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생. ‘악의 3부작’이라 불리는 〈7년의 밤〉 〈28〉 〈종의 기원〉으로 독보적인 이야기꾼으로 거듭났다. 간호학과 졸업 후 10여 년의 직장생활 끝에 발표한 성장소설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제1회 세계일보 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며 전업 작가가 되었다. 그의 문학은 2017년부터 영미권을 비롯해 22개국에 소개되며 한국 스릴러 문학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1993년생. 금속공예학과를 전공한 대학시절, 교양수업 시간에 좀비 소설을 쓰며 글쓰기에 관심을 가졌다. 2016년 발표한 데뷔작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와 첫 장편 〈시프트〉가 연달아 공모전에서 수상하며 장르 문학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SF 장르에서 호러와 스릴러, 드라마 등 다양한 이야기의 변주를 시도해 왔으며, 〈칵테일, 러브, 좀비〉 〈스노볼 드라이브〉 〈트로피컬 나이트〉 등의 책을 썼다. 조예은 만나게 돼 영광입니다. 고등학생 때 정유정 작가님의 〈7년의 밤〉(2011)을 읽고 충격을 받았고, 이후 초기작 〈내 심장을 쏴라〉(2009)부터 읽으며 작가님의 세계에 빠져들었어요. 그때의 충격이 불씨가 되어 첫 장편 〈시프트〉(2017)를 쓰게 되었듯 작가님에게도 창작의 기폭제가 된 순간이 있었을까요
정유정 남동생과 함께 광주에서 하숙하던 고등학교 1학년 때였어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진 해였죠. 시내가 무법천지가 된 어느 날, 공수부대가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하숙집 언니 오빠들이 전부 거리로 달려나갔어요. 저와 동생은 너무 어려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멀리서 끊임없이 들리는 총소리와 굉음, 비명 소리 속에서 도저히 잠을 청할 수 없더라고요. 불길한 상상이 멈추지 않았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대학생 오빠가 쓰던 옆방으로 갔어요. 정말 지루해 보이는 책, 읽자마자 바로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책 하나를 집었는데 그게 하필 켄 키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였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르짖는 책이죠. 읽으면서 가슴이 뜨겁다 못해 불타오르더군요. 앉은자리에서 마지막 장까지 읽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이미 동은 터오고, 시민군이 진압됐음을 알리는 무거운 침묵이 가득했어요. 완전히 오열하고 말았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막연히 작가의 꿈은 갖고 있었지만 도대체 왜인지 알 수 없었는데 그날 마지막 퍼즐이 맞춰진 것 같았어요. 나도 이런 소설을 써서 독자들에게 이런 뜨거운 새벽을 선물해야겠다고 다짐했죠. 인간의 자유의지가 제 작품의 주요 화두가 된 데는 그날의 영향이 커요.
조예은이 입은 그레이 핀스트라이프 수트 셋업은 Node.be made. 화이트 셔츠는 COS. 정유정이 입은 네이비 핀스트라이프 수트 셋업은 Node.be made. 화이트 셔츠는 COS.
조예은 글을 쓰며 스스로 많이 변화했고, 계속 변화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졸업 후 방황하며 남다른 우울을 경험한 시절, 뭐라도 하면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쓴 단편소설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2016)를 통해 글쓰기의 치유 기능을 경험하기도 했고요. 처음 소설을 썼을 때와 지금을 비교할 때 가장 변했다고 느끼는 지점은
정유정 바뀐 게 거의 없어요. 20년 넘게 글을 썼지만 매번 처음 쓰는 것처럼 낯설고 어렵거든요. 주로 장편소설을 쓰니 한번 작업을 시작하면 2년 정도 집 밖으로 안 나가는데, 그날그날 정말 겨우겨우 쓴답니다. 성질도 내고, 때론 술에도 기대면서요(웃음). 스스로 극한으로 몰아붙이는 건 젊은 작가들에겐 별로 권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지만, 안타깝게도 그게 저한테는 항상 통하더라고요. 다만 나이가 드니 가끔씩 독자들이 그리워요. 예전에는 글쓰기에만 정신없이 몰두했다면 요즘은 독자들의 에너지가 절실한 순간이 한두 번씩 찾아오더라고요.
조예은 “아이디어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는 작가님의 말에 공감했습니다. 자기 직전 두근거리며 메모한 생각이 다음 날 아침이면 심드렁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 찰나의 아이디어를 거대한 서사로 확장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유정 재미와 의미죠. 내가 몇 년을 책상에만 앉아도 좋을 만큼 이 이야기에 욕망을 느끼는가? 그리고 세상에 내놓을 만큼 가치 있는 이야기인가? 이 두 가지 질문에 모두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으면 힘 있는 이야기를 쓸 수 있어요.
조예은 주로 단편을 출간해 온 입장에서 긴 시간 동안 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능력이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때때로 밀려드는 자기혐오와 무력감 같은 부정적 감정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은
정유정 연애와 비슷한 것 같아요. 아무리 뜨거운 마음으로 시작해도 연애할 때 우리가 항상 기쁘기만 한가요? 불안하고 괴로울 때가 더 많잖아요. 글도 마찬가지예요. 관계를 끝낼 게 아니라면 이야기를 쓰고 싶어 안달복달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맨 처음 내가 이 이야기를 왜 쓰려 했는지 계속 상기하면서 나아가야죠.
