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 사정 볼 것 없다 지난해 취업대란을 기억하는지. 남녀 중 취업이 더 잘된 쪽은? 통계청 집계에 따르면 20대를 놓고 봤을 때 여성이 남성을 앞질렀다(물론 취업의 질과 지속성, 고용 조건의 차별 여부 등이 문제다. 하지만 남자보다 여자 신입사원이 더 늘어난 것 자체가 유사 이래 처음이니 의미 없는 통계는 아니다). 그해 12월 잡코리아의 리서치에서 여자들은 “승진 관련해 여성에게 불리한 제도?관행이 있다.”(71%)고 답했다. 구체적인 예로는 “여성은 승진까지 걸리는 시간이 길다.”(40%)가 제일 많았고 “능력?실적이 비슷해도 남성 인사 고과가 높다.”(29%)가 그 뒤를 이었다. 보다시피 여자들이 밀물처럼 사회 곳곳에 들어오지만 여전히 인식과 규범의 기본 틀은 변하지 않았다. 직장에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빡빡한 경쟁, 아니 전쟁이 이뤄지는 게 당연하다. 우리 회사는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다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거칠어진 여자들, 여성 득세 소용돌이에 휘말렸거나 강 건너 불 구경 중인 남자들의 이야기를 참고하길.
여초 집단의 마이너리티 “우리 회사는 여자가 90%다. 남자들에게 가드 역할도 기대하는 것 같다. 전구를 갈거나 책장을 옮기는 건 기본, 차 사고 났다는 전화에 긴급 출동한 적도 있다. 물론, 주중이다. 업무 외 시간에 불려간 적(?)은 없다. 사소한 불만을 더 꼽자면, 점심 메뉴를 너무 여자들 입맛에 맞는 것 위주로 고른다는 것. 생태찌게가 먹고 싶은데 얘기하지 못한 적도 많다. 그리고 업무에 적정 선이라는 게 있는데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경우가 많다. ‘여자라서 무시받을 수 있다’는 심리적 압박에 일부러 세게 나가는 것 같다. 의도적으로 메이크업을 세게 하고 다니는 여자들도 있다. 일 자체는 인정한다. 남자들보다 잘한다. 하지만 여자 식으로 일하는 걸 배우다 보니 남자 조직과 일할 때는 좀 부딪친다.” (조성하, 29세, PR)
유명무실 홍일점 “영업 파트 60명 중 여자는 단 2명이다. 그나마 부서가 나뉘어 우리 팀엔 나 혼자. 회사는 완전히 남자 위주의 군대 문화다. 출근할 때 여성성을 버리고 들어간다. 3년차인 지금은 선배들과 “오빠?동생”이 아니고 호형호제한다. 이제는 너무 여자로 봐주지 않아서 좀 섭섭할 정도. 회식 자리도 많은데 빠지지 않으려고 한다. 2차, 3차, 끝까지 남는다. 인원이 적은 술자리일수록 고급 정보가 많이 오가기 때문이다. 내가 완전 남자가 된 건 아니다. 밖에서 클라이언트를 만날 때는 섬세함과 여성스러움으로 어필한다. 전국 영업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가끔 “여자가 영업하는 거 힘들지 않느냐?” 이런 질문하면 짜증난다. ‘우리 사회가 아직 안 됐구나.’ 싶다. 차라리 “영업 업무가 어렵지 않냐?”고 물어봐주면 낫겠다. 반면에 우리 회사의 사무직 여자들은 진짜 여자다. 남자들이 말하는, 고분고분하고 참한 여자들. 그녀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기도 한다.” (고원재, 27세, 제약 영업)
무적의 여성 부대 “우리 회사는 전부 여자다. ‘어차피 너도 여자, 나도 여자. 능력, 심리, 건강 어느 하나 약점을 보이면 끝.’ 다들 이런 생각으로 일했다. 다같이 야근해도 먼저 일어설 수 없다. 업무량도 많지만 처지도 비슷해서다. 아프면, “너만 아프냐? 나도 몸 힘들다.” 가족 행사엔 “나도 내 새끼 집에서 혼자 잠들었다.” 이러니 열외는 통하지 않는다. 남자 동료? 있긴 있다. 다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금세 그만둘 뿐. 남자가 오면 너나 할 것 없이 심부름을 막 던진다. 여자끼리 시키기 눈치 보이는 것도 남자에겐 왠지 더 쉽게 시킬 수 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큰다 싶으면 그새 또 시샘이 쏟아진다. “이 업계에 남자가 없으니 가진 것에 비해 과대평가받고 주목받는다.”는 비판을 쏟아내면서. 내가 보기엔 이랬다 저랬다 하는 여자들 등쌀에 남자들이 버티지 못하는 것 같다.” (최지현, 34세, 의류회사)
