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이하 〈이상청〉)에서 연기한 국회의원 차정원이 팽길탄 목사와 붙는 옥상 신을 보며 꼭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평론가와 관계자가 〈이상청〉을 2021년 최고의 작품으로 꼽았어요
〈이상청〉은 재미있는 작품이죠. 영화 〈롱 리브 더 킹: 목포 영웅〉과 〈출사표〉, 얼마 전 공개된 〈지금 우리 학교는〉의 박 의원까지. 정치물을 연이어 한 다음에 들어온 국회의원 역할이라 처음에는 끌리지 않았어요. 그런데 차정원은 정치인으로 풀면 오류에 빠질 캐릭터였어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아쉬운 것 없이 자란 변신의 귀재. 그에게 정치인은 하나의 역할일 뿐 ‘나 이렇게 사는데 어때, 뭐 멋있잖아’ 하고 적당히 자신에게 취해 사는 것이 연예인과 다름없다고 생각했죠. 악역이라기에는 원칙도 명확해요. 자신의 기준에서 벗어나면 당 차원의 징계나 주변의 비난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죠.
정치적 라이벌인 이정은(김성령)의 젊은 보좌관 김수진(이학주)과 섹슈얼한 연출도 있습니다. 한국 드라마에서 보기 드문 장면이에요
정치할 때는 정치인 같다가도 밤의 여왕이 되고 싶으면 또 밤의 여왕이 되는 거죠. 윤성호 감독에게도 하고 싶은 대로 해보겠다고 말했어요. 화면에 잘 안 보이더라도 까만 망사 스타킹을 신고, 가죽 장갑도 만들어 끼기도 하고요. 보수당 의원이지만 개인의 삶을 만끽하는 자유로운 여자로 고루하지 않다는 걸 전달하고 싶었고, 생각보다 그런 매력을 봐준 분이 많았던 것 같아요.
4월 방영을 앞둔 〈왜 오수재인가〉에서는 공찬(황인엽)의 새엄마 지순옥 역할로 등장합니다. 〈구경이〉에서 이경이(김혜준)를 부모처럼 돌봤던 정연 역할이 떠오르기도 해요. 누군가를 향한 무한한 애정과 믿음을 어떻게 상상하는지
중범죄자의 얼굴이 공개될 때가 있잖아요. 그를 사랑하고 지지했던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그런 생각을 종종 했어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도 나오지만 죽어 나간 여자들 사진을 들이밀면서 말해도 내 남편, 내 애인이 연쇄 살인마라는 걸 바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정연은 느낌은 있지만 직면할 진실을 두려워하던 사람이죠. 구경이(이영애)가 “다 알고 있었잖아요.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할때조차 “우리 이경이 착한 애예요”라고 말하니까요. 그런데 친자식이었다면 정연도 뭐든 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내 자식이 아니기에 혹시라도 아이에게 내 한 마디, 행동 하나가 비수가 될까 봐 조심스러웠던 거죠.
이경이는 무차별하고 잔인한 살인마는 아니긴 해요. 나름 원칙이 있죠
그럼에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한 건 맞아요.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고 용서한다는 건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정수라, 이선희의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는 걸 좋아했어요. 전영록 씨처럼 가수와 연기를 넘나드는 사람을 보며 그런 재능을 부러워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피아노도 배우지 못하게 했던 집안 분위기에서 노래나 연기를 하겠다고 말할 수 없더라고요. 그러다가 ‘어차피 떨어질 거 젊을 때 시도라도 한번 해보자’라고 친구와 서울예대에 지원했는데, 덜컥 붙었어요. 부모님께는 다른 학교에 합격했다고 말하고 등록금을 받아 연기과에 입학했고요. 반년 뒤 들통났을 때는 말 그대로 집에서 쫓겨났죠. 찜질방을 전전하며 놀이터에서 밤을 새고, 아르바이트를 서너 개씩 하면서 20대를 보냈어요. 강렬하게 컸습니다(웃음).
그때만 해도 내가 지금까지 이 일을 하게 될지는 몰랐어요. 부모님이 반대하니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고 ‘이 길이 아니라는 걸 느끼면 다른 것 해야지, 돈 벌어야지’라는 생각을 다른 사람보다 빨리 했죠.
