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이브에 거짓말하다 큰 코 다친다

몇 해 전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여자친구와 헤어진 북스피어 대표 김홍민이 사무실겸 집에서 경험한 크리스마스이브의 시린 추억.

프로필 by ELLE 2015.12.23



몇 해 전 나에게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누군가의 소개로 만나 목가적인 결실을 거둔 적이 좀처럼 없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금방 가까워져서 서로의 집도 오가게 되었다. 여기서 잠깐 ‘내가 사는 집’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현재 나는 자그마한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광흥창에서 시작해 논현동으로 이사했다가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워 마포로 돌아가자고 생각한 게 4년 전의 일이다. 이번에는 파티션으로 구획된 딱딱한 사무실 말고 오피스텔을 얻고 싶었다. 문득 내가 분양받았던 아파트를 떠올렸다. 직원들에게 “아파트를 사무실로 쓰면 어떨까?” 물어보니 다들 괜찮다고 했다. 이후로 낮에는 출판사 사무실, 밤에는 내 주거공간으로 아파트를 사용하고 있다. 


원래 얘기로 돌아가자. 그녀는 종종 퇴근시간에 맞춰 ‘내가 사는 집’에 왔다. 그러다 보니 퇴근이 늦어진 직원과 마주치는 일도 있었다. 어색해진 건 그녀와 헤어지고 난 이후다. 크리스마스이브, 점심시간이었다. 직원 한 명이 물었다. “사장님, 오늘 어디 좋은 데 가시겠네요?(웃음)” 로맨스를 기대한 이들에게 ‘실은 헤어졌다’고 말하기도 애매해서 적당히 둘러댔다. 예약해 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은 다음 어쩌고저쩌고. 이 말이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그날 저녁, 직원들이 퇴근하고 주거지로 변한 아파트는 예상대로 썰렁했다. 나는 대충 라면을 끓여 먹고 누워서 TV를 보았다. 그러다가 얼핏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문자 알람 소리에 깼다. “사장님, 좋은 시간 보내고 계신가요? 실은 제가 사무실에 남편 크리스마스 선물을 두고 와서요. 지금 사장님 안 계실 테니까 잠깐 가지러 가려고요. 괜찮죠? 좋은 밤 보내세요.” 이런 망할. 크리스마스이브에 저녁을 라면으로 때우고 TV 앞에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허둥지둥 옷만 걸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따뜻한 카페에라도 가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면 좋으련만. 그러지도 못했다. 금방 왔다 갈 줄 알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아파트 밑에서 이제나저제나 사무실 불이 켜지길 기다렸다. 하지만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추웠다. 찬물을 정수리부터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2시간 정도 흘렀을까. 마침내, 불이 켜졌다가, 꺼졌다. 직원이 손에, 아마도 선물이 담겨 있을 봉투를 들고 아파트 경비실을 통과하는 모습을 나는 멀찌감치 숨어서 지켜보았다. 속으로 욕을 하면서. 


그 일이 있은 후로 나는 ‘선물’이라는 말을 들으면 반사적으로 그날의 일을 떠올린다. 헤어진 여자친구와 저녁 무렵 홀로 끓여 먹던 라면과, 잠결에 사무실을 뛰쳐나가 덜덜 떨며 9층 아파트 차창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던 크리스마스이브를. 이제 며칠 후면, 매년 그렇듯 크리스마스이브가 돌아오겠지. 올해 펴내야 할 책은 12월 초면 전부 마무리가될 테니 그날은 다 같이 영화나 한 편 보고 일찍 퇴근하자고 말할 생각이다. 그러니 직원 여러분, 가실 때 빠뜨린 선물이 없는지 꼭 확인하고 퇴근해 주세요, 부디.


WHO'S HE?
김홍민은 두터운 팬덤을 거느린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 ‘북스피어’의 대표다. 그는 선물할 일이 있으면 ‘스스로 돈을 주고 사기는 아깝지만 누군가로부터 받으면 기쁜 것’을 준비해 다음 메시지와 함께 전달한다. ‘이 선물을 받았으니 내일 틀림없이 두 가지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Credit

  • WRITER 김홍민
  • EDITOR 김영재
  • PHOTOGRAPHER 이수현
  • DIGITAL DESIGNER 전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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