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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하프타임

"작품을 열심히 만들어 최선의 결과를 선보이는 것 말고 제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이정재의 작전 타임. 잠깐 숨을 돌린 후 다시 맹렬하게 흐르는 그의 시간.

프로필 by 이하얀 2024.02.29
GG 로고 재킷과 베스트, 팬츠, 밴드 링은 모두 Gucci.

GG 로고 재킷과 베스트, 팬츠, 밴드 링은 모두 Gucci.

수트 차림이 점점 더 멋있어집니다  
구찌 덕분이죠. 캐주얼과 수트 라인 모두 멋지기란 쉽지 않은데, 구찌는 오래전부터 이 모든 걸 잘 만들어왔어요. 어릴 때부터 꾸준히 즐겨 입은 브랜드의 앰배서더가 된 일이 굉장히 흥미로워요.   
 
캐릭터를 변주할 때 주로 어조와 톤을 활용한다고 말해 왔지만, 작품 속 스타일 역시 다양한 변주를 거듭했더군요. <태양은 없다>의 틴티드 선글라스부터  <헌트>의 칼 같은 옷깃까지. 캐릭터를 시각화할 때도 고심하나요  
매우 중요해요. 배우의 표현만으로 관객이 인물의 감정을 알아차리기도 하지만, 직접적으로 보여줘야 설득되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눈에 보이는 건 대다수가 왜곡 없이 받아들이니 그 면면을 올곧게 표현할 수 있죠. 물론 귀에 들리는 것도 중요한 요소이고요.   
 
 
로고 패턴의 수트 재킷과 베스트, 팬츠, 펜던트 네크리스, 삭스, 홀스빗 로퍼, 트롤리는 모두 Gucci.

로고 패턴의 수트 재킷과 베스트, 팬츠, 펜던트 네크리스, 삭스, 홀스빗 로퍼, 트롤리는 모두 Gucci.

 그런 맥락에서 가장 시각화하기 어려웠던 역할을 꼽는다면
일상 속 캐릭터를 구현할 때죠. 개성 강한 캐릭터들은 디자인을 더할수록 답을 빨리 찾을 수 있는데 일상성에는 정답이 없잖아요. 일상은 저마다 다르고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느껴지는 비주얼을 구축한다는 건 참 쉽지 않은 과정 같아요.
 
공개가 임박한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시즌2 기훈의 머리색 또한 그 일환인 것 같습니다. 시즌1 후반부와 시즌2 예고에서 공개된 빨간 머리를 둘러싼 추측이 분분해요
작품은 관객의 상상으로 채워지는 영역이 분명 존재해요. 만든 사람의 의도가 정확히 있겠지만, 관객이 연출자 의도의 이면에서 상상하고 정의하는 것도 맞는 말이겠지요. 어울리기 쉬운 빨강은 아니었는데요(웃음). 큰 변화로 느껴진 색인 건 분명합니다.
 
 
니트 톱과 포플린 셔츠, 울 트윌 쇼츠, 타이, 로고 벨트, 삭스, 레이스업 부츠는 모두 Gucci.

니트 톱과 포플린 셔츠, 울 트윌 쇼츠, 타이, 로고 벨트, 삭스, 레이스업 부츠는 모두 Gucci.

 런던에서 촬영한 디즈니+의 <스타워즈> 새 시리즈 <애콜라이트> 주연으로 합류는 일종의 ‘사건’이라고 표현해도 좋겠습니다
분명 ‘사건’이죠. 그 사건이 제게 일어난 것 또한 사건이고요.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까지 그들은 제가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게 될지 구체적으로 말해 주지 않았어요. 몇 장의 시놉시스에서 꽤 중요한 역할로 묘사돼 있었지만 ‘설마, 나를 그렇게 많이 쓰겠나?’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거든요. 대본을 받았을 때는… 이쯤에서 말을 아끼겠습니다(웃음).
 
 
웹 디테일을 더한 피코트와 로고 후디드 톱, 화이트 팬츠는 모두 Gucci.

