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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예은이 좇는 신기루

신간 <꿰맨 눈의 마을>에서 그녀가 직조해낸 아름답고 환상적인 세계를 따라가보았다.

프로필 by ELLE 2024.01.29
 코트는 Max Mara. 스커트는 Courrèges. 슈즈는 Dr. Martens. 셔츠와 타이, 타이 핀, 링 벨트와 삭스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코트는 Max Mara. 스커트는 Courrèges. 슈즈는 Dr. Martens. 셔츠와 타이, 타이 핀, 링 벨트와 삭스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엘르>와는 정유정 작가와 나눈 대담으로 처음 만났죠. 이후 1년 만의 조우라 더욱 반가운데요. 지난해는 무얼 하며 보냈나요
일만 열심히 했어요. 너무 재미없나요(웃음). 신작 <꿰맨 눈의 마을>의 첫 번째 단편은 지난봄 자음과모음 출판사 계간지에 실렸던 작품이에요. 출판이 확정된 후에 단편 두 개를 더 작업해야 해서 부담 없는 마음으로 틈틈이 작업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그리고 드디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어느덧 데뷔 8년 차입니다. 성장했다고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는지
스스로 느끼는 재미의 역치가 높아졌을 때요. 시간이 갈수록 ‘재미있다’고 느끼는 기준이 점점 높아져요. 이전에는 흥미로운 발상이나 재미있는 장면 하나로도 책 한 권을 완주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었거든요. 지금은 좀 더 높은 차원의 재미를 추구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고통스럽기도 하지만(웃음).
 
신작 <꿰맨 눈의 마을>은 환경 오염으로 인해 ‘얼굴이 아닌 곳에 이목구비가 나는’ 저주병이 퍼지기 시작한 2066년 6월 6일 둠스데이를 배경으로 하는데
환경 오염은 독자들이 소설 속 세계관을 믿을 수 있도록 설정한 주제였어요. 실제로 현재진행 중인 이슈이기도 해서 소설 속 상황도 언젠가 벌어질 미래에 관한 이야기라며 상상할 수 있도록 했어요. 자연스럽게 타운이라는 배경 역시 가짜가 아닌 ‘진짜’라고 믿기 쉽겠지만, 실은 환경 오염, 저주병, 2066년 6월 6일 둠스데이라는 설정 모두 타운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이잖아요. 새빨간 거짓말일 수도 있어요. 최초의 방주를 구축한 사람이 주장하는 내용이니까요!
 
세계관을 설정할 때 실제 사건이나 창작물에서 영향을 받기도 하나요
어느 아파트 단지에서 외부인 출입을 금지하기 위해 입주자 전용 문을 만든 사건이 있었어요. 앞 단지 아파트를 통과해야 학교에 갈 수 있는 뒤 단지 아이들이 갑작스럽게 생긴 장해물 때문에 먼 길을 빙빙 돌아가는 모습이 안타까웠죠. 비슷한 시기에 장애인 이동 관련 이슈도 있었고요. 소외와 배제라는 키워드를 생각하게 된 계기였어요. 한 다큐멘터리에서 본 사이비 집단의 이야기는 황야 속에서 고립된 타운에 대한 아이디어를 줬어요. 미국의 넓은 황야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는 집단이 있대요. 오싹하죠.
 
이번 작품에는 자살을 위한 ‘미트파이’가 등장해요. 신선한 소재가 작품 분위기를 구현하는 데 톡톡히 한몫하는 것 같아요
독약이 든 미트파이는 타운에 사는 사람들의 행동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였어요. 이들은 파이를 ‘베푼다’고 표현하잖아요. 모두가 ‘감염자가 누구든 신고하고 파이와 함께 추방한다’는 타운의 규칙이 옳다고 믿고 따르는 거죠. 화려한 마지막 만찬 같은 느낌을 주고 싶기도 했고요. 타운은 황야의 한복판에 있는 곳이니 당연히 자원이나 물자가 부족할 테고, 고기가 그만큼 귀한 식재료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잔인하지만 죽음과 고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잖아요. 사람들이 황야에서 죽는다면 그들도 결국 ‘고기’가 될 테니까.
 
‘희망적인’ 디스토피아는 조예은표 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설정입니다. 한 인터뷰에선 ‘인간적인 면이 없는 디스토피아는 배경에 불과하지 않을까’라고 했어요. 공포와 온기라는 키워드를 동시에 녹여내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다들 공포와 따뜻함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사실 따뜻함이 있는 곳에 공포가 있거든요. 그런 마음이 꺾일 때 두려운 감정이 생기니까요. 신기한 건 죽음과 가까이 있는 호러물 속 주인공들도 삶에 대한 열망이 엄청 크다는 거예요. 누군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삭막한 디스토피아를 좋아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런 배경에서 사람과 사람이 서로 부딪히며 반짝이는 감정을 발견하는 것이 더 좋더라고요. 그 찰나의 순간이 더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고요. 어렵다기보다 즐겁고 흥미로운 일이죠.
 
 
신작 <꿰맨 눈의 마을>은 세상의 모든 ‘다름’에 대한 조예은의 애틋한 전언이다.

신작 <꿰맨 눈의 마을>은 세상의 모든 ‘다름’에 대한 조예은의 애틋한 전언이다.

