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두 얼굴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유에프오처럼 갑자기 나타난 녀석이 있다. 정말 무섭고 센 존재다. 실종 사건을 다룬 스릴러지만 어떤 공포 영화보다 소름끼친다. 이서 감독의 ‘사람을 찾습니다’가 바로 그 화제작이다. 이 폭탄 같은 영화는 올해 최고의 문제작이자 새로운 발견임에 틀림없다. 본격적으로 ‘사람을 찾습니다’에 접속할 두 가지 시선을 준비했다.::사람을 찾습니다, 이서, 최명수, 김규남, 슬라보예 지젝, 안티 크라이스트, 라스 폰 트리에, 봉준호, 마더, 라쇼몽, 엘르, elle.co.kr, 엣진:: | ::사람을 찾습니다,이서,최명수,김규남,슬라보예 지젝

는 인간성의 실종을 추적하는 영화다. 또한 권력 관계의 전복을 수행하는 스릴러다. 오프닝부터 참담한 광경이 목격된다. 부동산업자 원영(최명수)은 지적장애인 규남(김규남)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짐승처럼 부린다. 악덕업자 원영과 노예계약을 맺은 것처럼 규남은 그저 시키는 대로 개의 실종 전단지를 붙이며 생계를 이어간다. 언젠가부터 이 마을에선 강아지가 사라지는 사건이 이어졌고 급기야 사람마저 없어지기 시작한다. 에서 생명이 사라지는 사건은 그 대상의 의미를 묻는 ‘단절’로 기능한다. 누군가의 존재감은 항상 부재를 통해 부각되는 법이다. 일반적인 영화라면 실종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추적은 불가피한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타인의 부재가 남아있는 자들에게 어떤 추억도 일으키지 못한다면, 혹은 어떤 감정의 상실도 낳지 않는다면 어떨까? 모든 것이 소통의 부재 상태라면 말이다.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무엇을 찾게 만드는 원동력은 그런 과도한 결핍에 있다. 의 군상들은 어떤 모험조차 감행하지 않는다. 어떤 대상도 굳이 찾으려 나서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실종 사건의 원인을 추적해가는 스릴러의 문법을 차용하고 있지만 다른 노림수가 있다. 원영과 규남의 관계에 숨겨진 비밀이 서서히 밝혀지면서, 두 사람의 역학 관계에 내포되어 있는 폭력의 실체와 대면하게 만드는 것이 전략이다. 따라서 기존의 스릴러가 흔히 사용하는 추리적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종 사건이 벌어지고 사라진 대상은 오직 규남이 붙이는 전단지의 이미지 안으로 수렴될 뿐이다. 딱 한 번 경찰차가 등장하지만 이 역시 스릴러에서 의례 관습적으로 등장하는 것 이상의 기능도 하지 않는다. 중반부가 지나면 실종 사건의 범인이 규남으로 밝혀지기 때문에, 범인을 찾는 게임이나 서스펜스는 소멸하고 관객은 관찰자의 위치에서 규남의 행태를 쫓을 것을 제안받는다.이 과정에서 눈여겨볼 점은 원영과 규남의 폭력적인 관계를 묘사하는 방식에 있다. 언뜻 보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일방적이다. 규남은 원영의 권력에 복종하면서 그의 개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실체가 조금씩 벗겨지면서 힘의 논리를 재고하게 만든다. 원영은 억압된 욕망을 분출하기 위해 규남에게 폭력을 마구 휘두르며 사는 반면에 규남은 폐가에서 개와 함께 살며 무시와 굴욕적인 삶을 감내한다. 원영이 행사하는 압도적인 힘에 규남은 무기력하게 굴복하는 존재다.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고 착취와 차별을 당하는 규남은 분명 호모 사케르다(아감벤의 주장대로 사회에서 배제시키는 동시에 그 안에 포함시켜야 하는 궁극적인 주체는 항상 벌거벗은 생명이다). 그들에게 더 이상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영화는 주체의 공간 배치를 통해 그들의 관계에 대한 단선적인 판단을 서서히 뒤집는다. 원영은 주로 부동산이나 인애의 집, 가족의 집 등 한정된 실내 공간에서만 활동한다. 반면에 규남은 북한산이라는 압도적인 외부 공간을 주요 활동 영역으로 삼고 있다. 