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우리에게도 정치 히어로가 있다 #ELLE보이스

혼자 달릴 때 나의 호흡, 계절을 견뎌내는 나무의 지혜, 젊은 여성 정치인들의 당찬 걸음... 우리가 귀 기울이고 느껴야 할 것으로 가득한 세상의 단면을 여성의 시각으로 전합니다.

BYELLE2020.11.09
 
뒤늦게 드라마 〈출사표〉를 보았다. 지난여름 KBS에서 방영된 이 16부작 드라마의 주인공은 취준생 구세라(나나)다. 어렵게 얻은 직장에서는 허무할 만큼 쉽게 잘리고, 정규직 직장에 취업하는 일은 복권 당첨만큼이나 어려운 현실에서 고통받던 이 20대 여성은 ‘하라는 취업은 안 하고’ 구의원 자리에 출사표를 내민다. 가진 거라고는 동네 민원왕 경력과 친구뿐인 이 청춘에게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할 리 없다. 하지만 구세라는 세상이 지금보다 나은 곳이어야 한다는 믿음을 잃지 않고 더디지만 굳세게 나아간다. 구태 정치와 맞서고, 정치와 뒤얽힌 비리를 파헤치며,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들 곁에 선다. 때로 느리고 답답하게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서도, 권력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기 위해 포기하지 않는 구세라를 보면서, 그런 정치인이 현실에 없는 것을 알면서도 자주 울컥했다.

 
그런데 잠깐, 그런 정치인이 정말 현실에 없을까? 정의당 지도부의 이·취임식이 있었던 10월, 배복주 의원은 공식 SNS 계정에 사진 한 장을 올렸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배복주 의원 옆에 장혜영·류호정 의원이 나란히 서 있었다. 현충원 참배 직전 배복주 의원의 휠체어가 계단에서 막혀 올라가지 못하자 두 의원 역시 계단을 오르지 않고 배복주 의원과 같은 자리에 선 것이다. 그 사진을 보면서 나는 의미를 알기도 전에 울컥했고, 울컥한 뒤에야 구세라를 떠올렸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말하고, 관행이라는 이름의 구태를 용납하지 않고, 동료 시민의 곁에 서는 정치인, 그러니까 현실의 구세라들이 거기 있었다.
 
드라마가 한창 방영 중이던 지난 7월, 장혜영 의원과 류호정 의원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망 당시 피해자를 먼저 생각해 조문을 가지 않겠다는 소신을 밝히고 실행에 옮겼다. 인간의 도리 운운하는 거센 비난에도 두 초선 의원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기성 여성 정치인마저 유력 대선주자였던 정치인의 이름 앞에서 머뭇거리는 동안 20대와 30대인 두 여성 의원은 “어떤 자살은 최종적인 의미의 가해”라는 정세랑 작가의 문장을 빌려 사회와 정치계에 항의하던 여성 시민의 편에 주저 없이 섰다. 국회 안의 누군가가, 다른 누구도 아닌 30대 비혼 무주택 노동자 여성인 나를 대표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믿음이 싹튼 것은 아마도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두 의원은 지금도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의 싸움을 하고 있다. 장혜영 의원은 차별금지법 대표 발의에 부쳐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누구나 ‘안전하고 존엄하게’ 맞이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류호정 의원은 국정감사 첫날, 삼성전자의 중소기업 기술 탈취와 관련한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증인 채택이 철회되자 “어떤 관행도 용납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항의했다. 두 의원은 ‘낙태죄’와 관련한 퇴행적 입법안이 예고되자마자 전면 폐지를 위한 법안에 이름을 올렸고, 국정감사에서는 노동자들의 안전, 성소수자와 장애인의 인권, 기후 위기에 관한 질의를 이어가고 있다. 무지개 마스크를 쓰고 미래를 위한 싸움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세상이 원피스를 물고 늘어지거나 말거나, 누군가는 국회 문을 활짝 열어준 대기업의 뻔한 핑계에 “말장난하지 말라”고 일갈하면서.
 
“유비만 포기를 안 했어. 약한 사람들이 도와달라고 찾아왔을 때, 다들 나쁜 놈이 쫓아오니까 빨리 도망가야 한다고 했는데 유비만 같이 가야 한다고 했어.” 제목을 포함한 여러 설정을 〈삼국지〉에서 빌려온 〈출사표〉에서 지쳐 포기하고 싶어진 주인공을 다시 일으키는 대사는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더 강하고, 더 지혜롭고, 더 큰 부를 가지고 있고, 더 많은 지지를 받는 인물이 아닌, 유비가 주인공이라고. 무엇보다 주인공은 누워만 있으면 안 되고 발로 뛰어야 한다고. 그렇다면 21대 국회의 주인공은 류호정이고, 장혜영이다. 그들이 그저 젊어서도, 나와 같은 성별을 가져서도 아니고, 그들이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믿으며 세상을 바꾸기 위해 낯설게, 새롭게, 살아 움직이는 정치를 하기 때문이다.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약한 사람들과 같이 가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상처가 어떤 혐오도 방해도 없이 기억되고, 선한 사람들이 마침내 승리한다는 점에서 〈출사표〉는 판타지다. 하지만 매일 나빠지는 세상에서 각자도생 구호가 난무하는 동안에도 정치의 의미를 거듭 고민하는 정치인들의 싸움은 현실이다. 무작정 진영에 따라 정치인의 팬과 안티가 돼서도 안 되지만, 찾아보지도 않고 제대로 일하는 정치인이 없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정치인들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정치 혐오의 뒤, 새로운 시대의 젊은 여성 정치인들이 포기하지 않고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현실에서 구세라를 찾았고, 시민으로서 그들을 지지하고 응원하고, 또 믿어보기로 했다. 서로를 혐오하고 탓하기 쉬운 재난의 시기에 차별하지 않을 것, 인간의 존엄을 우선할 것, 여성 문제를 나중으로 미루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정치인이 우리에게도 있다. 우리가 이들을 응원하는 동시에 감시하는 데 게으르지 않는다면, 세상이 나아지지 않더라도 나빠지는 속도를 더디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라는 취업은 안 하고’ 내가 사는 세상을 바꿔보길 선택한 구세라처럼. 세상은 누군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는 사람에 의해 바뀌는 법이니까.
 
윤이나_칼럼과 에세이, 드라마 등 거의 모든 장르의 글을 쓰고 여러 권의 책을 냈다. 콘텐츠 팀 헤이메이트 멤버로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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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이마루
  • 디자인 정혜림
  • 기사등록 온세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