웹 디테일을 더한 피코트와 로고 후디드 톱, 화이트 팬츠는 모두 Gucci.

부담도 꽤 컸나 봅니다
컸죠. 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지만요.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한 것 같은 긴장감을 느끼기도 했어요. 한국 배우로서 인상도 달려 있고, 연기도 잘해내야 하고…. 물론 국내 현장이라고 제가 그런 부분을 신경 쓰지 않는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제 행동이 한국적 이미지로 연결될 가능성이 크잖아요. 그런 부분까지 고려해 만족스럽게 촬영을 마쳤지만, 결과물이 더 중요하니 제가 얼마만큼 해냈는지 두고 봐야죠.
 
 
현장은 어땠나요? 
30년 넘게 연기한 ‘베테랑’에게도 새로운 감각으로 다가왔는지 일하는 방식은 놀랄 정도로 비슷해요. 다만 <스타워즈> 시리즈 특성상 세트 규모나 디테일은 입이 벌어질 정도로 크고 세세합니다. <스타워즈> 팀은 늘 최고의 스태프와 배우들이 함께한다는 자부심이 있어요. 나이가 지긋하고 숙련된 장인들이 각자 에너지를 주고받는 게 인상적이더군요.
 
 
니트 톱과 포플린 셔츠, 블랙 쇼츠, 타이, 벨트, 삭스 레이스업 부츠는 모두 Gucci.

니트 톱과 포플린 셔츠, 블랙 쇼츠, 타이, 벨트, 삭스 레이스업 부츠는 모두 Gucci.

 이정재라는 한국 배우를 궁금해하는 동료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한국 콘텐츠를 굉장히 즐겨 보더군요. 저더러 최근 공개된 어떤 한국 드라마를 봤냐고 물었는데 정작 저는 그걸 보지 못했죠. 그 작품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너무 재미있어서 아껴 보고 있다고, 덕분에 런던 코리아 스트리트에서 친구들과 한국 음식을 먹으러 갔다고…. 그런 얘기들이 오가곤 했죠.
 
 
블랙 피코트와 후디드 톱, 자카르 디테일의 팬츠, 삭스, 화이트 레더 스니커즈, ID 태그 장식을 더한 레더 미디엄 더플백은 모두 Gucci.

블랙 피코트와 후디드 톱, 자카르 디테일의 팬츠, 삭스, 화이트 레더 스니커즈, ID 태그 장식을 더한 레더 미디엄 더플백은 모두 Gucci.

 런던에 머무는 동안 ‘K콘텐츠는 이제 막 시작일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했다죠. 절정기라고 해도 좋을 이때, ‘시작’이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느낀 건 한국 콘텐츠를 신기해서 보는 게 아니라 진짜 재밌어서 보는 것 같더라고요. ‘아시아권’이라는 말로 단순 흥밋거리나 이색적 요소로 접근하지 않죠. 장르적 퀄리티나 연기력, 서사 흐름과 반전은 물론, 연기를 더 재미있게 보이도록 만드는 전체 프로덕션 퀄리티가 갖춰져 있으니까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아요. 이 흐름이 앞으로 쉽게 꺾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데님 재킷과 롤업 팬츠, GG 벨트, 밴드 링, 삭스, 블랙 페니 로퍼는 모두 Gucci.

데님 재킷과 롤업 팬츠, GG 벨트, 밴드 링, 삭스, 블랙 페니 로퍼는 모두 Gucci.

 그 물살을 온몸으로 체감한 사람으로서 국내 콘텐츠 업계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을 꼽는다면
작품에 대한 자존심을 지켰으면 좋겠어요. 하나의 비즈니스나 상품으로 보지 않고, 창작으로 인정받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어야죠. 희망적인 건 요즘 배우들은 연기력이든 외형적 매력이든 모두 준비된 상태로 나오는 것 같아요. ‘프로’ 같은 신인들이 있어 든든하죠.
 
