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가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이해받지 못할 때 우리는 울컥한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떤 사람인지를 타인에게 납득시키려는 건 본능이고 욕망이다. 이해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무척 벅찬 일이다. 그만큼 이해받고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 솔직한,외로운,현실적인,일상,엘르,엣진,elle.co.kr :: | :: 솔직한,외로운,현실적인,일상,엘르

사랑에 빠진 남녀가 맨 먼저 하는 일은 무엇일까. 키스일 수도 있겠다. 섹스일 수도 있다. 대개 연인이 맨 먼저 하는 일은 설명이다. 폭풍 같은 섹스가 끝난 뒤에도 침대에 누워 담배를 나눠 피우며 두 남녀는 설명을 한다. 설명하는 내용은 자기 자신이다. 당신이 방금 전에 몸을 섞은 나는 누군가. 함께 침대에 들어가기 전에 나눈 대화가 현학적이었거나 현실적이었다 해도 상관 없다. 일단 발가벗은 제 몸의 치부를 사랑으로 희롱당한 뒤엔 마음속에 감춰뒀던 은밀한 비밀까지 제 손으로 꺼내고 싶어지는 법이다. 연인의 첫 번째 화제가 “나는 누구인가?”인 건 이유가 있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건 목적과 분별 없는 감정적인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분명한 목적과 이해타산이 있다. 담배를 피워 문 남자는 여자를 품에 안은 채 자기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보통 남자가 맨 처음 꺼내는 소재는 실패한 첫사랑이다. 궁핍했거나 빈약해서 떠나보낸 첫사랑한테 받은 아픔을 주절거리며 여자의 이해를 구한다. 조금 나이 든 남자라면 살면서 겪었던 가장 큰 패배를 얘기할 수도 있다. 아무도 모르게 묻어뒀던 죄를 고백할 수도 있다. 끝내 남자는 묻는다. 상처 투성이인 나를 넌 이해해줄 수 있겠니? 여자도 다르지 않다. 보통 여자가 맨 처음 꺼내는 소재는 부모와의 갈등이나 성적인 수치다. 부모의 불화 탓에 외로운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거나 이혼한 부모 때문에 남자를 믿지 않게 됐다면서 남자의 이해를 구한다. 조금 나이가 있는 여자라면 커리어에서 겪는 갈등이나 결혼하기로 했던 예전 남자친구의 배신을 고백할 수도 있다. 끝내 여자는 묻는다. 너라면 나를 마지막까지 지켜주고 이해해줄 수 있겠니?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건 감정과 이성이 공통 이익을 추구한 결과다. 감정이 사랑을 통해 육체적 쾌락과 감성적 환희를 탐한다면 이성이 욕망하는 건 단 한 가지다. 이해다. 이성은 안다. 사랑에 빠진 연인은 나를 이해해줄 무조건적인 준비가 돼 있다는 걸 말이다. 이해는 사랑의 부산물이 아니라 목적이다. 이해받고 싶단 욕망은 보기보다 강하다. 우리가 정치가와 대중 스타를 부러워하는 건 그들은 기꺼이 자신을 이해해주고 해석해줄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에겐 한 사람만 있어도 벅차다. 사랑은 이해받기 위한 수단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타인한테 납득시키는 건 유전자를 번식시키는 것만큼이나 본능적이다. 우린 이해받고 싶어한다. 이해받는 것만이 우리를 비극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할 수 있어서다. 그리스 시대의 비극은 운명 탓이었다. 우린 운명 앞에서 늘 억울했다. 억울해서 울었다. 현대의 비극은 신들의 장난 탓이 아니다. 신은 니체한테 암살당했다. 인간이 이성과 과학으로 운명을 지배하게 됐다. 우리 시대의 비극은 따로 있다. 텔레비전만 틀면 비극이 넘친다. 의 김현준과 의 비담이 21세기적 비극의 주인공들이다. 우리가 그들한테서 비장미를 느끼는 건 거역할 수 없는 운명 때문은 아니다. 그들이 이해받지 못해서다. 비담은 덕만 앞에서 칼춤을 추다가 참살당한다. 비담은 왕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 한 여자를 갖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비담의 사랑은 이해받지 못한다. 이해받지 못한 비담은 억울하고 우린 억울한 비담 때문에 절통해서 운다. 우리가 느끼는 비극의 크기는 그저 이해를 구걸하는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연인한테서 이해받지 못하면 ‘울컥’하고 세상에게서 이해받지 못하면 비장해진다. 우린 이해받지 못해서 늘 억울하다. 억울해서 운다.우리는 타자의 이해를 갈망하는 건 두려워서다. 우린 살면서 끊임없이 선택을 한다. 