조예은 저는 화가 많았던 시기에 쓴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에서 두 주인공을 그려내며 어느 때보다 깊이 몰두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처럼 작가가 완전히 이입해서 만든 캐릭터가 있는가 하면, 상상만으로 캐릭터를 창조하는 경우도 있죠. 작가님은 인물과 어느 정도 거리감을 선호하시나요? 더욱 설득력 있는 글을 쓰기 위한 팁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정유정 연애하는 마음으로 쓰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주인공을 너무 아끼고 사랑하면 안 돼요. 이야기의 궁극적인 의미와 메시지에 도달할 때까지 온갖 고생을 다 하게 만들어야죠. 진짜 주인공이라면 ‘이러다 죽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만큼 혹독한 시련과 장애물까지 헤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포기하거나 방향을 틀면 그건 조연이죠. 평범한 소년에서 사이코패스로 거듭나게 되는 〈종의 기원〉 주인공 ‘유진’도 그런 식으로 만들어갔어요. 작가가 하는 일은 오케스트라 연주와 비슷합니다. 바이올리니스트가 됐다가, 피아니스트가 됐다가, 전체가 잘 어우러지는지 보려면 지휘자도 되어야 해요. 거리감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줄 알아야죠.
조예은 ‘악의 3부작’으로 묶이는 〈7년의 밤〉 (2011) 〈28〉(2013) 〈종의 기원〉(2016)에 이어 최근작 〈완전한 행복〉(2021)에서도 나르시시스트형 사이코패스를 다루며 또다시 악인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지금 가장 관심 가는 악인의 유형이 있다면
정유정 차기작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겠는데요(웃음). “우리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우리를 들여다본다”는 니체의 말처럼 자신의 욕망 때문에 타인은 물론 스스로의 인생까지 파멸로 몰아가는 인간 유형에 몰두하고 있어요. 욕망에 미친 사람으로 인한 비극이 실제로도 너무 많잖아요. 아마 SF와 스릴러 장르가 섞인 액자 소설이 될 것 같은데 SF 장르는 처음이라 걱정이 많답니다.
(왼쪽) 정유정이 입은 브라운 더블 브레스티드 코트와 네크리스는 모두 Tod’s. 블랙 드레스는 Arket. 조예은이 입은 블랙 재킷은 Alexander McQueen. 화이트 셔츠는 COS. 블랙 스커트는 Arket. 블랙 레더 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조예은 정말 기대되는 걸요. 저는 파국을 맞이하거나 혼돈에 빠진 인물의 불안정한 상태, 불길한 분위기가 자아내는 묘한 시너지 때문에 괴담과 미스터리를 좋아해요. 작가님이 스릴러 장르를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정유정 제가 흥미를 느끼는 이야기는 스릴러 장르가 아니면 소화해 낼 수 없으니까요. 살다 보면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는 순간과 마주하게 되는데, 저는 그때를 기점으로 삶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인물에 호기심이 생겨요. 벼랑 끝이 분명한데도 계속해서 달려나가는 어리석고, 무모하고, 파멸적인 인간을 보통 제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죠.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스릴러 장르가 아니면 어떻게 풀어가겠어요. 거기서 약간 순화시키면 성장소설이 되는 거고요. 행복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는 별로 재미가 없어요. 착한 남자가 아내를 너무 사랑해서 모든 걸 바치고, 어떤 잘못도 다 용서해 주는 이야기를 들으면 저는 그 아내에게 나쁜 남자를 소개시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거든요(웃음).
조예은 소설가로서 중시하는 개인적인 원칙이 있다면
정유정 독자에게 설교하면 안 됩니다. 비겁하게 인물의 목소리를 빌려 내 생각을 주입시키고 있진 않은지 항상 면밀하게 살피는 편이에요. 내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에게도 발 디딜 땅을 내어줘야 하니까요. 보통 책의 절정부에서 ‘나는 세상을 이렇게 이해하는데 당신은 어때요?’라는 말을 은밀하게 건네곤 하는데 그걸 알아차리는 독자가 있으면 좋고, 모르고 지나간다 해도 책만 재미있게 읽었다면 상관없어요. 그런 마음으로 글을 쓰죠.
조예은 출간 후에는 긴장이 풀려 기진맥진하는 타입이에요. 작가님은 캐릭터의 심연까지 몰입하는 만큼 탈고 후 해방감을 더 크게 느끼지 않을까 싶습니다. 긴 이야기를 마친 뒤 어떤 식으로 에너지를 충전하시나요
정유정 험한 데 가요(웃음). 전염병을 소재로 한 아포칼립스 소설 〈28〉을 쓰고 난 후에는 히말라야 종주를 했고요. 산티아고 순례길도 다녀온 적 있어요. 팬데믹 시기에 출간된 〈완전한 행복〉 후에는 아쉬운 대로 제주도 올레 길을 걸었죠. 그렇게 몸을 못살게 굴며 내 안을 잠식했던 악의 기운을 몰아내요. 다음 소설을 위한 백지화 과정이기도 한 것 같아요.