 
최근 데뷔 30주년 기념 ‘이정재관’을 방문한 기록을 SNS에 올렸습니다. 애정 가득한 공간을 보니 어떤 기분이 들던가요
모두 정성이잖아요. 마음으로도 충분하니 꾸미지 말라고 말씀드렸는데 팬들은 늘 무언가 해주고 싶나 봐요. 당시 대전에서 한창 촬영 중이었는데 겨우 반나절 시간이 나서 바로 서울로 향했습니다. 가볼 기회가 1주일밖에 주어지지 않았으니 후딱 보고 다시 내려갔죠. 
 
 
플라워 프린트 셔츠와 블랙 팬츠, 네크리스, 레더 벨트는 모두 Gucci.

플라워 프린트 셔츠와 블랙 팬츠, 네크리스, 레더 벨트는 모두 Gucci.

마침 3월에 1999년 작 <태양은 없다>가 재개봉하더군요. 보러 갈 겁니까
재개봉을 주최하는 분과 잘 아는 사이인데, 해도 되겠냐고 물어왔어요. “꼭 해야겠냐?”고 물었더니 재밌을 거라더군요. 하는 건 자유지만 보러 오라고는 하지 말라 했죠(웃음). 워낙 어릴 때 연기한 터라 그 미숙함을 다수와 함께 봐야 된다고 생각하면…. 어떤 장면에서는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을 거예요.
 
지난 시간 스스로 가혹할 때가 많았는지, 아니면 칭찬할 때가 더 많았는지요
자신에게는 인색할 수밖에 없죠. 시간이 지나면 늘 아쉬움이 남는 게 일이니까. 그러니 더 이상의 최선이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하려 해요. 후회하지 않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거든요. 그러다 좋은 아이디어가 생기면 좋은 연기가 나오는 거고, 잘 풀리지 않았다면 그저 ‘거기까지였다’고 받아들이는 수밖에요.
 
 
 
그래픽 프린트 실크 셔츠와 팬츠, 네크리스, 골드 장식의 벨트는 모두 Gucci.

그래픽 프린트 실크 셔츠와 팬츠, 네크리스, 골드 장식의 벨트는 모두 Gucci.

요즘은 자신에게 조금 너그러워졌을지
글쎄요. 키가 작았을 때는 담장 위가 보이지 않다가 조금씩 크는 만큼 담장 너머가 잘 보이잖아요. 만족의 기준도 높아질 수밖에 없죠. 그 기준을 뛰어넘고 싶은 욕구는 늘 생기니 직업인으로서 자신에게 너그럽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가장 끈질기고 집요해 보인 순간은 <헌트> 신인 감독 데뷔였습니다. 당신의 성장을 지켜본 대중으로서 그런 성취에 짜릿함을 느끼기도 했어요. 이후 작품 보는 관점이 달라졌나요
현장을 오래 경험했기에 배우와 감독의 차이는 크게 못 느꼈어요. 하지만 시나리오를 쓰면서 많은 감정이 들었죠. 나만의 고집을 부리는 건 아닌지, 되지 않을 일에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 건 아닌지 의심했죠. 또 시나리오를 쓰고 배우에게 건넨 뒤 1주일 동안 연락이 없다면(웃음)…. 보통 매니지먼트에 시나리오가 전해지면 회신이 빨라야 2주 걸리거든요. 그런데 사흘만 지나도 애가 타는 거예요. 여태 반대 입장에서 내 전화를 기다린 사람도 있었겠구나, 반응에 대한 궁금증에 애가 탔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시나리오를 쓰고, 전달하고, 피드백을 기다리는 과정은 물론 만나서 상대가 소감을 얘기하는 과정까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과정이 그간 영화를 하면서 못 느낀 경험이었습니다.
 
 
GG 패턴이 돋보이는 재킷과 베스트, 체인 펜던트 네크리스, 밴드 링은 모두 Gucci.

GG 패턴이 돋보이는 재킷과 베스트, 체인 펜던트 네크리스, 밴드 링은 모두 Gucci.