선택의 결과를 모른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이 필연적이었다고 믿고 싶어 한다. 어쩔 수 없었다 이거다. 하지만 신의 섭리가 사라진 세상에서 필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린 자기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도덕적으로 지탄받거나 사회적으로 외면당할 만한 비밀스런 선택을 했을 땐 이해받고 싶다는 갈망은 절박해진다. 이해받지 못하면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낀다. 이때 인간은 난생처음 다른 인간을 필요로 하게 된다. 누군가 나서서 “넌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거나 그 짓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해주길 간청한다. 결국 우리가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설명하는 건 상대방을 납득시키려는 행위가 아니다. 타자는 우릴 비춰주는 흐릿한 거울일 뿐이다. 사람은 핑계를 대는 유일한 동물이다. 우린 논리적 설명을 통해 우리 인생을 거대한 핑계의 논리 체계로 쌓아올린다. 인생이 선택의 연속이라면 인간은 모든 선택에 주석을 달면서 살아간다. 자기 인생이 틀렸다고 믿으며 살 수 있는 인간은 그리 많지 않다. 자존감은 생필품이다. 우린 인생의 주석을 들어줄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린다. 그래서 이해는 늘 사랑보다 강하다. 사랑했던 연인이 헤어지는 건 여지없이 서로를 이해할 수 없거나 각자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껴서다. 우린 사랑이란 감정을 명분으로 서로에게 이해를 강요한다. 사랑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린 사랑하면 이해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신의 운명을 거부한 인간에게 남은 유일한 구원은 사랑이 아니라 타자의 이해다.하지만 인간은 결코 다른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 현대의 비극이다. 인터뷰라는 만남의 방식이 있다. 기자와 배우나 정치인 같은 취재원 사이에 벌어지는 대화방식을 뜻한다. 본질은 두 사람이 짧으면 한 시간, 길면 두 시간 정도 농축된 대화를 나눈다는 의미다. 인터뷰의 대화는 서로의 속을 들여다보듯이 진행된다. 평소 같으면 묻고 답하지 않았을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오갈 때도 많다. 그러나 깊은 대화를 나눈 듯 보이는 두 사람은 돌아서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십상이다. 진지한 질문을 던지던 기자는 동료들 앞에서 대화 상대의 외모를 품평한다. 영화로 볼 때보단 키가 작다느니 눈이 크다는 얘기를 한다. 반대로 취재에 응했던 배우는 기자의 질문을 곱씹는다. 갑자기 어려운 질문을 해서 힘들었다거나 너무 거창한 대답을 한 게 아닐까 싶어서 멋쩍어한다.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기자는 지면에 실린 내용들이 배우나 정치인의 진면목이길 고대하지만 배우들은 지면에 옮겨진 말들을 보면서 과연 자신이 했던 말이 맞는지 의아해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과 상대방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일치하는 경우는 없다. 녹음된 제 목소리가 평소에 느끼던 자기 목소리와 다르다는 걸 알고 깜짝 놀라는 것과 같다. 우린 이해 받기를 원하지만 어느 순간엔 이해받기를 거부한다. 이해를 뜻하는 ‘Understand’의 어원은 글자의 생김새와는 좀 다르다. ‘Under, Stand’라면 밑에 서 있다는 뜻이어서 상대방의 논리에 순종한다는 얘기 같지만 사실 ‘Under’는 라틴어로 ‘Between’을 뜻한다. 중심에 서 있단 뜻이다. 이해한다는 건 중립에 서서 객관적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행위다. 그러니까 이해한다는 건 동의한다는 뜻에 더 가깝다. 하지만 우리가 욕망하는 이해는 동의가 아니다. 우리가 침대에서 방금 사랑을 나눈 누군가DPRP 나를 설명하는 건 행동에 대한 동조를 원해서가 아니라 감정에 대한 승복이 필요해서다. 그가 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건 불가능하다. 상대가 제 눈으로 나를 바라본 모습은 나로선 동의하기 어렵다. 그때 우린 그렇게 갈망하던 타자의 이해를 거부해버린다. 우리가 이해받지 못하는 건 타자가 우릴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해서다. 