반 이상이 남자인 탓에 공감대가 형성되는 장면에선 자연스레 웃음이 터진다. 반면 여자 에피소드의 촬영현장은 그야말로 썰렁하다. 남자들이 모르는 여자의 실상을 내용으로 하다 보니 남자 PD들과 스태프들은 찍으면서도 이게 과연 재미있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편집을 하고 내레이션을 입혀야 비로소 그림이 나온다. 이성수 PD의 표현을 빌리자면 촬영은 ‘글자 끼워 맞추기’ 식으로 진행된다. 내레이션을 먼저 녹음하고 촬영을 하는 거다. 장면 하나하나를 찍고 퍼즐처럼 내레이션에 일일이 끼워 맞춰야 한다. 김경훈 PD는 이런 수고가 득이 될 때도 있다고 한다. “후 녹음을 하면 찍기 어렵거나 곤란한 장면은 빼도 돼요. 저희 프로그램은 내레이션부터 완성해 최대한 그 내용에 맞게 촬영하려 해요. 촬영 내용이 확실하니 배우들도 불평 없이 연기해요.” 방송 후 핫 이슈로 떠올랐던 정가은의 ‘공중화장실 기마 자세’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남녀탐구생활’의 인기 뒤엔 또 한 명의 숨은 조력자가 있다. 무미건조하게 내레이션을 읽는 서혜정 성우다. 그녀는 이미 의 스컬리 요원으로 잘 알려져 있는 실력파. 그런데 이 중견 성우에게도 프로그램의 내레이션 작업은 만만치 않았다. “억지로 말의 억양을 한 톤으로만 유지하는 게 어려워요. 처음 10분 정도 내레이션을 하니까 톤이 확 달라지더라고요. 그렇게 몇 차례 NG가 나면 톤을 잃어버리고 말의 속도는 점점 빨라져요. 4회까지는 갈피를 잡지 못해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어요. 잘 들어보면 1회부터 4회까지의 톤이 다를 거예요.” 선 녹음 시스템이라 화면 없이 내레이션을 해야 하는 것도, 감정을 빼는 것도 고충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해보려는 제작진은 감정을 배제한 내레이션을 주문했다. 감정을 실은 내레이션은 이미 나올 대로 나왔고 시청자들의 귀에도 새로울 게 없으니까. 시행착오를 거쳐 겨우 감정을 빼고 나면 스컬리 목소리처럼, 기계음처럼, 시니컬한 느낌으로 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흔히 더빙할 때는 대본 내용과 감정에 충실해야 해요. 그런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 저도 모르게 주관적인 감정이 들어가요.” 그래도 베테랑은 다르긴 달랐다. 금세 가닥을 잡더니 자유자재로 애드리브까지 터뜨린다. ‘개념을 밥 말아 먹었어요’ ‘남자가 별로네요’ ‘정말 스바예요’ ‘오래 살아서 그런지 말도 더럽게 잘해요’ 등 자칫 험하게 들릴 수 있는 멘트들이 그녀의 목소리를 빌려 고단백의 주옥같은 명문으로 살아났다. 김지수 작가는 마음껏 대본을 쓸 수 있는 것이 서혜정 성우의 공이라 돌린다. “어떤 표현을 써도 성우가 잘 살려주니 이 표현 저 표현 떠오르는 대로 쓰고 있어요. 가끔 내레이션 때문에 저희도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빵빵 터져요. (중략)*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11월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