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소중한 순간을 담은 향수 컬렉션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작가이자 프레젠터인 케이티 풀릭의 말을 빌리자면 ‘향수 컬렉션은 삶의 소중한 순간을 담은 믹스테이프’다. 수많은 향수를 갖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새로운 제품 앞에 설레는 에디터가 향수와 함께해온 지난날들을 더듬어보았다. ::케이티 폴릭,향기로운,설레는,화려한,스페셜 장소, 레스토랑, 카페,생일, 스페셜 데이, 축제, 파티, 행사,벨렌시아가,딥티크,장폴고티에,랑콤,샤넬,향수,믹스테이프,제품,엘르,엣진,elle.co.kr:: | ::케이티 폴릭,향기로운,설레는,화려한,스페셜 장소

1 딥티크 베티베리오. 50ml, 11만5천원. 자바 지역의 주민들이 베티베르 풀을 엮는데서 영감받았다. 쌉쌀한 베티베르 풀과 포근한 머스크 향이 믹스된 향. 2 발렌시아가 파리. 30ml, 9만9천원.니콜라스 게스키에르가 선보인 첫 번째 향수. 가볍지 않은 파우더리한 향, 불 드레스에서 착안한 보틀이 특징이다.3 장 폴 고티에 클래식. 50ml 8만9천원.때론 향보다도 독특한 보틀이 소장 욕구에 불을 지르기도 한다. 이제는 ‘고전’이 된 여성의 토르소를 형상화한 우디 향의 향수.4 샤넬 No.5 오 드 빠르펭. 50ml, 12만8천원. 이보다 더 클래식한 향수가 있을까. 1921년 출시된 후 모던한 여성들과 한결같이 함께 해온 타임리스 향수. 5 랑콤 트레조 인 러브. 50ml, 9만원.랑콤의 트레조가 새롭게 탄생했다. 특유의 향긋한 플로럴 향은 그대로면서 보다 젊고 활기찬 모습으로.“무슨 샴푸 써?” 스무 살 무렵 만난 지 한 달도 안 된 남자친구가 늘 궁금했다는 듯 물었다. “별거 없는데…. 그냥 엄마가 사온 거.”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했지만 사실 그건 ‘비누 향’으로 유명했던 엘리자베스 아덴의 5번가 향수를 머리에 뿌린 덕이었다. ‘이젠 나도 어엿한 숙녀니 향수는 필수지!’ 라고 마음먹은 스무 살. 세상엔 참 많은 향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풋내기 소녀의 코끝을 자극한 건 결국 베이비 파우더를 연상시키는 순하고 파우더리한 향수였다. 당시(2001년) 나를 비롯한 새내기들에게 사랑받았던 향수는 불가리의 쁘띠 에 마망, 버버리의 베이비 터치, 지방시의 쁘띠 상봉, 데메테르의 베이비 파우더 등. 나는 향수인지 체취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 향이 내 나이에 어울린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론 남들 다 쓰는, 그것도 ‘나 베이비에요’라고 대놓고 말하는 것들엔 왠지 거부감이 들었다. 이런저런 서치와 테스트 끝에 결정했던 ‘내 돈 주고 구입한 향수 1호’는 바로 은은하고 여성스런 비누 향의 엘리자베스 아덴 5번가였던 것(제니퍼 로페즈의 글로 by 제이로와 접전을 벌이다 간 택). 남자친구가 무슨 샴푸냐고 물었으니 미션은 성공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두세 가지 정도의 향수로 대학 신입생 시절을 보내고, 2학년으로 넘어갈 때 즈음, 뿌린 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자취를 감추고 마는 지속력과 지나치게 귀여운 보틀 디자인(버버리의 베이비 터치는 오뚝이 장난감 모양, 불가리의 쁘띠 마망은 곰돌이 일러스트가 새겨져 있었다)이 슬슬 싫증 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난 더 이상 베이비가 아닌데’라는 근거 없는 기분이 들며 나의 향기에도 분명 변화가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대학 2학년 때 맞은 화이트데이, 뭘 받고 싶냔 남자친구의 물음에 난 주저없이 “디올의 쟈도르!”를 외쳤다. 