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 소녀도 K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엘르보이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SOCIETY

아프간 소녀도 K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엘르보이스

세계적인 콘텐츠 속에서 한국인의 존재는 커졌다. 그런데 우리 내면은 어떨까? #오징어게임

이마루 BY 이마루 2021.11.10
미드 속 산드라 오와 K드라마의 아프간 소녀 


늦은 여름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체어 The Chair〉를 드디어 봤다. 한국 OTT 콘텐츠의 인기가 폭발하는 지금, 한국계 캐너디언 배우 산드라 오 얘기를 빼놓을 수 없으니까. 이 드라마의 제작자이자 작가인 아만다 피트는 처음부터 주인공 역에 산드라 오를 염두에 두고 각본을 썼다고 한다.

 
우리의 오미주 씨, 산드라 오가 연기한 한국인 ‘김지윤’ 교수는 유색 인종 최초로 미국 명문대 영문학과 학과장(Chair)에 오른다. 그러나 상황은 풍전등화다. 어렵사리 맡은 영문학과의 위기는 미국 인문학, 아니 서양 사회 전체의 위기를 상징한다. 대학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교원을 둘러싼 성차별과 인종차별, 한부모가족과 유색 인종의 입양 문제, 백인 남성의 특권 등을 정면으로 다룬다. 삐걱대며 바람 잘 날 없는 이 영문학과는 위에 열거한 껄끄러운 다양성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미국의 미래는 없다고 온몸으로 경고하는 축소판인 셈이다. 그런데 한국인에겐 익숙한 풍경이 많다. 산드라는 어설픈 영어 이름이 아니라 ‘김지윤’이라는 온전한 한국 이름으로 등장한다. 워킹 맘인 그녀는 한국인 아버지에게 종종 아이를 맡기는데, 집 안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고, 아버지와 한국어를 섞어 대화한다. 싱글 맘인 그녀가 입양한 딸은 라틴과 필리핀 계열, 즉 ‘Latinx( 라틴계를 뜻하는 성별 중립적인 표현)’로, 가족 행사 장면을 통해 한국식 돌잡이 문화도 비중 있게 다룬다. 중요한 건 이 모든 장면이 산드라 오가 주장해서 넣은 설정이란 점. 산드라는 평생 고군분투해서 지켜온 인종 및 성적 다양성을 반영하면서도 한국인에 대한 과장이나 왜곡 없이 한 인간이자 여성으로서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이 드라마에서 한국 여성으로서 존재감을 빛낼 뿐 아니라 전 세계에 민족적·젠더적 다양성을 전하는 ‘찐’ 스토리텔러로 거듭난 것이다.
 
그녀의 연기 인생 30년은 ‘보이지 않는 쪽’에서 ‘보이는 쪽’으로 나오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리고 2018년 〈킬링 이브〉에서 처음으로 주연 ‘이브’를 맡았다. 또 이 역으로 2019년 아시아인 최초의 골든글로브 TV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을 받은 〈그레이 아나토미〉(2005~2014) 이후 에미상 후보에 다섯 번이나 올랐으면서도 처음 따낸 주연이었다. 〈기생충〉 통역사 샤론 최와 〈킬링 이브〉에 대해 나눈 왓챠와의 인터뷰엔 그녀의 고된 인생이 훤히 녹아 있다.
 
“첫 화 대본을 읽었을 때 어떤 역할을 제안한 것인 줄 몰랐어요. 보다 못한 매니저가 ‘주인공 이브 역할이라고!’ 말했을 때 내가 어떻게 그걸 놓쳤을까 싶더군요. 개인적으로 굉장히 가슴 아픈 순간인데, 제 커리어가 통틀어 그랬어요. 이런 큰 고통을 안고 살아요. 보이지 않는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은 제 말을 이해할 거예요. 인종차별이 얼마나 깊이 내면화됐는지.”
 
그는 한국인, 즉 동양인의 얼굴이 더 보일 수 있도록, 아니 보이는 것뿐 아니라 주인공이 되어 스토리텔러가 될 수 있도록 멈추지 않고 길을 걸어왔다. 할리우드 문화에 동양인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 게 사람들의 심리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킬링 이브〉 시즌 3는 산드라 오의 제안으로 이브가 유럽 최대 한인 타인인 영국 런던의 뉴몰든 한국 식당에서 만두를 빚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런데도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오스카도 로컬일 뿐이야(It’s very local)”라고 했을 때 한 방 얻어맞았다. “인생에서 한 번도 소수자인 적이 없던 한국 남자가 무대 위에서 그런 세련된 공격을 하는 순간이 제게 필요했어요. 그는 ‘막(layer)’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의 시선은 자유로워요. 전 그런 시선으로 결코 보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산드라는 “커리어에서 내가 어떤 변화를 일으킨 한편 어떤 것을 놓쳤는지,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부분을 알게 됐고 내 한계에 끝없는 부끄러움을 느낀다”고도 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부당하다. 그녀는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좀 더 씩씩한 역할을 맡고자 맨처음 주어진 역을 거절했으며,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자 촬영을 거부하며 배우로서 권리를 지키는 데 앞장섰다. 한마디로 그녀는 젠더의 한계를 얘기하는 ‘유리 천장’에 더해 인종의 한계를 의미하는 ‘대나무 천장’까지 한꺼번에 격파하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킬링 이브〉에서 호흡을 맞춘 서양 배우들이 그녀를 여전히 차별하고 있다는 사진과 루머가 넷상에 돌고 있다. 그래서 이젠 그녀가 한국에 던지는 다양성에 관한 질문에 우리가 답해야 한다. 우리는 산드라뿐 아니라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나 2022년 애플TV를 통해 드라마로 공개될 이민진 작가의 원작 〈파친코〉 덕에 서양에 한국을 더 잘 ‘보일’ 수 있지 않았든가. 우리도 달라져야 할 때다. 그리고 우리가 과연 어디까지 달라질 수 있을지 상상하는 것은 영화 유튜버 스탠리가 던진 다음 질문으로 판가름할 수 있을지 모른다. “올해 구출돼 한국에 온 아프가니스탄 소녀가 30년 후 한국 명문 사립대 국문과 학과장이 되는 드라마를 만들 수 있을까?”
 
지금 당장 갈 길은 멀어 보이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공평하거나 쉽지 않아서 인생은 더 재밌다”는 무시무시한 어록을 남긴 올해 50세 된 이 유쾌한 스토리 구루, 산드라 오는 명상에서 해답을 찾으라고 권한다. 코로나19로 내면을 깊게 탐색할 시간이 많아진 우리에게 그녀는 내면이야말로 진정한 ‘체어’이며, 그녀를 지켜주는 위엄이라고 말한다. 거부할 수 없는 이 말에 우리는 우리 또한 달라질 것을 약속하며 이렇게 외칠 수밖에. “또! 오! 산드라!”
 
이원진 〈니체〉를 번역하고, 〈블랙 미러로 철학하기〉를 썼다. 현재 연세대학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철학이 세상을 해독하는 가장 좋은 코드라고 믿는 워킹 맘이다. 


‘ELLE Voice’는 매달 여성이 바라본 세상을 여성의 목소리로 전하고자 합니다. 뮤지션 김사월 , 최지은 작가 등 각자의 명확한 시선을 가진 여성들의 글이 게재될 12월호도 기대해 주세요.
 
팝업 닫기

로그인

가입한 '개인 이메일 아이디' 혹은 가입 시 사용한
'카카오톡, 네이버 아이디'로 로그인이 가능합니다

'개인 이메일'로 로그인하기

OR

SNS 계정으로 허스트중앙 사이트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회원이 아니신가요? SIGN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