남녀 반반, 실권은 남자에게 “조직 자체엔 남녀 불평등이 있다. 예를 들면 여자 임원이 한명도 없다. 의사결정권은 결국 남자에게 있는 건데 반대를 위한 반대가 많고, 관료제도 끝내준다. 그리고 출산 휴가, 육아 휴직을 쓴다지만 TO를 남겨두지 않는다. 자리가 나지 않아 돌아지 못하거나 다른 부서로 가야 할 수 있다. 남자들끼리 “또 쉰대.” “또 육아 휴직한대.” 수근거린다. 그냥 능력만 놓고 보면 우리 회사 여자들은 전부 ‘알파 걸’ ‘슈퍼 우먼’들이다. 일을 깔끔하고 명확하게 한다. 하지만 얄미울 때와 신기할 때가 있다. 얄미울 때는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여전히 남자를 돌쇠로 부린다는 것. 짐 옮기는 건 그렇다 쳐도 컴퓨터에 휴대전화 고장까지 나한테 징징거리면 어쩌라고. 신기할 때는 다음날 와보면 새벽 1시, 2시 넘은 시각에 이메일을 보냈다는 것. 그때까지 야근했다는 소리인데 그럼 집에는 언제 간 걸까? 그 가정은 안전할까? 내 여자라면 싫을 것 같다. (이동민, 29세, 대기업)
이것 참, ‘빡세게’ 일하라는 건지 적당히 하라는 건지 알쏭달쏭하다. ‘내 남자도 아닌데 여러 남자들이 날 어떻게 보든 말든’이라면 상관 없다. 하지만 원만한 관계에 집착하는 타입이거나, 회사에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거나, 혹은 남자 동료에게 소개팅이라도 얻어내고 싶다면 갑자기 이미지 관리의 불안감을 느낄 것.
나도 여자랍니다? “남자친구가 이별 통보를 하면서 그러더라. 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하더니 기가 세지고 목소리가 커지면서 자기 통제를 벗어났다고. 또 일을 하다보면 못 만날 수도 있잖아. 그런데 내가 자기보다 일을 우선으로 생각한다면서 결혼해서도 그럴 게 뻔하다고 화를 내더라고.” 입사 후 줄곧 일에 쫓기다 3년 사귄 동갑내기 남자친구에게 차인 S의 울분 섞인 한탄이다. 그녀의 사연처럼 사회생활을 하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해서 얻은 것은 약간의 연봉과 승진, 잃은 건 애인이라는 여자들의 피 끓는 외침이 메아리치고 있다. 남자들이 겁쟁이가 되고 비겁해지고 약해 빠졌다는 그녀들의 불만이 용틀임을 한다.
하지만 남자들은 어리둥절하다. 남자친구 앞에서는 ‘여자’로 보이고 싶은 건 이해하지만 커리어를 지키느라 종종 진통을 겪는 일상 불균형이 연애까지 고스란이 이어진다는 게 문제. “여보쇼, 그렇게 짐승남 타령을 하는데 아마조네스와 짐승남이 만나면 전쟁!”이라는 남자들의 얘기를 들어보자.
나름대로 그들도 입장을 표명한다. 회사에서 기 세고 까칠하고 도도하고 쌀쌀맞은 히스테릭 환자한테 놀란 가슴, 진정되지 않아서 그렇다고. 직장 내에서 능력이 뛰어난 여자들과 경쟁하고 여자 상사에게 시달리느라 어깨가 잔뜩 움츠려들고 작아졌는데 밖에서까지 남자가 뭐 대단한 직책이냐며 핀잔 놓는 최 대리, 하루도 빠짐 없이 윽박지르는 박 부장과 오버랩되는 여자를 만날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보다 연약한 여자를 만나야 무참히 짓밟힌 자존심이 회복되고 남자다워질 수 있을 것 같아.” 이제 막 서른 줄에 접어들었으면서도 때 묻지 않은 여대생만 골라 사귀는 J의 말처럼 연애 권력마저 잘난 여자에게 내주기 싫은 것이 남자의 심사다. 그러니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남자들은 지고지순한 천상 여자를 선호한다. 꼬치꼬치 잔소리하지 않고 따지지도 묻지도 않고 화 내지 않는,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한 여자를 눈에 쌍심지를 켜고 찾는다. 소주도 점점 순한 것을 찾는 세상, 그들에게 맵고 독하고 질긴 여자는 술안주로 딱일 뿐.
