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브리나〉의 오드리 헵번. ⓒGetty Images
나는 몸매 결점을 몽땅 감춰주고 시원하다는 코쿤(누에고치) 실루엣이 잘 안 어울린다. 팔다리 짤막하고 체구도 작으니 입는 즉시 강보에 싸인 신생아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학창 시절 맨 뒤에 앉던 동창이 1957년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가 내놓은 것과 같은 코쿤 실루엣 코트를 입고 나온 순간, 우아하고 기품 있으며 긴 팔다리 선이 발레를 하듯 아름다워 보이는 후광 효과를 느꼈다. 둥근 자루 같은 코트 실루엣과 동창의 미루나무처럼 긴 팔다리가 대비를 일으켜
‘멋이란 것이 폭발한’ 현상이었다.
전체적으로 옷이 이룬 형태인 실루엣은 사람의 몸을 통해 이미지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 고문영(서예지분)은 X자에 가까운 아워 글라스 실루엣 의상들을 즐겨 입는다. 부풀린 머리까지 더해 언뜻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초상이 떠오르는데 둘 다
힘, 카리스마에 집착한 인물이다.
핏은 ‘슬림하다’, ‘박시하다’처럼 몸과 옷 사이의 공간감을 말한다. 또는 바지처럼 옷 한 피스의 형태 종류들이기도 하다. 바지 핏은 특히나 유행을 많이 타서 ‘슬림 스트레이트 핏’ 광풍이 불었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스키니 핏’이 됐다가 정반대 ‘배기 핏’이 유행하기도…. 라인은 말 그대로 옷의 선이다. 부위에 따라 네크라인, 레그 라인, 헴 라인 등이 있고, 다트, 스티치처럼 구조나 장식 목적 라인도 있다.
자기 몸 고유의 장점은 충분히 드러내고 감추고 싶은 면은 눈에 잘 안 띄게 하면서 새로운 매력까지 일깨우는 게 최상의 실루엣, 핏, 라인이다. 하지만 웬만큼 옷을 많이 입어 보기 전에는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게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기본 원칙은 마음에 들지 않는 신체 부위와 살짝 반대인 실루엣, 핏, 라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족하다 느끼는 부위는 채우고, 넘친다 느끼는 부위는 끼지도 크지도 않은 적당한 핏으로 시선이 지나가게 한다.
서예지란 배우는 늘씬하면서도 어깨 선 같은 곳은 부드러운데, 파워 업한 어깨와 졸라 맨 허리, 다시 퍼지는 하의의 아워 글라스 실루엣이 기존의 매력은 물론 새로운 매력까지 이끌어냈다고 생각한다. 골반과 하체가 상대적으로 큰 게 고민인 사람은 허리에서부터 직선으로 퍼지는 A 라인 스커트, 허리 주름 없는 와이드 레그 팬츠가 그 곡선을 상쇄시킨다. 목이 굵고 짧아서 답답해 보인다면 재킷이든 티셔츠든 네크라인이 넓게 파인 것이 시원해 보인다. 가슴이 작고 허리가 긴 체형이라면 가슴 부분에 주름을 잡아 볼륨감을 주고 허리선은 확 올린 엠파이어 실루엣 톱이나 드레스가 완벽하게 고민을 커버해 준다. 구두도 마찬가지. 발이 동그랗고 작은 사람은 뾰족한 코가, 좁고 긴 사람은 둥근 코 구두가 보완해 준다.
자기 긍정의 시대이니 반대로 자기 체형을 그대로 드러내 개성을 발산하고 싶을 수도 있다.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기억되는 오드리 헵번은 발레리나가 되고 싶었지만 키가 너무 자라면서 포기해야 했다고 한다. 당시 글래머러스한 여배우들 사이에 독보적으로 가녀린 체형이기도 했던 그는 〈로마의 휴일〉(1955)에서처럼 종처럼 퍼지는 플레어스커트를 즐겨 입어 볼륨감을 더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시대의 패션 아이콘 타이틀을 안긴 건
영화 〈사브리나〉(1954) 속 레깅스에 가까운 블랙 카프리 팬츠와 발레리나 플랫 슈즈였다. 키 크고 마른 체형이 입었을 때 바지와 그 미니멀한 느낌이 극대화됐기 때문이다. 이어 대히트한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에서 입은 지방시 블랙 드레스는 가뜩이나 타고난 몸을 더 길고 날씬해 보이게 하는 효과로 후세(2006년)에 약 11억 원에 낙찰되는 세기의 명작으로 남는다.
