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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 의자는 굴욕 의자가 아니다 #ELLE보이스

굴욕도, 수치도 없이 산부인과에 가자.

BYELLE2021.03.24
“그게 뭔지 알아요?” 산부인과 의사가 물었다.  나는 산부인과 진료 의자에 앉아 있었다. 검진 결과가 나온 뒤 자궁경부암 예방 백신을 맞고 싶다고 말했더니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나는 질문이 이해되지 않아 되물었다. “HPV(인유두종 바이러스) 때문에 생기는 자궁경부암을 예방하는 백신요?” 의사가 답했다. “잘 알고 있네요.” 마흔을 목전에 두고 자궁경부암 예방 백신이 무엇인지 아느냐는 질문을 받은 나는 또다시 묻고 싶어졌다. 박보검도 아는데, 제가 그걸 모를까요?
 
드라마 〈청춘기록〉에서 박보검이 연기한 캐릭터와 그의 남성 친구들이 자궁경부암 예방 백신을 맞는 장면이 등장한 것은 이미 지난가을 일이다. 자궁이 없는 사람에게도 백신 접종이 필요하다는 정보를 준, 건강한 성 문화를 위한 노력이 돋보이는 장면이라는 기사를 보며 ‘당연한 이야기를 했구나’ 하며 넘겼다. 하지만 백신을 1차로 맞고 친구들에게 소식을 공유하며 대화하고 나서야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자궁경부암 백신이 정확히 뭔지, 이 백신이 어떤 방식으로 암이라는 병을 예방하는지 모르는 여성 친구가 너무 많았다. 이 백신의 존재조차 모르는 이성 파트너도 많다고 했다. 남자가 자궁경부암 예방 백신을 맞는 장면은 21세기 한국 드라마에 필수 반복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백신 주사를 맞고 뻐근해진 팔뚝을 문지르면서 비로소 의사의 질문이 의미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은 무시가 아니라 확인이었다. 순결 교육에 가까운 성교육을 받고 자라난 세대이니 큰 불편이 없어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면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나 역시 20대 시절 염증 때문에 산부인과에 방문했을 때, 당시 진료 의사가 백신 접종을 권유하지 않았더라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자궁경부암은 주로 바이러스를 보유한 상대와의 성관계를 통해 발생할 수 있다는 것, 성관계 경험 이전에 백신을 맞으면 좋지만 이후에도 접종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후 여성 질환 때문에 병원을 찾을 때마다 자궁경부암 백신, 자궁경부암 정기검진, 성병 검사로 알려진 STD 검사, 생리전증후군과 생리통에 대해 틈틈이 물어보았고, 관련 책을 읽고 자료를 찾아보면서 여성인 내 몸에 대한 데이터를 쌓아갔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내 몸에서도, 특히 호르몬과 여성 질환에 대해 알아보고 공부한 이유는 내 몸의 변화와 성생활에 내재한 위험성을 가르쳐주는 곳은 없는데 여성 질환의 위협은 실질적이었기 때문이다. 학생 신분으로 부담스러웠던 가격 탓에 백신 접종을 미루고 유방과 자궁의 혹을 차례로 떼어낸 10여 년 사이에 수많은 기혼·미혼·비혼의 지인이 자궁근종 제거 수술을 하고, 자궁과 유방 관련 질환을 겪었다. 친구들은 모두 입을 모아 산부인과에 조금 더 빨리 갈 걸 그랬다고 말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 일이 없어도 산부인과 가기’ 캠페인이라도 시작해야 하는 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결혼과 출산 유무와 상관없이 내 주변 30대 여성 중 대부분이 심각한 생리통과 배란통, 생리전증후군 중 최소한 한 개 이상의 증상을 매달 겪고 있다. 자궁이나 유방에 양성 근종이 없는 경우도 매우 드물다. 하지만 2021년에도 여전히 산부인과 진료는 ‘굴욕 의자’로 지칭되는 진료 의자의 이미지 어디쯤에 놓여 있다. 물론 산부인과에서조차 내가 겪는 여성 질환을 ‘스트레스 때문’이거나 ‘원인을 알 수 없다’고 일축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의료를 포함해 16가지 영역에 걸쳐 남성 기준으로 축적된 데이터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 책 〈보이지 않는 여자들〉에 따르면 여성의 몸이야말로 대표적 데이터 공백 공간이다.  그러나 산부인과에 가지 않으면 현재 수준의 정보에도 소외되게 된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내 몸의 변화를 늦게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임신과 출산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고 해서 산부인과 찾기를 꺼리면 나 자신이 데이터 공백이 된다. 자궁은 호르몬의 영향으로 출혈이 있는 변화를 매달 겪는 장기다. 질 또한 스트레스와 몸의 상태 변화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며 건강의 위험 신호를 감지하는 몸의 한 부분이다. 내 몸이 외적으로 어떻게 보이는지, 굴곡과 무게를 관리하는 것에 갇히다 보면 보이지 않는 몸 안의 변화에 둔해진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 여성의 건강을 위협한다.
 
주변의 여성에게 산부인과에 가자는 말을 건네는 것은 일상에 즉각적이며 유용한 변화를 선물하는 일이다. 내가 간다면 나에게 주는 선물이 된다. 나는 나에게 주던 크리스마스 선물 대신 백신을 선택했다.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전에, 먼저 산부인과에 가자. 가서 굴욕 의자가 아닌 진료 의자에 앉아 내 몸의 상태를 점검한 뒤 문제가 없다면 안심하고, 치료해야 할 변화가 있으면 하루라도 빨리 치료에 돌입하자. 모르는 것은 물어보고, 필요한 진료나 검진을 확인하자. 홀수 연도 출생자라면 올해가 국가가 제공하는 자궁경부암 무료 검진의 해라는 것도 꼭 기억하길 바란다. 굴욕도, 수치도 없이 산부인과에 가자.
 
윤이나 칼럼과 에세이, 드라마 등 거의 모든 장르의 글을 쓰고 여러 권의 책을 냈다. 콘텐츠 팀 헤이메이트 멤버로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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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이마루
  • 사진 UNSPLASH
  • 디자인 임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