남자도 할말은 있다 VS 그럼 어쩌란 말이냐 남자들의 행태를 두고 여자들은 전통적인 성 역할이 전복되는 시대에 쓰개치마라도 뒤집어쓴 조선시대 양갓집를 규수를 찾는다며 분개할 수 있다. 그러나 남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여자들은 남자 능력, 경제력 다 따져보고 따라가잖아. 자기보다 돈 잘 벌고 직업 좋은 남자들 골라서 말야. 거기에 배경까지 좋으면 탱큐지. 결국 여자 스스로 강한 남자한테 의지하고 리드당하길 자처하는 거 아냐?” 연봉 높기로 소문난 증권사에서 일하며 주변 여직원들의 결혼 풍속을 분석한 P의 지론이다. “영혼의 짝을 만나고 싶다.”는 여자들의 말 속엔 ‘나 고생 시키지 않는’ 이 말이 생략돼 있다는 걸 남자들도 안다.
이는 곧 남자가 주도하고 여자가 따르는 전통적인 연애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이번 달 결혼정보회사 ‘비에나래’가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미혼 여성의 절반 가까이 “결혼을 통해 경제적 안정을 꾀하고 싶다.”고 답했다. 비록 과거처럼 여자들이 나약하고 경제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여전히 남자에게 기대고 의지하려 한다는 분석이다. 남자들이 고리타분하게 케케묵은 여성상에 목을 매고 있다고 핀잔을 늘어놓는 그녀들 또한 손가락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해줄 마음은 머슴같고 직책은 정승같은 남자를 찾고 있는 셈이다. 그야말로 남자 입장에서는 ‘돈 많은 남자들만 사랑받는 이 더러운 세상’이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서글픈 노릇이다.
꼭 돈 얘기만 하는 건 아니다. 어쨌든 ‘강한 놈’을 고르겠다는 마음, 남자들은 간파했다. “여자 차장이 남자 과장 만날 수 없다.”는 속마음 말이다. 그러니 요즘 남자들, 연애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어차피 그들 눈에는 꼬리 치고 간 보고 자기 기준에 들어맞지 않으면 내뺄 여자들이니 적극적으로 달려들지 못한다. 사랑의 경계에서 꼬물꼬물, 얍쌉하고 비겁하게 구는 초식남을 보고 ‘수컷성이 거세된 약한 남자’라고 비꼬는데 따지고 보면 여자들이 만들어낸 돌연변이인 셈이다. 지난해 7월, ‘야후 코리아’가 네티즌 2천여 명에게 초식남 현상의 이유를 물었을 때 ‘어려운 경제력’ ‘자신감 위축’이 1순위로 꼽힌 이유가 따로 있지 않다. 여자들이 “회사에서 에너지를 다 소진했는데 연애할 때까지 내가 앞장서고 계획해야겠나?” 호소해도 남자들은 꿈쩍도 안 한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남자들도 직?간접적으로 드센 여자들을 이미 겪어 내성이 생겼다.
물론 자신만만하고 똑부러지고 자신보다 잘난 여자를 포옹하고 싶은 남자들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기업컨설턴트 지윤정의 말을 들어보길. “우리 딸이 힐러리 같으면 자랑스럽지만 내 아내가 힐러리 같으면 골치 아프다.” 남자를 손등 위의 공깃돌 튕기듯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여장부는 애인으로는 괜찮지만 결혼 상대자로는 골치 아프다.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다며 아침 일찍 출근 카드 찍고 동 틀 때까지 꼬박 야근하고 퇴근 카드 찍는 아내를 생각해 봐라. 막상 나와 결혼할 여자라고 생각하면 솔직히 한숨부터 먼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고로, 직장에서 그러하듯이 사랑놀이에서도 남자에게 한 수 접어주지 않고 당당히 주도권을 요구하는 여자들, 남자의 품에 안길 수 있어도 그 가슴의 영원한 주인이 되기는 어렵다. 사회적인 자아를 감추고 일부러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남자보다 뛰어나지 않는 ‘척’을 하는 영리한 여자들도 있다. 까다로운 남자들의 마음에 쏙 들기 위해 타협하고, 다른 사람들한테 까칠하고 도도하다가도 애인 앞에서는 약해지는 식. 이런 연애 유전자를 가진 여자들이 일찌감치 ‘품절녀’가 되는 건 그런 이유다. 때문에 직장 조직 내에서 남녀 관계가 역전될 수 있을지언정 남자가 여자를 리드하는 연애관계 모델의 오랜 관성은 생각보다 훨씬 견고하다. 결국 그 모델 하우스에 들어갈지 말지의 선택은 전적으로 여자의 몫이다. 사회적으로 강한 자신과 여자다운 나를 철저히 분리해 안고 살아가거나, 그 잘난 자존심을 지키려 기 세고 드센 여자에 겁 먹지 않은 호기로운 젊은이를 기다려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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