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21세기 로맨틱 코미디 애호가의 고민 #ELLE 보이스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지, 처음으로 산 주식은 어떤 곡선을 그릴지, 특정 표현을 쓰고 어떤 장르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이 왜 어려운지. 우리의 삶은 여러 고민과 발전하고 나아지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여성의 시각으로 <엘르>가 전하는 세상의 단면들.

BYELLE2020.06.11
 

21세기 로맨틱 코미디 애호가의 고민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한다.’ 이 짧은 문장을 쓰는 데 용기가 필요한 건 왜일까? 로맨틱 코미디 또한 수많은 장르 중 하나일 텐데. 물론 로맨틱 코미디가 여성과 남성 관계의 ‘핑퐁’이라는 일종의 공식 아래에서 끊임없이 변주될 뿐인, 한계가 있는 장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가볍고, 작고, 가까운 이야기에서 의미와 재미를 찾아내며, 상처받을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기꺼이 관계 맺기를 선택하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하지만 바야흐로 2020년에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로맨스’와 ‘코미디’로 버무리는 것이 가능한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장르의 특성상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맡긴 하지만 사랑과 연애가 가장 중요한 세계에서 그 역할은 당연히 한계가 있다. 게다가 로맨틱 코미디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이성애 로맨스라면?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극장가에서 유의미한 흥행을 거둔 유일한 작품인 〈너의 결혼식〉은 남성 관점으로 복기하는 첫사랑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역으로 확인하게 해주는 작품이다. 로맨스에 더해진 코미디는 성별 고정관념을 강화하고 이를 비틀어 웃음 코드를 가져온 것이 대부분이다. 미국에서 새로운 로맨틱 코미디처럼 홍보된 에이미 슈머의 작품 역시 ‘더 막 나가는 여자’가 그럼에도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남성으로 인해 변화하는 서사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니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한다는 내 고백이 고해성사처럼 느껴질 수밖에. 나는 요새 이 용기에 여성으로서, 작가로서 내 궁금증을 하나 더해 묻고 있다. 내 질문은 이것이다. 21세기에도 과연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할 수 있을까?
 
넷플릭스에 공개된 〈반쪽의 이야기〉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돼준 작품이다. 연애 편지를 대필해 준다는 식상하기 그지없는 소재를 가지고 새로운 이야기를 선보인 것이다. 그 한 가운데에는 엘리 추라는 이름의 소녀가 있다. 가상의 소도시에 중국계 미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이 여성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갓 깨달은 소녀다. 무려 16년 전 뉴욕에 사는 중국계 레즈비언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아 미국 속 동양 사회 문화까지 아우르는 로맨틱 코미디 〈세이빙 페이스〉로 데뷔했던 앨리스 우 감독은 또 다른 자신인 엘리를 통해 ‘좋아한다’는 감정을, 성장을 다시 이야기한다. 미국 시골에서 인종 차별을 일상적으로 겪으며 가족 문제까지 감내해야 하는 소녀가 주인공일 때, 그리고 그가 성소수자일 때, 뻔한 장르의 공식은 흥미롭게 변주된다. 흔해 보이는 삼각관계가 상투적 결말을 향해 가지 않고 관계에 속해 있던 모두의 성장으로 마무리되는 순간, 이 작고 귀여워 보이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 영화를 딛고 도달한 것일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TV로 영화를 보는 시청자들에게 로맨틱 코미디만큼 진입 장벽이 낮은 장르도 없다. 게다가 ‘넷플릭스 보다가 쉬었다 갈래?’라는 말이 미국식 ‘라면 먹고 갈래?’가 된 상황이라면 어떨까? 기본적인 조회 수를 보장하고, 제작비는 상대적으로 적게 드는 장르로서 로맨틱 코미디는 넷플릭스에도 매력적인 시장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꾸준히 사랑받은 것은 이야기 자체가 완전히 새롭지 않아도 다양한 장르의 인종이 등장하는 것이었다.
 
〈상사에 대처하는 로맨틱한 자세〉는 두 주인공의 상사를 모두 유색 인종 배우로 캐스팅했지만 인종에 대해 절대 언급하지 않으며 이야기를 전개했다. 이 영화 속에서 인종 때문에 지적받는 캐릭터는 백인 남자 주인공뿐이다. 하이틴 로맨스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의 주인공 라라 진은 영화 속에서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리고 영화는 여자 주인공의 인종이 달라지는 것만으로도 아주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모든 이야기의 변화와 시도를 지나 도착한 〈반쪽의 이야기〉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영화가 시작할 때 엘리는 동네를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을 만나고, 함께 그리는 그림 위에 더 대담한 선을 그으며 엘리는 성장한다. 첫사랑인 애스터와 그 과정에서 진짜 친구가 된 폴 모두 이 역할을 감당하며, 이들 또한 엘리를 통해 변화한다. 그리고 엘리는 비로소 새로운 곳으로 떠날 용기를 낸다. 이 영화는 탈출을 통해 완성되는 여성의 성장기이면서 로맨틱 코미디의 미덕도 잃지 않은 드문 작품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여성으로서, 성소수자로서, 미국 사회의 동양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작품 곳곳에 녹인 훌륭한 여성 창작자가 있다.
 
사랑과 연애, 결혼에 대한 이야기라면 질려버린 한국 여성이지만,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리는 여성의 사랑과 연애 이야기가 여전히 필요하다고 믿는다. 우리에게는 더 나은 로맨스와 웃음이 필요하다. 이게 바로 〈반쪽의 이야기〉를 어디에서고, 몇 번이고 추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새로운 시대의 로맨틱 코미디가 〈반쪽의 이야기〉와 같다면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데 용기 같은 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WRITER 윤이나
칼럼과 에세이, 드라마 등 거의 모든 장르의 글을 쓰고 여러 권의 책을 냈다. 콘텐츠 팀 헤이 메이트의 멤버로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