조예은 간호사로 5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9년 넘게 일한 끝에 전업 작가가 되셨죠.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작업에 몰두할 수 있다는 설렘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공존했을 것 같아요. 제 경우엔 갑자기 가용 시간이 많아지니 어떻게 시간을 쓰고, 얼마나 글을 써야 할지 막막했어요. 전업 예술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정유정 어릴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저도 용기가 없었어요. 엄마가 시키는 대로 간호대학을 나와 오래 직장생활을 했고, 결혼도 했죠. 아무리 예술에 대한 열정과 확신이 있다 한들 먹고사는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예술혼이란 것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기본적인 것이 충족됐다면 베팅해야죠. 저에겐 결혼이 딱 그 시점이었어요. 남편이 공무원이었는데, 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으니 결혼할 때 제가 그랬거든요. 결혼하면 전업 작가로 살겠다고. 작가로서 확신이 있었다면 오히려 직장을 안 그만뒀을 것 같은데, 확신이 없으니까 오도 가도 못하게 다리를 태워버린 거예요. ‘여기서 승부를 못 보면 내 인생은 망한 거다’라고 생각했죠.
조예은 작가님에게도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선배 문인이 있나요
정유정 은희경 선생님과 조용호 작가님이요. 두 분 모두 저는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너무나 아름답게 하시는 분들이죠. 글에는 균형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한창 문장 훈련을 할 때 두 분의 글을 많이 필사했어요. 강인하고, 아름답고, 우아한 문장을 따라 쓰다 보니 제 문장에도 힘이 실리더군요.
조예은 지승호의 인터뷰집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2018)를 통해 정말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이야기를 설계하는 작가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메모와 스케치, 답사와 인터뷰를 아우르는 초고와 원고 작업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스토리텔러로서 갖추면 좋다고 생각하는 습관이나 루틴이 있다면
정유정 온종일 쉼표 하나를 쓰더라도, 인터넷만 하더라도, 일단 책상에 앉아 있는 습관을 들이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직장인처럼 생활해도 좋아요. 저는 보통 밤 10시쯤 자고 새벽 3시쯤 일어나는데 커피 한 잔 마시고, 강렬한 메탈 사운드로 정신을 깨운 다음 오전 내내 글을 씁니다. 점심 먹고 나서 5시까지 아침에 쓴 글을 수정하고요. 그런 다음 곧바로 헬스장으로 향하죠. 글 쓰는 동안 매일 이런 패턴을 반복해요. 저처럼 꼭두새벽부터 일어나라는 얘기가 아니라 뭐라도 축적될 수 있는 리듬과 환경을 만들면 좋다는 거죠.
조예은 주구장창 글만 쓰기보다 때론 전시나 영화, 영상을 보며 새로운 영감이 샘솟기도 하더라고요. 작가님 역시 여행과 모험을 즐기는 걸로 아는데 직업인에게 직업 이외의 세상은 얼마나 중요할까요
정유정 저는 정말 벌레처럼 집에만 있어요. 일 외에 꾸준히 하는 건 운동밖에 없어요. 최근 처음으로 턱걸이 두 개를 성공했는데 희열이 엄청나더라고요. 워낙 몸 쓰는 걸 좋아해서 작가가 아니었다면 클라이머나 산악인처럼 아주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됐을 것 같아요. 다만 영화와 드라마, SNS는 최대한 멀리합니다. 책과 다르게 인간을 수동적으로 만들거든요. 무의식적으로 표절을 할 여지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일상에서 쏟아지는 자극이 뇌리에 남아 우리를 농락하는 일이 생각보다 많이 벌어진답니다. 이건 네 생각이야, 너만의 영감이야 하면서 우리를 현혹시키죠. 창작자는 새로운 영감을 한 번쯤 의심스럽게 뜯어볼 필요가 있어요.
조예은 의외의 지점에서 온기가 피어나는 공포소설을 즐겨 쓰는 저처럼 장르의 경계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작가가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작가님은 세상에 어떤 이야기가 더 많아지길 바라나요
정유정 후배 작가들에게 자주 하는 이야기인데, 자기가 정말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썼으면 좋겠어요. 세상이 그걸 원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이야기에 세상이 귀 기울이도록 만드는 데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매력적인 이야기가 많아지면 독자들도 더 행복해지겠죠.
조예은 책을 멀리하던 사람이 제 소설을 읽고 책과 가까워졌다는 말을 들으면 정말 뿌듯하더라고요. 좋은 이야기를 내놓는 것 외에 소설을 통해 기대하는 것이 있으신가요
정유정 ‘죽음’이란 종착지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는 기차에 타고 있다고 생각하면 도착 직전까지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노는 거 참 좋아하거든요? 틈만 나면 농땡이 피우고 싶고요. 하지만 게으름 피우다가도 삶의 유한성을 생각하면 결국 책상에 앉게 되더라고요. 그 마음으로 여태껏 ‘소설가 정유정’을 채근해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먼 훗날 제 소설이 흔적이 되어 자기 삶에 충실했던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