우린 소통하면서 끊임없이 이해와 동의의 간극 사이에서 절망한다. 을 읽은 마그리트는 푸코와 편지를 주고받다가 유명한 를 그렸다. 1948년에 그린 에서 마그리트는 멀쩡하게 파이프를 그려놓곤 이건 파이프가 아니라고 써놓았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마그리트나 푸코가 접한 진짜와 가짜의 문제와 같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우리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다. 흔히 글과 글쓴이의 부조화에서 목격하는 현상이다. 글은 그 사람의 일부분이지만 독자는 작가의 전부를 본 것으로 착각한다. 글쓴이가 자신이 쓴 글 뒤에 숨어서 이미지를 조작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우린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밖에 우릴 보여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린 이해를 구하면서 동시에 이해를 끊임없이 배반한다. 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떠나고 싶어 하는 케이트 윈슬렛의 욕망은 안정된 사회체제에 구속된 디카프리오로선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는 어떤 면에선 비극적 희극이다. 적어도 둘은 이해를 강요하진 않는다. 감독과 관객 모두 부부조차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걸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진짜 비극은 우리가 서로를 이해해야 한다며 이해를 강요하거나 구걸한다는 현실이다. 텔레비전엔 서로 이해를 강요하는 토론 프로그램이 넘쳐난다. 이해받지 못한 비극적인 주인공을 다룬 드라마가 달마다 새롭다. 정치에선 소통을 이야기하고 경제에선 상생을 노래한다. 우린 아직도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거짓 이해를 토대로 화합을 말할 때도 있다. 급기야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두려워하고 증오한다. 성격적 소수자들의 비극은 이해를 강요할 때 잉태된다.우린 자신에게도 이해의 족쇄를 채워놓곤 이해할 수 있는 행동만 하려고 애쓴다. 애덤 스미스는 인간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하지만 케인즈는 모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만 하는 건 아니라고 주장했다. 경제학자 조지 애커로프와 로버트 쉴러는 에서 케인즈를 원용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행동을 이해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시장 참여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려고 들거나 무시하려 들 때 경제는 파국을 맞았다고 지적한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을 억지로 이해시키려고 애쓴다. 연인과 부부와 부녀 지간에도 마찬가지다. 이해를 강요하거나 이해를 가장할 때 우리는 견디기 힘든 답답함을 느낀다. 한국 사회의 경직성은 여전히 이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데서 시작된다. 성별과 계층과 빈부와 문화가 다른 우리가 서로를 이해한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이해해야 한다는 당위가 이해해야 한다는 의무로 변질된다. 그래서 현대의 영웅은 이해에 맞서는 자들이다. 고대의 영웅은 운명에 맞섰다.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 자는 멋이 있다. 우리가 흔히 쿨하다고 설명하는 멋은 이해라는 타인의 구원에 연연하지 않을 때 자라난다. 우리가 사랑에 얽매이는 것도 이해받고 싶은 비굴함 탓이다. 의 잭 바우어와 의 그레고리 하우스가 현대적인 영웅인 건 그들은 이해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서 하루키는 이렇게 썼다. “설명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건 설명해도 모르는 거야.” 우린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해야 하는 현실이다. 이해하나.*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3월호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