한국영화 최초로 출판사 애술린에서 <헌트> 아트 북을 발간했습니다. 직접 기획과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죠
200억 원짜리 영화를 만드는 건 참 드문 기회인데 그걸 또 다른 형태로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었죠. 당시 영화 후반작업 중이었고, 칸영화제 초청이 결정되기도 전에 의욕이 앞서 일요일에 트레이닝복 입고 외출했다가 그길로 도산공원 애술린 매장에 들어갔습니다. 직원에게 ‘사장님’을 뵐 수 있을지 물어봤죠. 그리고 날짜를 잡았어요. 그는 애술린 부부가 쉽게 책을 내지 않는 데다가 마음에 드는 책만 낸다고 설명했어요. ‘한국에 이런 배우가 있고, 이런 영화를 만들었는데, 액션이지만 주제 면에서 나름 주목받는 영화로 만들어보려 합니다’라며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다 꺼냈습니다(웃음).
 
일에 대한 불씨가 늘 활활 타오르고 있군요(웃음). 그런 순간에도 당신은 늘 ‘위트’를 잃지 않는 것 같습니다
위트란 자신에게도 물론이지만, 상대방을 위해 더 중요한 요소죠. 최대한 즐겁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또 매일 그러기가 쉽나요?
 
 
오버사이즈 셔츠와 빅 로고 스웨트셔츠, 네크리스는 모두 Gucci.

오버사이즈 셔츠와 빅 로고 스웨트셔츠, 네크리스는 모두 Gucci.

순수한 로맨스 연기를 꿈꾼다는 말도 흥미로웠습니다. 여전히 좋은 멜로 대본을 기다리나요
이제 조금씩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까지 주로 장르 영화가 제작되는 환경이었으니까. 기대해 보는 거죠(웃음).
 
사랑을 넘치게 받고 있는 요즘, 이정재가 한국영화에, 스태프와 동료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돌려주고 싶은 사랑은 어떤 모습입니까
별다를 것 없어요. 그저 작품을 열심히 만들어 최선의 결과를 선보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그러니 좋은 작품을 잘 골라야 하고, 열심히 잘 찍어야 하고, 홍보도 잘해야죠. 그런 후에 관객과 마주하면 서로 즐겁게 얼싸안고 그런 거죠, 뭐.
 
이미 최고의 배우인 당신에게도 꿈이 있나요
오래 배우이고 싶어요. 물론 성실하고 뛰어난 능력으로 한 직업을 오래 일굴 수도 있겠지만, 운도 따라줘야 하고 여러 우연이 작용해야 가능하잖아요. 그 어떤 직업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그러니 오래 일한다는 건 자신의 능력이라기보다 일종의 축복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포켓 디테일의 플라워 셔츠와 블랙 울 팬츠, 레더 벨트, 체인 네크리스, 실버 네크리스는 모두 Gucci.

포켓 디테일의 플라워 셔츠와 블랙 울 팬츠, 레더 벨트, 체인 네크리스, 실버 네크리스는 모두 Gucci.

그 축복이 오래 이어지길 바라는군요 
더 열심히 하면 이어질 수 있으려나요(웃음). 그러려면 사람들과 잘 지내야 하는 것 같아요. 저 사람과 일하면 왠지 믿음이 가고, 늘 즐겁고, 그 사람처럼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한 명으로 시작해 점점 퍼지고 쌓여야 하는 일입니다. 쉽지 않아요.
 
결국 ‘좋은 인간’이 꿈이네요 
모든 사람은 그래야 된다고 생각해요. 사람은 그래야 합니다.
 
 
 

Credit

  • 에디터 이하얀
  • 에디터 전혜진
  • 패션 스타일리스트 황금남
  • 헤어 스타일리스트 김태현
  • 메이크업 아티스트 김하나
  • 세트 스타일리스트 정희인
  • 아트 디자이너 이소정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
  • 어시스턴트 김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