 
한편 주인공 이교는 친구인 램을 위해 스스로 자신의 세 번째 눈을 고발하고 황야로 떠납니다. <스노볼 드라이브>의 이월과 모루의 관계성이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했는데요.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 아이들의 용기와 담대함이 감동적이었어요. 우정을 다룬 주제에 애정을 갖고 있나요
우정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만들어지는 모든 종류의 관계에 관심이 많아요. 그 속에 담긴 사랑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크고요. 고립된 타운 속에서는 친구 한 명 한 명과의 관계가 되게 소중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제와 똑같은 내일을 살고, 정해진 규칙에 물음표를 던지지 않는 어른들 속에서라면 더더욱. 램과 함께 타운의 체계에 의구심을 갖고 바깥세상을 상상하며 나누던 무수한 질문이 결국 이교를 황야로 이끈 것 같아요.
 
이교의 삼촌이자 황야의 문지기인 백우는 세 개의 단편을 통틀어 가장 크게 변하는 인물이 아닐까 싶어요. 시간이 갈수록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고 결국 죽음을 결심하는 백우를 그려내는 과정에서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이교와 램이 타운 밖을 벗어나면서 시작하는 존재들이라면, 백우는 타운 속에서 체계를 이어가는 톱니바퀴 같은 존재예요. 백우를 기점으로 하나의 태엽처럼 완고한 세계관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깨지는 순간도 그려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약간의 균열을 일으켰죠. 로봇처럼 감정을 절제하던 백우가 히노와 사랑을 나누게 되고 이별을 겪으며 자신의 행동을 곱씹어볼 수 있도록 했어요. 과연 황야에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동료를 버리고 오는 일이, 독약이 든 미트파이를 건네며 자신의 최후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던 모든 일이 옳았을지. 마지막에는 조카 이교까지 직접 황야에 데려다주고 오면서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죽음을 결심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히노는 왜 백우와 함께 타운을 떠나지 않은 걸까요. 스스로 책임을 회피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무엇보다 컸기 때문일까요
히노는 유일하게 타운 밖에 어떤 세상이 있을지 모르는 채 스스로 추방을 선택한 캐릭터예요. 이런 선택을 미뤄봤을 때 그간 독이 든 미트파이를 만들며 사람들을 죽이는 데 일조했다는 죄책감이 컸을 것 같아요. 그게 오로지 본인의 몫이라고 생각했겠죠. 또 백우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만큼 백우를 믿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동안 히노에게 보여준 백우의 모습은 그저 타운의 규칙에 철저히 순응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으니까요.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그 사람을 온전히 믿느냐 하는 건 서로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요.
 
목덜미에 난 두 번째 입을 들켜 황야에 버려진 램이 어떻게 생존했는지 궁금해하는 독자가 많아요. 정말 히노가 노파 몰래 미트파이에 독약 대신 수면제를 타온 거라면
히노가 백우와 타운 밖으로 나가서 독을 먹고 퍼렇게 질린 사람을 목격한 순간을 전환점으로 잡았어요. 그날 이후 히노는 파이에 독약 대신 수면제를 타온 거죠. 이런 설정을 통해 추방된 타운 사람들이 파이를 먹었을지라도 대부분 살아났을 거라는 암시를 주고 싶었어요. 주방을 관리하던 노파도 아마 히노가 파이에 수면제를 넣는다는 걸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녀가 백우에게 “주방의 모든 것은 히노가 두고 간 그대로”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죠.
 
소설을 마무리하며 덧붙인 에세이도 인상적이었어요. 지면과 스크린 위에서 진짜인 척하는, 작가의 손에서 재탄생하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빛나는 모형’ 같다고 했는데요. 고립된 타운을 만들어 공포를 조장하는 구인류는 무엇의 모형인가요. 어떤 현실을 투영했는지
음식 모형은 실제보다 맛깔스럽게 과장하는 면이 있잖아요. 저 역시 소설을 통해 현실세계를 본뜬 먹음직스러운 모형을 만들지만, 실은 반짝이는 것 이면에 현실에서 느낀 불만족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서로 포용하기보다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올리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타운 속 구인류에 빗댔어요. 서로가 서로를 구분 짓고, 경계를 나누고, 등급을 정하는 모든 상황을 응축해 하나의 모형으로 나타낸 거죠. 또 다수가 소수를 배제하는 게 현실세계의 모습이라면 소설에서는 반대로 뒤집어보고 싶었어요. 자신들이 정상성에 속한다고 믿는 소수의 구인류가 다수인 신인류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앞으로 조예은이 좇고 싶은 신기루는
‘세상에 이런 일들이 벌어졌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사람과 사람이 얽히고설켜 관계가 엉망진창이다가도 결국 회복해 내는. 긍정적인 결말을 기대할 수 있는 이야기라면 꾸준히 따라가고 싶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경계와 구분 짓는 척도, 날카로운 잣대를 최대한 무디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계속 고민하고 싶고요. 그런 아름답고 환상적인 낭만을 꿈꿉니다.
 
조예은
1993년생. 기이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쓴다. 대표작은 <칵테일, 러브, 좀비> <트로피컬 나이트> <스노볼 드라이브>. 그리고 얼마 전 첫 번째 연작 소설집 <꿰맨 눈의 마을>을 발표했다. 꾸준히 세상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빛나는 모형’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녀가 생각하는 자신의 숙제.

Credit

  • 어시스턴트 에디터 이의영
  • 사진가 이예지
  • 스타일리스트 이지현
  • 헤어&메이크업 아티스트 이현정
  • 아트 디자이너 정혜림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