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그 참을 수 없는 '척'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지난 연애를 위해 기꺼이 감수했던 것들의 목록을 작성해 봤다. | 연애,컬럼,연애의 기술,데이트,사랑

  그녀는 내가 본 여자 중 가장 예뻤다. 외모뿐 아니라 대부분의 면에서 그랬다. 솔직하고 당당한 성격, 프로페셔널한 일 처리, 남의 시선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사는 여자. 보고만 있어도 자연히 호기심과 동경이 일었다. 다만 한 가지, 그녀를 알아갈수록 좀 의아했던 건 바로 스타일이었다. 그녀의 스타일엔 어떤 주기가 있었다. 그 시즌의 변화는 계절이 아니라 주로 남자친구로 결정됐다. 모델과 만날 때는 스터드가 잔뜩 박힌 발망 가죽재킷(한때 유행이긴 했다)에 강렬한 스모키 메이크업을 즐겼고, 스케이트보더와 사귈 때는 주로 스트리트 브랜드의 옷을 입었으며 독립영화감독과 연애하면서는 말간 민낯에 이스트팩을 메고 다녔다. 물론 절로 옷장을 궁금하게 만들 정도로 늘 패셔너블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가 하면 J는 특별함에 대한 갈망이 있는 친구였다. 그녀는 애초에 대중적인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멀티플렉스보다 어딘지 퀴퀴한 냄새가 풍기는 아트 시네마를 찾았고, 누구나 읽는 자기계발서나 알랭 드 보통이 아니라 페르난두 페소아의 산문을 읽고 감동받곤 했다. 그저 겉멋으로 치부할 수 없을 만큼 라이프스타일 역시 히피에 가까웠다. 연애에 있어서도 그녀는 메인 스트림을 혐오했다. 그녀의 연애 스타일을 요약하면 아마 미국의 매치 메이커 사만다 대니얼스의 ‘남자가 사랑에 빠지는 9가지 유형의 여자’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이 그렇고 그런 전 여친 중 한 명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제까지 만나왔던 여자들과는 다른 특별한 여자’로 시작해서 ‘언제나 흥미로운 여자’로 끝나는 이 시대착오적인 리스트에 본능적으로 집착한 것이다. 그녀는 크리스마스 시즌을 겨냥하는 로맨틱 코미디 속 주인공이 아니라 에릭 로메르 영화의 프랑스 여자가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연애는 음악이나 영화 취향과는 좀 다르다. 애쓸수록 놓치기 일쑤고 특별하려 할수록 진부하다는 건 연애의 오랜 진리다. 그녀의 남자친구들, 스스로는 자유로운 영혼이라 칭하지만 남들이 보기엔 그저 무책임한 종족일 뿐인 그들은 그녀의 절박함을 쉽게 알아챘고 관계는 파국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뭐, 나도 남 말할 처지는 못 된다. 나 역시 항상 뭘 좀 아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남과는 달리 그의 세상을 이해하는 여자, 그래서 우리 관계엔 운명적인 뭔가가 있다는 걸 끊임없이 증명하고 싶어 했다. 그녀처럼 나 또한 그 남자가 좋아하는 흑백영화를 흥미롭게 지켜봤고(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취향이다) 반스만 신는 주제에 마놀로 블라닉을 구입했다(부끄럽지만 반전 매력을 노렸다). 얼마 전 <뉴요커> 매거진에 업데이트된 ‘내가 남자를 위해 좋아하는 척했던 것들’이라는 일러스트레이션만 봐도 이건 단순히 나와 그녀들의 이야기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거기엔 아론 소킨, <스타트랙>,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때로는 신자유주의, 비디오게임과 슈퍼히어로 만화들, 위스키와 보드카, 헤겔과 데카르트 등 분야를 막론한 목록이 두서없이 이어졌다. 그 게시물에는 ‘이게 진실이고 현실이야’ ‘나도 여자친구를 위해 비건 음식을 좋아하는 척하고 있지’ ‘빌어먹을 스포츠 팀들’ 같은 댓글이 1000개 이상 달렸고 나도 슬그머니 ‘좋아요’를 눌렀다. 그 포스트에 차마 댓글로 남기지 못했던 내 개인적인 목록을 고백하자면 다음과 같다. 프리미어리그, 한국 힙합, 삼겹살과 스팸, 회, 와인과 치즈, 레드 립 혹은 민낯 메이크업, 하이힐, 헬스, 조니 캐시, 영드 <오피스>(미드 <오피스>가 5억배 더 재미있다), 데미언 허스트, 커트 보니것(그래, 난 <제5 도살장>의 블랙 유머 속 깊은 의미를 간파하지 못한 형이하학적인 인간이다)…. 컨트리 음악이라면 질색하는 나는 그가 틀어놓은 조니 캐시의 음악을 음미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새벽에 토트넘의 경기를 보며 손흥민을 외쳐댔다. 주변에서도 비슷한 제보가 쏟아졌다. 동하지 않는 날 예의처럼 했던 섹스들을 떠올리는 이도 있었고, 평소 식사를 주유처럼 생각하는 누군가는 그를 위해 맛집 앞에서 1시간 동안 기다렸던 일을 꼽았다. 