다소 진한 쟈도르 골드가 한층 라이트해진 실버 버전으로 출시된 때라 20대 초반인 내게도 무리없이 어울릴 거란 나름의 결론이었다. 거기에 조금씩 용돈을 모아 차례로 구입한 건 샤넬에서 거의 처음으로 소녀를 타깃으로 출시했던 샹스 그리고 센세이셔널한 보틀과 비누 향으로 유명했던 구찌 러쉬2 정도. 당시 여대생들의 옷차림은 H라인 모직 스커트에 흰 스타킹을 매치하는 일명 ‘심은하 룩’ 아니면 블루 셔츠에 베이지 면바지 차림의 ‘폴로 스타일’이 주류였다. 어쨌든 학교에 갈 땐 주로 폴로 스타일을 입었는데 난 이 차림을 위한 보다 캐주얼하고 상큼한 향의 필요성을 느꼈다. 마침 랄프 로렌이 그의 딸을 위해 만들었다는 상쾌한 오이 향의 랄프 향수가 온 잡지를 도배했고 곧 나의 ‘에브리데이 향수’가 됐다. 그러다 한동안 특별한 목적 없이 향수를 뿌렸다. 여름철 텁텁한 기분을 상쾌하게 바꿔준다는 엘리자베스 아덴의 그린티, 쿨함과 섹시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는 돌체 앤 가바나의 라이트 블루, 한국에 론칭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끈 달콤한 복숭아 향의 베네피트의 메이비 베이비, 예쁜 패키지로 소녀들의 감성을 자극한 롤리타 렘피카와 안나 수이의(거의 모든) 향수 등. 2000년대 초는 뷰티 동호회가 막 붐을 이루던 시기인데 이런저런 글들을 살피던 중 ‘향수’ 카테고리의 질문 중 8할은 ‘남자들이 좋아하는 향수는 도대체 뭔가요?’임을 깨달았다. 아마도 그때 눈을 뜬 것이리라. 향수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이성을 위함인 것을. 패키지가 예쁘고, 브랜드가 매력적이면 무슨 소용이랴. 그렇게 내가 ‘남자들의 페이버릿 향수’로 리스트업한 것은 랑콤의 미라클, 랑방의 아르페쥬, 디올의 포에버 앤 에버, 샤넬의 알뤼르, 더바디샵의 화이트 머스크 등. 거기에 빅토리아 시크릿의 이름도 생소한 향수들이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그들처럼 ‘구매대행’까지 할 필요성까진 느끼지 못해 구입을 포기. 특히 랑콤의 미라클의 경우, 자주 뿌리던 친구가 있었는데 여섯 살 연상의 남자친구가 ‘(욕망(!)을 절제하기 힘드니) 제발 낮에는 뿌리지 말아달라’고 애걸했다는 실제 경험담을 들은 이상 지갑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뷰티 에디터가 되어 향수 관련 기사를 진행할 때면 너무나 다양하고 아름다운 향수 샘플들이 내 앞으로 배달돼 왔다. 수십 혹은 수백 개에 이르는 향수들을 접하니 자연스레 후각의 수준(?)도 높아졌다. 브랜드가 시크하거나 혹은 매우 럭셔리하거나, 아님 탄생 배경에 그럴듯한 스토리가 있는 제품에 마음이 갔다. 이를테면 엘리자베스 페이튼이 그린 소피아 코폴라의 초상화가 광고였던 마크 제이콥스의 에센스, 샤워한 뒤의 상쾌한 느낌을 담았다는 바비 브라운의 올모스트 베어, 뉴욕의 업타운 걸로 뾰로롱 변신시켜 줄 것 같은 에스티 로더의 화이트 리넨을 뿌리면 정말이지 특별한 여자가 된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이런 여자들의 마음을 읽었는지 당시 출시된 향수들은 저마다의 유니크한 스토리와 향을 담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이어졌는데 에르메스 가죽 창고의 냄새에서 영감받았다는 에르메스의 켈리, 비온 뒤의 비릿한 향을 담았다는 쟈르뎅 아프레라 무쏭 그리고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프레쉬의 시크한 모든 향수들(특히 사케와 슈가 레몬, 슈가 리치!)이 그 대표 주자들이었다.그러다 잠시 회사를 그만두고, 약 10개월간 미국에 머물렀던 시기. 이미 10여 개의 향수를 선별해 한국에서 가져갔음에도 불구하고 소유욕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짧은 기간에도 정말 많은 향수 신제품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고심 끝에 구입한 건 ‘한국에 출시되지 않은’ 나름 희소성이 있는 제품들. 