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패션 에디터의 미니멀 라이프 예찬론

사치의 시대가 가고, 가치의 시대가 온다.

BYELLE2020.10.20
사진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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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이 이것밖에 없어?” 집에 놀러 온 지인들이 입을 모아 놀라운 기색을 내비친다. 내 작은 공간을 거쳐간 모든 이들은 ‘패션 에디터’라는 직업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단출한 양의 옷에 호기심 반, 놀라움 반이 섞인 반응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양문형 옷장 한 개와 네 칸짜리 서랍 하나가 내 모든 속옷과 사계절 옷을 충분히 수납하고 있으니까. 
여기에 ‘특별한 경우’를 대비해 각종 수영복을 비롯한 휴가용 아이템으로 채운 박스 하나가 내가 소유한 옷의 전부다. 덕분에 드레스 룸으로 따로 마련한 공간은 이사를 마친 후의 빈집처럼 허전하다. 옷장을 열어봐도 화려한 직업이 무색하게 단출하고 소박하기 짝이 없다. 베이식한 디자인의 화이트 셔츠와 스트라이프 티셔츠,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실루엣의 블레이저, 체형을 보완해 주는 슬랙스 세 벌, 데님 팬츠와 브이넥 니트 등…. 어떻게 맞춰 입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주로 심플하고 단정한 디자인의 무채색 계열 옷들이 과묵하고 든든한 애인처럼 늘 나와 함께한다. 그런데 유행의 최전선에서 새로운 디자인의 신상을 발 빠르게 섭렵하고 대중에 전파해야 할 의무를 지닌 내가 이런 미니멀 라이프에 본격적으로 빠지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다시 말해 무분별한 소비와 산더미 같은 물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일상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돌이켜보면 참 많은 물건이 시절 인연처럼 스치듯 지나갔다. 올리비에 루스테잉이 선보인 파워 숄더 스타일 재킷과 물 빠진 스톤 데님 팬츠(아, 옛날이여!), 슈프림과 스투시를 비롯한 스트리트 브랜드가 메인 스트림으로 떠오르던 시절에 홀리듯 구입했던 로고 티셔츠, 몇 시즌 반짝하고 사라진(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신진 디자이너들의 ‘자기주장’ 뚜렷한 컬렉션과 나이가 들수록 차마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굽의 신발까지. 패션 에디터라는 직업을 핑계 대며 수집한 온갖 옷과 화장품, 액세서리 등 많은 물건은 예상보다 빠르게 빛을 잃었고, 덕분에 금방 시들어버린 꽃처럼 힘없이 축 처진 물건들은 방구석에 켜켜이 쌓여갈 뿐이었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올 때면 스트레스는 배가됐다. 
마치 서로 헤어지지 못하는 연인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불편한 동거를 이어가는 기분이랄까. 고개를 돌릴 때마다 시선에 걸리는 커다란 짐은 점점 마음의 짐으로 존재감을 확장했고,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을 땐 급기야 악몽까지 꾸게 됐다.
마침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책장을 차지하고 있던 사사키 후미오의 책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가 기적처럼 눈에 들어왔다(그 또한 기억나지 않는 소비 중 하나였을 테다). 비장한 마음으로 책을 훑던 중 한 문장이 유독 마음에 깊이 파고들었다. “소중한 것을 소중히 하기 위해 소중하지 않은 물건을 줄인다. 소중한 것에 집중하기 위해 그 외의 것을 줄인다.” 그 문장에 용기를 얻어 방에 쌓인 불필요한 짐을 과감히 비우기로 결정했고, 가장 많은 부피를 차지하고 있던 옷장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에디터라면 이 정도는 있어야지’라며 선배들을 따라 충동 구매했던 값비싼 브랜드의 옷, 패션 위크 출장을 의식해 마련했던 화려한 구두와 액세서리들…. 그동안 내가 아닌 ‘남’에게 잘 보이려 얼마나 많은 돈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살았던가, 순간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 과정이 남다른 취향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거라 기대했건만 이제 와 보니 생각보다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버릴 옷과 남길 것을 솎아내는 일련의 과정에서 나만의 취향과 스타일을 새롭게 발견하고 정의하는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혼란스러운 20대를 대변하는 정체성 없는 물건을 잔뜩 버린 후 비로소 남은 건 오래 입어도 질리지 않으며, 입었을 때 편안하고, 지금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클래식한 디자인의 질 좋은 옷들이었으니까. 
그 외에도 원 플러스 원을 비롯한 각종 할인 행사에 혹해 쟁여둔 화장품과 식료품은 꼭 필요한 것만 제외하고 주위에 나눠주거나 과감히 비웠다. 책 역시 마찬가지. 자기계발과 수집을 핑계로 끼고 살았지만 결국엔 한 번도 보지 못한 책들을 시원하게 처분했다. 마음의 무거운 짐이었던 존재를 비우니 비로소 집 분위기가 뻥 뚫린 듯 홀가분하고 여유로워졌고, 내가 진정으로 소중히 여기는 소수의 물건으로도 충분한 만족감을 맛볼 수 있었다. 더 좋은 건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늘었다는 사실. 야근 후 마주치는 짐 더미가 업무의 연장처럼 느껴졌던 스트레스는 물론 아침마다 드레스 룸을 뒤지며 옷을 고르는 시간이 눈에 띄게 줄었으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소비 패턴 역시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했다.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 한두 번 사용하면 질릴 게 뻔한 소비는 되도록이면 지양했다. 새로운 물건을 집 안에 들이는 일에 더욱 신중을 기울였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환경 보호와 제로 웨이스트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불필요한 소비가 줄어드니 통장 잔고는 점점 늘어났으며, 생활비 외의 금액을 모아 불릴 수 있는 실질적인 재테크로 관심사가 옮겨갔다. 물건은 구입하는 순간부터 가치가 하락하지만, 안정적인 재테크는 자산을 점점 더 불려준다는 사실을 왜 이제야 깨달았는지! 금방 질릴 쇼핑에 열을 올리고 월급을 바쳤던 지난 세월을 반성하며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니 점차 일상에 활력까지 더해졌다.
“나 자신의 가치는 갖고 있는 물건의 합계가 아니다. 물건으로 행복해지는 건 아주 잠깐 동안일 뿐이다. 필요 이상의 많은 물건은 에너지와 시간은 물론, 결국에는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 〈나는 단순하게 살기로 했다〉에서 마음에 깊이 새긴 또 다른 문장이다. 명품 브랜드의 신상을 민첩하게 소개하며 소비를 유도하는 패션 에디터라는 직업과 미니멀 라이프라니,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비움과 정리를 통해 깨달은 기쁨은 널리 알리고 싶을 만큼 뜻깊고 값지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자신을 위한 일이라 여겼던 일들이 결국 나를 위한 선택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는 것. 세상에서 가장 가깝지만 동시에 가장 먼 타인처럼 느껴지는 자신을 바로 직시하고 더욱 친밀한 마음으로 아끼게 됐다는 것. 오랫동안 끓어넘치던 물욕이 완전히 수그러들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은 한 김 식힌 찻잔처럼 온화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볼 수 있게 됐다. 끊임없는 소비에도 자꾸 마음이 헛헛해진다면, 쌓여가는 물건에 잠식당하는 기분이 든다면 비움이 곧 채움이라는 문장을 떠올려보기를. 미니멀 라이프가 속삭이는 새로운 가치의 시대가 우리에게 자유로운 해방감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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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김미강
  • 디자인 정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