북한산은 규남에게 자유가 허락되고 잠재된 폭력성이 발현되는 공간이다. 억압된 내부 공간에서 개처럼 두들겨 맞지만, 북한산에서 마음대로 납치와 살인을 수행한다. 그는 편재성을 지닌 존재이자, 갑자기 화면 속에서 출몰하는 유령과도 같다. 그처럼 많은 공간을 부유하는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침묵으로 일관하며 공간을 떠돌다가 급기야는 원영의 지배력을 압도하는데 이르고야 만다. 또한 원영에게 항상 복종하는 모습으로 제시되었지만, 교묘하게 개(원영이 죽이라고 명령한 개를 죽이지 않는다)의 생계 유지를 위해 전단지를 붙이고 사료를 구입한다. 규남의 실체는 순종적인 피억업자가 아니라 자기만의 윤리를 지닌 존재다(그는 생명을 취사선택한다). 놀라운 점은 원영의 폭력을 받아들이는 건 단지 굴욕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의 일부이자 도착적인 증환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원영과 규남 사이에 적과의 동침이 가능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작동한다.그러나 귀신처럼 나타난 규남이 원영을 개목걸이로 살해하는 장면에서 이들의 계약은 완전히 파기된다. 권력의 전복이 완성되는 이 장면에서 원영은 오히려 회개하는 마음에 휩싸인다.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원영의 제스처가 규남에게 행사했던 폭력에 의해 무자비하게 좌절되는 모습을 통해 폭력의 끔찍한 순환 구조가 완성된다. 동시대 영화에서 드러나는 폭력의 양상과 비교해보면 이 영화의 폭력성에 대한 접근이 보다 명확해진다. 박찬욱 감독의 에서 폭력이 부조리한 코미디와 맞물려 거리두기를 시도한다면, 이서 감독의 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다양한 감정을 충돌시켜 극적인 감정을 휘발시킨다. 특히 슬픈 인애에게 엄습하는 죽음이 그렇다. 거꾸로 철봉에 매달려 눈물을 흘리던 인애는 곧 공포의 대상으로 부상한 규남과 부닥친다. 이 순간 그녀의 슬픔은 갑작스런 긴장감으로 싸늘하게 말라버린다. 박찬욱의 거리두기는 또 다른 형태로 수렴되어 현실적인 맥락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장르적 게임이나 판타지적인 차원에서 머무르는 반면에, 이서의 거리두기는 장르적인 틀 안에서도 철저하게 현실을 지각하고 있다. 자칫 현실에 인간적인 희망을 부여함으로써 폭력의 구조를 깨뜨릴 수 있는 구원의 여지를 남기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규남이 개를 보살피거나 자신을 놀리는 아이에게 폭력 대신 개 사료를 주는 장면에서 규남의 폭력성과 충돌하는 실존적 이면이 드러난다. 원조교제녀 다예가 원영에게 보여주는 호의와 후반부에 원영이 폭력에 스스로 염증을 느끼며 규남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모습이 그러하다. 분명 벗어날 수 없는 폭력의 순환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가능성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서 감독은 그런 인간적인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내재된 폭력의 고리를 끊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를 다시 혹독하게 확인하게 만든다. 자유가 주어졌음에도 개 사료집 주인에게 다시 자신을 의탁하는 규남의 비루한 모습은 이전과 유사한 주종 관계가 이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인간성’은 상실되고, 실종되고, 망각된다. 인간의 비극은 계속된다. 는 비인간성(inhuman)에 관한 도발적인 탐구다. 인간/비인간의 경계를 노골적으로 무너뜨리는 이서 감독의 도전은 뜻밖에도 올해 라스 폰 트리에나 봉준호 감독이 착수했던 작업과 맞물린다. 궁극적인 목표로 보자면 이 영화들 사이에 명확한 공통점은 없다. 굳이 말하자면 3편의 영화가 지닌 의미가 축소된 채, 영화제와 관객에게 과소평가를 받았다는 점에 있어서는 닮은꼴이다. 