블랙 재킷은 Wooyoungmi. 이너 웨어로 입은 블랙 톱은 Mage. 데님 팬츠는 Happening. 슈즈는 Converse.
〈맘마미아〉 〈시카고〉 〈아이다〉 〈모차르트〉 등 2000년대 초중반 뮤지컬 배우로서 전성기를 구가한 시절을 돌아보면 어떤가요
좋은 작품 섭외가 0순위로 오고, 출연료도 높고, 주말 연속극 주인공이나 회사 계약 등 좋은 제안을 많이 받은 시기였죠. 누구나 한 번은 그렇게 일하는 시기가 있는 것 같아요. 다른 한편으로는 내 결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나는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더 연습하고 싶은데, 그럼 뭔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는 말도 틀린 건 아닌데 너무 목마르고 배고픈 거예요.
그렇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말고 더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물이 한번 확 넘쳐줬으면 좋겠는데 바로 밑에서 계속 찰랑찰랑거리기만 하는 느낌. 그런 중에 무대는 매일 서야 하니 매일 밤 괴로웠죠. 배우로서 잘 풀리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 안주하고 취할까 봐 또 두려웠고요. 당장 할 일이 많다 보니 몇 번은 그런 의심을 묵인하고 지나가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뮤지컬 무대를 아예 떠났어요. 2년 넘게.
다시 연극계에 갔을 때 사람들이 나를 썩 반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던 중 한 극단에서 준비 중인 워크숍 작품에 단원 외에 외부 인원을 영입하려고 하는데 같이 해보겠느냐고 제안하더라고요. 바로 수락했어요. 삶은 궁핍해졌지만 좋은 공부를 한 시기예요. 제작과 연출, 작가, 작곡가, 안무가 등 각자의 입장을 알게 됐죠. 그렇게 애써 만든 작품이 실제 공연으로 이어지지 않기도 해요. 그럼 의미 없는 일을 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아뇨, 내가 뭔가 했다면 그건 결코 사라지지 않아요.
지금은 뮤지컬과 연극, 드라마와 영화 장르 구분 없이 오가지만 처음으로 드라마에 출연했던 것은 2015년 〈용팔이〉를 통해서였어요
예전에는 내 것만 하기에도 바빴다면 다른 사람의 연기를 지켜보는 입장이 되면서 새로운 재미를 찾았어요. 누구의 이모, 엄마, 누나, 역할을 하게 된 시간도 소중하더라고요.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서운하다는 감정은 전혀 없었죠. 대충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오히려 지나가는 역할이라면 좀 더 섬세하게 뭐가 중요한지, 그 안에서 내게 기대되는 역할은 어느 정도인지 구분해야 합니다.
드라마 현장에서는 아무래도 젊은 배우들과 이야기 나눌 일이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들이 연기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도 하나요
그러기엔 드라마와 영화는 아직 제가 모르는 게 많아서요. 다만 실패해도 좋으니까 뭔가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면 한 번 함께 더 시도해 보자고 말할 때는 있어요. 막상 현장에 왔는데 세트를 비롯해 느낌이 달라서 준비한 걸 버리고 새로운 걸 만들어야 하거나, 준비해 온 여러 개 중 하나밖에 쓸 수 없을 때 순발력이 필요하거든요. 그때 배우들이 자유롭게 조율할 수 있어야지, 혼자 외운 것 그대로 연기하면 좋은 결과물이 나오기 어렵죠. 물론 상대방의 의사나 현장 상황도 고려해야 하지만요.
〈질투의 화신〉 때 조정석 씨랑 즉흥적으로 재미있는 걸 많이 했어요. 실제로 공효진 씨가 ‘빵’ 터진 장면이 그대로 방송에 나가기도 했죠. 최근 작품 중에서는 자기 색을 갖고 다부지게 연기해 온 분이 많았던 〈해피니스〉 현장이 매끄러웠어요. 누구 한 명이 운을 띄우면 모두 상황을 이해하고 의견을 내는 게 마치 연극 한 편을 만드는 기분이었죠.
