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생성 AI ‘달리2(DALL-E 2)’가 생성한 일러스트레이션.
챗GPT? 달리(DALL-E)? 뮤직LM? 도대체 그게 뭔데. 생성형 AI와 제대로 된 대화의 물꼬를 트기도 전, 세계 최대 화랑인 뉴욕 가고시안 갤러리에 AI의 그림이 걸렸다. 엄밀히 말하면 다큐멘터리 감독 베넷 밀러가 AI에 주문해 몇 초 만에 생성한 그림의 피그먼트 출력물이다. 뒤틀린 형상, 흐릿한 픽셀 등 생성 오류마저 심오한 의도처럼 읽히는 10여 점의 작품을 두고 가고시안은 “사진예술의 역사와 형식에 질문을 제기한다”고 평했다. 맞는 말이다. 즉각적인 의문이 100개쯤 피어올랐으니까. 그림뿐 아니라 작사·작곡, 문학, 비평의 영역까지 전방위로 활약하는 AI를 베넷 밀러처럼 적극 활용하는 예술가가 있는 반면, AI 소프트웨어가 화풍이나 디자인을 학습하지 못하도록 ‘옵트아웃’하는 세력도 만만찮은 시점. 나도 이 칼럼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달리’에게 슬쩍 맡겨보았다. ‘예술과 AI의 관계에 관해 논의하고 있는 데이비드 호크니와 AI 여성을 그려줘. 강렬한 색감으로.’ 달리의 능력은 ‘살바도르 달리’였다! 묘한 기시감에 표절이 의심되기도 했지만 분명 이 작업은 ‘호크니 애호가’라는 특성을 가진 내가, 예술과 AI의 조우를 주제로 삼아, 심지어 AI를 여성화하고 싶다는 실제의 삶으로부터 중첩된 사고와 취향을 담고 있었다. 나는 그럼 작가고, AI는 도구일까? 혹은 AI의 창작물을 예술로 인정해도 될까?
뉴욕 가고시안 갤러리에 전시 중인 베넷 밀러의 AI 작품 〈무제〉 시리즈.
‘생성형 AI가 당신의 창작을 위협하나요?’ 창작자 4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먼저 카피라이터 무기명의 답변은 이러하다. “지면 광고, TVC에 간간히 챗GPT로 쓴 카피가 보입니다. 백화점 광고 문구를 AI 카피라이터가 썼다는 뉴스도 봤고요. 달갑진 않았습니다. 위협으로 느껴지기보다 AI가 카피라이터를 대체하는 걸 ‘트렌드’로 여길까 봐 걱정했거든요. 중요한 건 질인데 말이죠. 카피라이터는 광고 문구만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브랜드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한 뒤 타깃을 설득합니다. 물론 정해진 단어로 다양한 문장을 쓰도록 도와주는 능력이 어떤 카피라이터에게는 꼭 필요한 ‘서비스’일 수도 있겠지만요.” 일러스트레이터 장캐도 거든다. “1년 전부터 ‘달리’가 유행이었죠. 일반인도 재미로 사용하고 유튜버들도 콘텐츠 소스로 쓸 때만 해도 그저 흥밋거리로 여겼습니다. 원하는 이미지를 정확히 만들기는 힘들고, 결과도 꽤 조악했으니까요. 그런데 ‘NOVEL AI’의 등장으로 웹툰, 게임 원화가, 일러스트레이터 등 서브컬처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상황은 심각해졌어요. 이 분야의 화풍은 꽤 잘 모방하더군요. 물론 손처럼 정교한 신체 부위의 표현은 어색하지만 약간 수정하면 되는 수준이에요. 인간보다 빠르고 다양하게 기술을 익히는 AI가 곧 유명 작가들만큼 그리겠죠. AI에게 밥그릇을 빼앗길 수 있는 위기감을 느낄 때도 있었습니다만 예술의 범주에서 AI 작업물이 늘어나는 추세니 AI 작품 퀄리티와는 별개로 예술의 정의에 관한 이슈가 생긴 건 분명합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이수민도 단호히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실용음악이나 대중음악에서도 AI를 활용한 작곡이 활발해요. 저작권법이 엄격하지만 AI 작품 관련법은 애매한 부분이 많아 골머리를 앓더라고요. AI가 아마추어 일반인이 음악을 즐기고, 악기를 배우고 연주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건 고무적이지만 ‘로봇의 악기 연주’는 신기한 것 이상으로 평가받긴 어렵습니다.” 영화 저널리스트 민용준은 ‘상도덕’을 거론한다. “비평과 평론은 의견의 영역, 객관보다 주관의 영역이고 그 주관을 얼마나 객관적인 화술로 전달하느냐 하는 싸움입니다. 사고의 심도와 견해의 강직도가 깊고 강해야 하는데 결과물이 고유값이라기보다 평균값 산출에 가까운 AI의 논리구조상 ‘스스로 갖는 입장’이라는 것의 깊이를 함양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AI에게 평론가라는 직업을 부여한다면 본인의 말을 한다는 평론의 첫째 원칙에 완벽하게 위배되는 거죠. 속되게 말해 상도덕에 어긋나는 겁니다.”
뉴욕 가고시안 갤러리에 전시 중인 베넷 밀러의 AI 작품 〈무제〉 시리즈.