가 어떤 모양새인지 알기 위해선 2편의 영화를 슬며시 경유할 필요가 있다. 우선 트리에의 영화를 읽는 지젝의 방식에서 실마리를 찾아보자. 박찬욱의 가 깜짝 성기 노출에 그쳤다면 성기 절단의 미학으로 피의 제단에 올라선 는 오프닝부터 대담했다. 헨델의 오페라 중 잃어버린 자유를 탄식하는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를 장엄한 배경 음악으로 사용한다. “나를 울게 하소서. 비참한 나의 운명!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라고 노래하는 순간, 윌렘 데포와 샬롯 갱스부르는 목욕실에서 정열적인 오페라 포르노를 탄생시킨다. 그후에 일어나는 일련의 엽기적인 일들은 그만 “아마도 악마가!”를 외치게 만든다. 폭력과 함께 과도한 상징성이 넘쳐난다. 덕분에 트리에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화해불가의 영화는 아니다. 그의 실험성이 진보인가 타락인가 논하기 이전에, 트리에 영화에 대한 지젝의 분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일찍이 지젝은 “라스 폰 트리에는 자신의 여성 3부작(, , )에서 순수한 영혼 때문에 수난을 겪는 지극히 원형적인 여성 이미지를 통해, 그런 여자를 볼 때마다 우리 내면에서 자동적으로 움트는 동정심을 드러낸다. 이런 예술적 조작(manipulation)을 통해 그는 희생자의 고통을 통해 얻는 ‘외설적 쾌락’이라는 동정심의 이면을 폭로하고, 그럼으로써 우리 내면의 자기-만족을 교란한다.”고 평가한 바 있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외설적 쾌락’과 이에 대응한 ‘자기 만족의 교란’이다. 지젝의 논의대로 역시 외설적 쾌락과 내면의 교란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다. 이런 교란이 에도 숨겨져 있다는 사실은 결코 놀라운 것이 아니다. 이서의 세계에도 전략적 조작과 냉소가 존재한다. 제목만 놓고 보면 어딘가 안드레 세라노의 작품명 같다고 느껴지는 는 종교나 성상이나 여성성의 파괴에 그치지 않고, 숭고함의 가치 속에 깃든 폭력성이 무엇인가를 드러낸다. 이것은 분명 감정의 위선을 벗겨버리는 전략이다. 사실 는 그토록 잔인하지 않다. 몇 개의 가학적인 행위를 빼면 전체적으로 구역질을 동반하는 폭탄은 아니다. 그럼에도 관객들이 원초적으로 거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트리에는 샬롯의 아름다운 몸을 즐기도록 라블레식 난장 파티를 열어놓고, 정작 우리의 관음증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녀의 체모는 성애의 대상이 아니라 공포 그 자체로 부상한다. 이 처벌은 참으로 불편하다.이런 벗겨진 위선은 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서 감독은 “너무나 불편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대중과의 만남(혹은 영화적 타협)을 위해, 이 이야기를 스릴러 구조로 만들어야 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 스릴러 구조가 주는 공포감은 정말 대단하다. 규남은 분명 이방인이며 타자이다. 그는 트리에의 에 등장하는 다운증후군 아이들처럼 기괴하다. 외모만 놓고 본다면 의 서커스 일원 같은 존재다. 그는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불쌍한 존재로 간주되지만, 남몰래 수행한 작업(연쇄 살인)을 통해 결국 원영과의 권력 게임에서 승자가 된다. 이것은 제3세계가 제국주의와 싸워 이기는 방식처럼 전복적인 놀이를 표방한다. 다소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규남이 ‘개를 찾습니다’라고 쓴 전단지를 붙이는 (스릴러) 과정은 자연스럽게 봉준호 감독의 나 의 범인찾기 게임과 비교된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개를 찾는 과정은 아파트 주변에서 일어난다. 가장 일상적인 공간인 아파트를 판타지의 공간으로 승화시키는 봉준호의 미덕은 10년 만에 북한산의 약수터에서 또 다른 공포로 부활하고 있는 셈이다. 