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변화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직업인데 그동안 일하느라 낮에 집에 머물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해가 기울면서 집 안 곳곳을 채운 오후의 빛을 느낄 틈도 없었어요. 이번 기회에 담아볼 수 있었어요.
한남동 유엔빌리지에 있어요. 이사온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넓지 않은 주거지역이라 조용하고 한적한 게 맘에 들어요.
특별할 것 없는 3층짜리 빌라인데, 유독 3층 층고가 높아요. 그 점이 좋았어요. 서울에서 이 정도로 층고 높은 집을 찾기가 쉽지 않잖아요. 일터인 스튜디오는 대부분 층고가 높고 탁 트인 공간이에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일반적인 거주공간이 가진 층고에 답답함을 많이 느꼈어요. 사실 메자닌(중이층) 외에는 이 집에 특별한 공간이 없어요. 처음부터 그저 갤러리의 화이트 큐브처럼 비어 있는 공간이었으면 했죠. 온종일 해가 드는 집에 살며 거대한 흰 벽에 빛이 짧게 길게 드리워지고 색이 변하는 장면을 보고 싶다고 늘 생각했는데 이제 이뤘어요.
제 스튜디오 공간을 디자인해 준 공간 디자이너 조현석에게 집도 부탁했는데 처음에는 거절당했어요. 주거 공간은 작업해 본 적 없고 공간을 바라보는 자신의 군더더기 없는 관점이 누군가의 집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집은 어떠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우고 봐달라며 설득했죠. 벽과 벽이 만나는 선을 처리하는 조현석 특유의 감각을 좋아합니다.
요즘은 언제, 집의 어떤 공간에서 무엇을 할 때 가장 큰 만족감을 느끼나요
해가 지기 직전 한 시간 정도 집 안에 드는 빛이 거실 창을 통해 들어와 반대쪽 주방까지 닿아요. 공간 전체를 채우는 낮고 진한 오렌지빛 속에서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들을 때 정말 기분이 좋아요.
소파와 오디오가 놓여진 거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의 대부분은 늦은 밤이에요. 가만히 앉아 빈 벽을 보며 음악을 들어요. 적당히, 집중해서, 멍하니. 업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있을 때는 모든 걸 멈추고 긴장을 풀고 싶거든요. 생각을 멈추고 눈도 쉬고 싶은데 그런 게 쉽지 않은 성격이라 노력 중이에요. 집에서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는 단 한 시간이라도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지려 해요. 거실과 연결된 크지 않은 방을 서재로 만들었고, 주로 이른 오전에 그 방에 들어가요. 책도 들춰보고 생각도 정리합니다. 서재에 놓인 모든 가구는 새로 사지 않고 스튜디오 사무실에서 오래 쓰던 USM 책상과 책장을 가져와 그대로 쓰고 있어요.
윤형근 선생님의 작품. 처음 선생님의 작품을 알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큰 영감과 위안을 얻고 있어요.
원래는 복층 공간을 없애고 층고가 더 높게 이어지도록 하려 했어요. 그런데 마감재들을 철거하고 보니 전체 구조를 지탱하는 보가 지나고 있어서 불가능했죠. 조현석 소장님의 아이디어로 복층을 살리는 대신 가로로 지나가는 보의 콘트리트 물성을 노출하고 거푸집으로 새 계단을 만들었어요. 거친 느낌의 계단이 주거 공간에 놓이니 새롭고 좋습니다.
사진가로서 지닌 감각이 공간에 대한 관점으로 이어져 이 집에 반영된 부분이 있다면
빛이 만들어내는 색과 모양을 많이 생각했어요.
최근 구매 리스트 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소비는
챕터 원의 3시터 패브릭 소파. 가격도 합리적이고 차가울 수 있는 집 안 분위기를 이 소파가 데워주죠. 그리고 참 편해요. 요즘엔 특히 물건을 살 때 충동적으로 사지 않으려고 신경쓰고 있어요. 오래 생각하고 맘에 남는 것만 곁에 두자는 주의죠. 아무래도 오랜 기간 살아남은, 그래서 클래식이 된 디자이너의 작품이 그런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