물론 일반인도 자신 그 자체를 한껏 내세울 수 있다. 동북아인 중엔 드물지만 가슴이 크고 허리는 상대적으로 가는 글래머러스한 체형은 박시한 옷으로 감추기만 할 게 아니라 허리는 꽉 조이고 깊이 팬 네크라인 옷으로 승부를 걸어도 좋다. 골반이 크고 발목으로 갈수록 가는 체형이 레깅스를 입으면 유독 빛나는 것처럼 말이다.
이래저래 기성복이 제대로 어울리는 게 없다 싶을 때 마법의 솔루션이 바로
맞춤이다. 〈여성동아〉 올 2월호에서 한국인 최초로 디올 아틀리에에서 패턴 디자이너로 일하는 임세아의 인터뷰를 읽었다. 디자이너가 표현하고자 하는 디자인을 최초의 실제 옷으로 구현하고 입을 사람에 맞게 실루엣, 핏, 라인 하나까지 책임지는 역할이 패턴 디자이너다. 국내에서는 패턴사라고 한다. 배우 샤를리즈 테론, 제니퍼 애니스톤, 다코타 패닝의 시상식 드레스 패턴을 디자인했는데 샤를리즈 테론에 대해 “그녀의 드레스 한 벌을 만들기 위해 숙련된 패턴 디자이너 세 명이 200시간 이상을 매달려야 했어요. 꼬박 일주일 이상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해요.”라고 소회를 밝혔다.
그러니까 기성복은 대량 생산을 위한 최초의 설계만 존재할 뿐, 샤를리즈 테론에게 임세아와 같은 디자이너들이 매달렸듯 완벽한 실루엣, 핏, 라인까지는 추구하지도, 책임지지도 않는 옷이다. 그래선지 맞춤복을 즐겨 입는 남자들은 기성복 쇼핑할 때 몸이 아닌 옷을 탓하는 데 능하다. 똑같이 소매가 끼는 옷을 입어봐도 여자는 “어떡해, 팔뚝 살 때문에 안 들어가.” 하며 창피해하는 반면 그런 남자는 “소매가 너무 좁게 나왔잖아!”라며 옷 탓을 하는 경우가 많다.
기성복 이전의 세상에는 오직 단 한 사람에게 딱 맞는 맞춤복 밖에 없었다 .
여자도 옷을 몸에 맞췄으면 좋겠다. 많이 쇠퇴했지만 한국에도 아직 명맥을 이어가는 쿠튀리에들이 있다. 상담과 가봉 과정에서 체형상 보완했으면 하는 점, 드러내고 싶은 점을 분명히 밝히면 입었을 때 조금도 불편함이 없으면서 드러내고 싶은 부분과 감추고 싶은 부분이 다 뜻하는 대로 만들어진 완벽한 자신만의 옷이 탄생한다. 안타깝지만 소비자 입장에선 좋은 게, 국내는 숙련자도 임금 수준이 낮아서 프랑스, 이탈리아 등과는 비교할 수 없이 싼 가격에 어떤 옷이든 맞출 수 있다. 요즘은 남성 양복점에서 여성복도 겸하거나 의상을 고르면 치수만 바꿔주는 반맞춤이 대중적인데 셔츠, 바지처럼 간단한 단품 맞춤은 그런 곳에서 해도 되지만 스커트 정장, 드레스, 코트 등 패턴이 복잡한 옷은 대개 오래도록 같은 일을 한, 여성복을 전문으로 하는 분들이 잘한다. 가게 이름에
‘의상실, ‘부티크’ 등이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