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가 71분짜리 영화제 버전을 거쳐 최종 86분 러닝 타임으로 개봉했다 영화를 찍는 과정에서 계속 내용이 추가됐다. 영화제 이후 넥슨 쪽으로부터 유저 간담회를 제안받은 것처럼 말이다. 사실 처음에는 넥슨 관계자 게임 개발자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2000년대 초반 잠깐 인기를 끌었다가 버려진 ‘일랜시아’라는 게임을 지금도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 그 추억을 영상으로 남기려고 시작한 건데 촬영하다 보니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이유가 현실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이를 통해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 촬영을 이어갔다.
‘일랜시아’에 계속 접속하는 이유에 대한 답변 중에서 공감 가는 부분이 있었나 모든 사람에게서 나와 같은 이유를 하나씩 찾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이 게임 안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계속한다’는 것, 규칙적으로 ‘매크로’를 돌리면서 레벨을 쌓을 때 생겨나는 성취감에 특히 공감했다.
영화 중반까지는 현실에 대한 결핍 때문에 게임을 한다는 무기력한 정서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악성 버그를 만든 유저에게 분노하고, 직접 유저 상담실에 다녀오면서 분위기가 전환된다 처음에는 게임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끝까지 이야기를 확장시키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일랜시아’는 이미 운영진 없이 방치된 지 오래였기 때문에 다들 웬만한 불편은 감수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게임에서 튕겨 나가는 ‘팅버그’까지 나오니 정말로 이 게임이 없어질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더라. 뭐라도 해보는 게 후회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영화까지 만들게 됐다.
어린 시절부터 애정을 쏟았던 게임을 직접 나서서 지켜냈다. 이런 경험이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예전에는 부당한 일을 봐도 한탄만 했다면, 지금은 움직이면 어떤 변화가 생긴다는 희망이 생겼다. 불평등과 차별, 높아지는 자살률 등. 상황이 계속 안 좋아지고 있으니까.
현실도 그렇지만 게임 생태계도 균형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다. 돈을 많이 쓰는 유저가 성공하기 쉽고, 유저들도 옳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편법을 쓰기도 한다 현실에서 지연과 혈연, 학벌 같은 ‘버프’를 매크로에 비유하고 싶다.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에 빠진 거다. 매크로는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배급되지만, 이 또한 고급 매크로와 일반 매크로로 갈린다. 결국 여기에서도 어떤 격차가 생기는 것이다.
‘여성 게이머’로서 느끼는 불편함이나 비뚤어진 시선을 경험한 적 있나 적어도 ‘일랜시아’ 내에서 그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예전처럼 남성 유저가 많고, 폭력적인 게임이 많을 때는 성별 관념이 존재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게임 안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니까.
영화 속에는 게임 ‘일랜시아’의 길드 마스터, ‘내언니전지현’으로서의 정체성만이 보인다. 원래 어떤 사람인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영화를 촬영했는데,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영화학과에 가게 됐다. 게임은 지금도 내 관심사고, 게임 영상을 편집하는 것도 좋아한다. ‘바람의 나라’ ‘테일즈 위버’ ‘마비노기’ 같은 고전 RPG를 주로 했고, 최신 게임은 유튜브 최신 게임 영상을 보면서 막연히 언젠가 해보겠다고 생각하는 정도다.
넥슨의 게임 개발자를 만났을 때 어땠나 “당시의 넥슨은 자유로운 게임을 많이 시도했고, 해보고 싶은 게임을 만든 것이 ‘일랜시아’였다”는데 그게 우리가 계속 이 게임을 하는 이유와 일치하더라. 이런 마음으로 만든 게임이기 때문에 2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이 이 게임을 하고 있구나 싶어 감동받았다. 어떻게 보면 갈수록 매출과 경쟁 위주로 가고 커뮤니티가 축소되는 지금의 게임 업계도 현실이 반영된 것 같다.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예전에 순수하게, 비교적 평등하고 자유로웠던 시절을 모두 그리워한다고 생각한다. 관객들이 ‘내 일랜시아는 자유로운 곳이었다’ ‘편하게 마음 놓을 수 있는 곳이었다’ 같은 말을 해주는 게 뜻깊었다. 우리는 게임에 숨어서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게임을 하면서도 각자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것, 그런 면들이 아직도 덜 이해받는 것 같아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