이서는 규남을 통해 백주(대낮)의 공포를 빚어낸다(도 한낮에 일상적인 공간 한강 공원에서 괴물이 등장한다). 사실 의 도준(원빈)을 떠올려보면 규남의 공포가 무엇인지 더 확실해 진다. 분노로 큰 돌을 던져 소녀를 죽인 도준은 집 난간에 시체를 걸어놓는다. 사실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살려달려는 도움의 메시지를 동네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이다. 여기서 섬뜩한 건 도준의 백치성이 아니다. 그의 요청을 제대로 읽어줄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에 직면한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무관심에 기반한다. 도준 대신 범인으로 잡힌 종팔의 얼굴(다운증후군)조차 그것을 입증한다. 엄마조차 없다면 이 사회에서 약자는 타자일 수밖에 없다(도준의 엄마는 종팔에게 “너 엄마 없어?”라는 질문을 던진다). 빨래처럼 널려있는 소녀의 시체가 주는 공포감은 놀랍지만, 안타깝게도 그 효과가 극대화되지 않는다. 이것은 원빈이란 존재 때문이다. 우리는 원빈의 아름다움에 더 끌린다(도준의 엄마에게 선물을 줄 때도 원빈의 웃음에 녹아든다). 그러나 는 그런 탈출구나 위안조차 없다. 미안하지만 규남은 원빈이 아니다.봉준호와 이서 감독의 스릴러는 공포보다는 내면의 얼굴에 집착한다. 이들은 각각 도준 엄마와 규남 캐릭터에 몰입을 방해한다. 그들을 철저하게 이방인으로 만들고, 자신만의 고통으로 홀로 서 있게 만든다. 관객은 의 ‘마더’ 김혜자에게 감동받을 준비를 하고 극장에 오지만, 엄마에게서 얻는 것은 희생이나 눈물이 아니다. 오직 그녀의 죄의식과 숨겨진 욕망만을 목격할 뿐이다. 어머니 신화는 양파처럼 벗겨지고 해체된(혹은 춤추는) 아줌마만 남는다. 쾌락과 카타르시스는 그녀만 획득할 수 있는 전유물이다. 규남의 경우도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지금껏 만났던 스릴러는 대부분 에서 보던 잭 니콜슨의 얼굴로 축약된다. 즉 평온한 인간의 얼굴 속에 잠재해 있는 악마적 사물과 만났던 것이다. 그러나 규남의 얼굴은 그렇지 않다. 추하지만 나름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규남이 폭력의 행위자로 나타날 때, 우리는 몹시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가면을 벗자 그 가면에 안에 똑같은 얼굴이 있는 것과도 같다. 트리에의 영화에서 여성의 희생성이 해체되는 것처럼, 우리가 규남에게 가졌던 동정심은 배반당하고 만다. 우리가 초래한 외설적 쾌락은 그렇게 북한산에서 난도질당한다(가 오프닝부터 영민의 망치질 몇 번으로 관객의 뇌를 마비시켰다면, 는 모질게 규남의 폭력적인 일상을 추적하며 윤리학의 문제를 상기시킨다).혹자들은 이런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가 난색을 표하겠지만, 이런 내면의 교란과 혼란이 없다면 결코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희생자의 고통이 휴머니즘으로 승화되는 영화는 라스 폰 트리에나 이서에게 거짓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 말로, 이서 감독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잔인한 무관심’을 냉철하게 고발할 수 있는 방법이다. 레비나스는 타인이 곧 희망이라고 노래했지만, 이 순간 타인의 얼굴은 공포이자 지옥이다. 이서가 를 만들면서 염두해 둔 영화는 이었다. 서구의 많은 영화 감독들이 존경을 표했던 에 그가 빠져든 것은 영화적 구조 때문이 아니다. 다양한 시점으로 서술되는 방식이나 스타일이 아니라, 진술할 때마다 변화하는 그들(캐릭터)의 얼굴 때문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본능적인 비굴함이 담겨 있었다. 타인에 대한 비안간성이 땀방울처럼 솟아났다. 이런 극도의 불편함을 를 통해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비인간적인 너무나 비인간적인 방식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