전반적으로 대체 불가능할 것 같다는 의견. 그렇다면 이들은, 예술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걸까? 무기명은 응수한다. “과거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사진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그림의 영역을 침범했다고 생각했어요. ‘사진은 예술인가?’가 화두였고요. AI가 카피라이터와 다른 창작 영역을 넘나드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혼란스럽고, 누군가는 경이롭겠죠. 하지만 자연이 만든 동굴도 우린 예술이라 하지 않습니까? AI와 창작은 이미 공존하는 단계이고, 이 흐름에서 중요한 과제는 창작자 스스로 주체성이 휩쓸리지 않도록 더욱 확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캐도 동의한다. “기술적인 부분은 AI가 대체할지라도 결국 누군가의 이름으로 작품이 나오려면 키워드를 입력하고, 생성 이미지를 선택하는 모든 과정에 작가가 관여해야 합니다. 체급으로 나뉘는 스포츠 경기처럼 AI를 얼만큼 활용하느냐에 따라 여러 AI 예술 장르의 개념이 정립되면 되는 것이지, 극단적으로 ‘예술로 받아들이냐 마느냐’ ‘공존이 가능한가 아닌가’로 논하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이수민은 논의에 수용자의 입장도 끌어온다. “당연히 창작에서 AI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인공지능과의 합작도 예술이 맞습니다만 중요한 건 감상자에게 납득 가능할 만한 수준이어야겠죠. 몇 년 전 〈2050년의 사계〉라는 공연에서 비발디의 ‘사계’ 음악 소스를 AI에 학습시키고 ‘2050년 지구가 환경오염으로 파괴됐을 때 어떤 사계가 탄생할지’ 실험한 적 있는데요. 성공적이었습니다. 관객 입장에서 이 정도 스케일과 유의미함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최신 기술을 접목했더라도 ‘신기함’ 이하 수준에 시간과 돈을 들여 보지 않을 것 같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뉴욕 가고시안 갤러리에 전시 중인 베넷 밀러의 AI 작품 〈무제〉 시리즈.
창작자들은 세상이 시끄럽게 떠드는 만큼 AI가 예술 영역을 대체할 수 있을지, 과연 위협이 될지 따위에 사실 크게 관심 없어 보였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AI의 도움을 받든, 아니든, 작품을 얼만큼 더 완성도 있게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것이며, 활용 방식의 문제보다 직업적인 마인드와 결과물의 수준, 도덕성이 더 큰 화두다. “기본적으로 AI 학습에 필요한 수많은 이미지는 인간이 공급하는데, 그 방대한 양 모두 허락받기 쉽지 않겠죠. 즉 AI 자체보단 AI를 학습시키는 과정에서 윤리적 문제가 발생합니다.” 장캐는 AI는 죄가 없다고 말했다. 이수민은 AI의 도덕성 문제에서 감상자의 마인드셋을 제안한다. “피카소가 ‘하수는 모방하고 고수는 훔친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뇌 속에 다양한 영감이 쌓이고 그들 사이 새로운 연결로 창작물이 탄생하는 것이니, AI가 딥 러닝을 통해 어떤 색 조합과 어떤 구도가 좋은지, 어떤 식으로 메시지를 담아야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지 그 구조를 파악해 최적의 창작물을 만드는 것도 인정해야죠. 그러니 이 ‘AI 광풍’의 흐름을 막을 수 없다면, 감상하고 평가하는 사람의 정립된 기준이 중요합니다. 모사꾼이 대가의 미술 작품을 똑같이 그려내더라도 그것은 위작일 뿐, 비슷하게 그려냈다고 비슷한 값을 매겨주지 않으니까요.” 민용준은 직업 윤리 또한 공고히 해야 함을 역설했다. “만약 평론가가 AI를 동원하거나 그것에 근거해 본인의 비평을 한다면, 그 내용은 면밀히 살펴봐야 될 것 같습니다. 그 평론에 진짜 그 사람의 독자성이 존재하는지 말이죠. 근본적으로 비평은 남의 것을 평하는 일인데, 남의 것을 이야기하는 주체가 온전한 본인이 아니라면, 비평으로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직업적 기본 원칙이 위배되는 거죠. 또 AI는 얼마나 면밀한 질문을 하는지, 얼마나 정교한 값을 넣는지에 따라 쓸모가 달라져요. 결국 AI라는 물성이 갖는 특징이 도덕적이냐 비윤리적이냐 하는 기준 또한 사람이 다루는 방식을 기준으로 나뉠 겁니다.”
어쩌면 애초에 질문 방향이 잘못된 것 같다. 사실 AI의 예술성을 인정할 것이냐 혹은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느냐는 이미 철지난 논의가 됐음이 분명하다. AI는 디자인에 포토샵 툴이 생기고, 드로잉에 아이패드가 생겼듯 그저 인간이 언젠가 자연스럽게 적응하고야 말 기술적 경향일 뿐. 그러니 이 시점에서 인간이 신경 써야 할 문제는 AI를 이겨 먹느냐, 동료가 되느냐가 아닌 창작자로서 존엄과 자존심, 도덕성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다움’은 창작의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시각과 관점, 책임감과 이타심 같은 인간적인 감정 그리고 ‘나는 어떤 창작자인가’를 끊임없이 고뇌하려는 태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