하물며 연애를 시작한 것도 아닌데 글도 썩 잘 쓰고 취향도 근사한 남자를 트위터에서 발견한 후 그 남자가 언급한 책이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서점과 극장에 달려가는 빈도 수가 늘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이건 여자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아는 한 가장 건조한 무신론자인 M은 여자친구를 위해 교회에 다녀온 적 있다고 고백했으며, 발라드만 듣는데다 피만 봐도 어지러움을 느끼는 B는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헌혈을 하고 끔찍한 펑크 밴드의 공연을 수십 번 봐야 했다고 툴툴거렸다. 물론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당신처럼 개인적 신념을 가지고 나름의 방식을 고집하는 주체적인 인간들이다. 적어도 일이나 정치적 입장에 있어서만큼은 그렇다. 그저 그때 만난 그 사람의 세상이 내 것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보였을 뿐이다. 어차피 인간은 혼자서는 자신을 보지 못하는 사회적 동물 아니던가. 우리는 누군가와의 비교를 통해 내 위치를 파악하고 다른 이를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느끼기 마련이다. 그 누군가가 실체는 없고 내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니까, 자존감을 이유로 자책하거나 진정한(보여준 적도 없는) 나를 사랑하지 못한 상대방을 탓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연애란 상대방과 나를 이상화하고 그에 맞춰 자신을 설득하는 과정이기도 하니까. 카뮈도 우리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사람이 밖에서 보기에는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아주 완전해 보이고, 주관적으로 자신을 보면 몹시 분산돼 있고 혼란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물론 그 환각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내 전략이 완벽히 먹혔던 S는 데이트 내내 ‘내가 만난 여자 중 가장 멋있는 여자’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그럴 때마다 기쁨보다 불안감이 엄습했다(원래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반대로 축구 마니아인 한 친구는 밤마다 축구 경기를 보는 자신에게 불만을 털어놓는 여자친구를 이해할 수 없다고 고민을 털어놨다. 연애 초반에는 그녀도 분명 축구를 좋아했다고, 적어도 그렇게 주장했다면서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쩐지 내 치부를 들킨 듯 얼굴이 벌개졌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 스코틀랜드 출신의 코미디언 대니얼 슬로스의 답은 ‘꺼져 버리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제가 연애할 때마다 어떻게든 누군가를 따라해서 성공적인 관계를 만들고 싶어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해요. 그래서 타협하고 자신을 바꿔버리죠. 그러고 나면 왠지 내가 싫어져요. 내가 만들어낸 이 놈한테 질려서 그만둬 버리죠. 이제 저는 상대방이 100%의 나를 그대로 사랑하지 않으면 꺼져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라는 사람의 일면을 멋대로 날조해서 사랑하는 거죠. 그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하는 건 내 잘못이 아니에요. 만약 당신이 100%의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지구엔 인구가 75억 명이나 있으니까 다른 사람을 찾으세요.” 어쩌면 내 이별의 가장 큰 이유는 상대방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자신에게 지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연애가 끝난 후에 어떤 것들은 남고 어떤 것들은 떠났다. 아니, 전보다 더 싫어졌다. 난 이제 스팸은 쳐다보지도 않고, 한국 힙합은 멀리하며, 1970년대 독립영화를 비롯한 인디 감성은 모두 축축한 홍대병으로 매도해 버린다. 그리고 이런 몇 번의 연애 후에 배운 게 있다면 포기하는 법이다. 그건 사랑에 대한 냉소보다 자신을 가장하는 것을 내려놓았다는 쪽에 가깝다. 더 이상 프리미어리그를 좋아한답시고 외국 축구 선수들 이름을 줄줄 외우지 않고, 삼겹살을 억지로 우겨넣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대니얼 슬로스의 말처럼 앞으로 상대방과 나의 100%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냐고? 글쎄. 그게 가능하기는 한가? 참고로 그 발칙한 충고의 장본인 대니얼 슬로스 역시 아직 100%의 누군가를 찾지 못했다. 지구에 인구가 75억 명이나 있는 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