명성은 자자하지만 한국에선 도통 구하기가 쉽지 않은 조 말론, 그 이름만으로 시크함이 뚝뚝 떨어지는 본드 넘버 나인, 앞서 언급한 빅토리아 시크릿의 향수들(사실 전혀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매장만 들어가면 이상하게 갖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필로소피의 그레이스 그리고 프라다의 인퓨전…. 프라다의 향수는 거의 매일같이 밤낮으로 뿌렸는데 지금도 그 향을 맡을 때면 신나게 놀았던 그때의 추억들이 되살아나는 타임머신 같은 향수다.최근엔 확실히 디자이너 브랜드의 향수들이 강세다. 샬럿 갱스부르를 전면에 내세워 야심차게 론칭한 발렌시아가 파리, 첫 번째 향수를 성공시킨 뒤 두 번째로 출시된 끌로에의 러브, 청혼용 향수로 오랫동안 인기를 끌 듯한 랑방의 메리 미,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마크 제이콥스의 데이지와 롤라, 곧 국내에도 출시 예정인 구찌의 길티 그리고 이름마저 무심한 마틴 마르지엘라의 언타이틀드까지. 게다가 이번 시즌엔 레이디라이크 트렌드를 타고 한껏 드레스업한 차림엔 이런 디자이너 향수가 안전하게 어울린다는 무의식까지 더해진 탓인지 성숙한(Grown-up) 향수가 인기, 특히 선물용으로 안성맞춤이다. 요즘 나의 마음과 후각을 사로잡고 있는건 그 어디에서도 맡아보지 못했던 유니크한 향과 시크한 보틀로 무장한 ‘인디급’ 향수들이다. 시작은 이젠 대중적인 인기로 확대된 딥티크를 꼽을 수 있겠다. 지난 달엔 10꼬르소 꼬모 서울의 뷰티 섹션 미디어 이벤트를 통해 파리와 밀란에서 새롭게 들여온 따끈따끈한 브랜드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아티잔 파르퓨머(L’Artisan Parfumeur), 메종 프랜시스 커크쟌(Maison Francis Kurkdjian), 이스투아 드 퍼퓸(Histoires de Perfumes)등 발음하기조차 힘든 생소한 브랜드들이 어찌나 흥미롭던지! 홍보 담당자에 따르면 다소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희소성 높은 향으로 남과 다른 나만의 시그너처 향을 만드려는 뷰티 인사이더 덕분에 뷰티 섹션의 성장세가 매우 꾸준하다고. 또 이번 뉴욕 출장 중 접하게 된 르 라보(Le Labo)는 나의 페이버릿 리스트에 막 추가된 따끈따끈하고 강력한 브랜드다. 파리를 베이스로 한 이 향수 브랜드는 마치 ‘향수 실험실’ 같은 카운터에서 원하는 향을 선택하면 자신의 이름(혹은 선물받을 사람의 이름), 구입한 날짜와 장소를 라벨로 붙여주는 특별함이 돋보인다. 곧 국내 론칭을 준비하고 있다니 기대해도 좋을 듯.나의 향수에 대한 취향이 이렇게 바뀌었듯 새로운 세대의 소녀들은 또 어떤 감성으로 세상의 향들을 맞이할지 사뭇 궁금해진다. 분명한 건 여자라면 아마 결코 한 가지 향수에 만족하진 못할 거라는 사실. 나만 해도 지난여름 발리 행 출장을 준비하며 챙긴 건 달콤하면서도 이국적인 프레쉬의 슈가 리치(캐롤린 머피가 코를 킁킁대며 도대체 무슨 향수냐고 물었던)였으며, 현실을 뒤로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땐 여행을 콘셉트로 한 디올의 에스깔레 오 마르키스,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을 땐 엘리자베스 아덴의 그린티 라벤더 그리고 기분에 따라 디올의 미스 디올 쉐리, 갭의 스테이 등을 번갈아 뿌리고 있으니까. 한때 단 하나의 시그너처 향수를 정해 보겠노라 결심한 적도 있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매일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음식을 먹듯 향수 또한 하루하루를 새롭게 바꿔주는 매혹의 마약과 같으니까. 내일은 또 어떤 향이 나를 유혹할까?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11월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