실제로 〈해피니스〉는 드라마보다 연극처럼 느껴지는 요소가 있었어요. 좀비 바이러스로 아파트 라인 하나에 주민들이 갇힌 설정이다 보니 등장인물과 장소가 제한적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개인의 심리가 전달되려면 각자의 이유와 입장이 분명해야 해요. 어떻게 반응해야 이 장면이 살아날지, 가감없이 의견을 나눌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해피니스〉에서 오주형(백현진)과 함께 최대 ‘빌런’으로 꼽혔지만 오연옥의 욕망은 사실 엄청나지 않아요. 동 대표로 선출된 뒤 관련 업체들과 결탁해 한몫 잡겠다는 것이죠. 그런 인물의 어떤 부분에 몰입했나요
야심과 함께 얕은 꿍꿍이가 드러나는 게 연옥의 딜레마죠(웃음). 악당이고 이상한 여자라 해도 현장에서 계속 그런 연기를 하면 긴장감이 없어져요. 사이코패스가 무서운 건 평범해 보였던 사람이 일반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기 때문이잖아요. 그걸 보여주기 좋은 인물이라는 게 연옥의 매력이었어요. 내가 하는 일이 다 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것인 척하는 양면성이 더 혐오스럽게 보이면 좋겠다 싶었죠. 제가 혼자 상상한 연옥의 과거는 미국 한인타운에서든 교회에서든 상습적으로 사기 치다가 한국에 온 부부 사기단이에요. 주민 전용 헬스장에서 신약을 팔았던 헬스 트레이너와는 누나 동생하며 자잘한 범죄를 저지르다 같이 마약을 했을 수도 있고요. 그런 맥락을 만들어두면 트레이너와 연옥 사이에 뭔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주민들 앞에서는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하다가 둘만 있을 때는 돌변해 거친 욕을 내뱉는 장면이 한결 생생해지고, 보는 이들도 이 관계에 대해 상상할 수 있게 되죠.
무대 위 연기와 카메라 앞에서 하는 연기는 각각 어떤 부분이 재미있거나 어렵게 느껴지나요
현장에서 부딪히는 생생한 에너지와 호흡을 전할 수는 없지만, 대신 클로즈업 등을 통해 미세한 표정을 보일 수 있다는 게 매체 연기의 장점이에요. 드라마와 영화를 한 지 이제 5년 조금 되다 보니 카메라를 코앞에 두고 편안하게 생각하는 배우들이 대단하게 느껴져요. 현장에서는 그냥 괜찮은 정도였던 것 같은데, 화면으로 봤을 때 더 좋은 연기도 있고요. 그건 경험도 경험이지만 감각적으로 타고난 것이라 생각해요. 아마 저는 평생 못할 연기일지도요.
남의 인생은 공짜로 살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배역을 하나 맡으면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만나서 물어보고, 직접 경험도 하고 자료도 찾아보며 내가 할 역할을 만들어내는 게 그동안 인생의 즐거움이었다면 지난해부터는 그 중심을 조금씩 옮기고 있어요. 행복하게 사랑하며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건 호흡과 균형감이더라고요.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있고 싶은 상태, 하고 싶은 일의 개수를 늘이는 거죠. 뭘 먹거나 어딘가에 가고 싶다면 언제고 반나절이라도 시간을 내어 내게 꼭 해주려고요.
명성이 생기고, 기대치가 높아지면 뭐든 점점 어려워져요. 그런데 난 지금 까불어도 되는 시기예요. 최근 연이어 했던 작품들이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좋은 작품에 참여할 수 있었던 운이 좋았던 거지 누가 해도 나 이상은 해냈을 거예요. 내가 야구 선수인데 오늘 타율이 저조하면 속은 상하지만, 그래도 그 경기에서 우리 팀이 이기면 좋은 거잖아요. 홈런을 날리진 못했지만 평균 타율은 해냈고 경기도 이겼다면 그건 진짜 잘된 거고요. 내가 뭘 대단하게 해내야 한다는 것도 오만이고, 그냥 실력만큼 최선을 다하면 돼요. 그래도 대세에 지장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