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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가 점점 잊혀져 갈 무렵, 2006년 안노 히데아키는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을 선언하고 나섰다. 스스로 새로운 시대상에 걸맞은 에바를 부활시키고자 함이었다. 국내에서도 <에반게리온: 서>가 2008년 1월 개봉하면서 다시 에바의 신화를 재장전하는데 이르렀다. <서>가 등장하자 다시 엄청난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작품성은 다소 회의적이었다. 사실 스토리나 캐릭터들이 기존의 <에반게리온>과 다를 바 없다는 평가를 남겼다. 역시 이 신화적인 스토리를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쉽지만 새 프로젝트는 에바 팬들을 위한 보너스처럼 보였다. 그러나 안노 히데아키와 츠루마키 카즈야는 가슴에 폭탄을 담고 있었다. 그 열정이 이야기의 도입부인 <서>에서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이 점화된 것은 두 번째 이야기 <에반게리온: 파>다. <파>야 말로 에바의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 에바의 변화와 진화를 위해 내린 처방은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이다. 총감독 안노는 츠루마키 감독에게 “마리를 등장시켜 에바의 세계를 파괴해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5호기의 파일럿으로 소개되는 비중없는 캐릭터가 갑자기 축구의 리베로처럼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마리 이야기를 보다 드라마의 중심부에 접근시켰다. 다시 말해 이야기를 바꾸는 캐릭터로 만들어 갔었다. 그것은 <서> 공개 직후의 커다란 전환이었다. 돌아보면 거기서부터 진짜 출발이었다.”고 츠루마키는 말한다. <파>의 오프닝부터 등장하는 마키나미 마리는 붉은색 체크 스커트에 머리를 양쪽으로 묶고 붉은색 뿔테 안경을 쓴 캐릭터다. 네르프의 미사토 대령조차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이 파일럿은 사도와의 싸움을 마음껏 즐긴다. 사도와의 격투를 위해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는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도, “재미있으니까 상관없어!”라고 외칠 정도로 열혈 전투광이다. “자신의 싸움을 위해 어른들을 이용해도 좋은지 몰라”라고 할 정도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도전적이고 자존심이 강한 척하지만 속마음은 여린 아스카보다 더 승부욕이 넘치는 캐릭터다. 또한 <파>에 의문을 남기는 캐릭터는 여전히 카오루다. <서>에서도 등장했던 정체불명의 소년 나기사 카오루는 이번에도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또 다음 편으로 넘어간다. <서>의 엔딩처럼 <파>의 엔딩에도 등장한 카오루는 3부 <에반게리온: 급>을 위한 여운을 남길 뿐이다. 카오루는 원작 TV시리즈 24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해서 에반게리온을 탈 수 있는 5번째 소년이자 마지막 사도 역할을 했던 캐릭터다. 그가 이미 신지를 잘 알고 있다는 식의 대사(“약속의 시간이야, 신지 군. 이번에 너만은 꼭 행복하게 만들어 보이겠어”)를 슬쩍 흘리는 것으로 봐서는, 이야기의 또 다른 변화가 예상 된다. <파>의 엔딩에서 인류의 종말처럼 ‘서드 임팩트’마저 예고하는 걸 보면, 스토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다.
긴급 수혈한 캐릭터들로 새로운 스토리라인을 구축했다는 점 말고도, <에반게리온: 파>를 봐야 할 이유는 또 있다. 한층 발전한 전투 신이 압도적인 영상을 선사한다. 디지털 3D CG로 만든 에바와 사도와의 전투 신은 기존의 로보트 애니메이션이 생산해냈던 비주얼과 역동성을 훌쩍 뛰어넘는다. 에바의 출격과 전투 신에서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의 생동감이 솟아난다. 일본에서 6월에 개봉한 <파>가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을 2주 연속 누르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총 수익 4,200만 달러 돌파). TV버전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신지의 집착과 회의(심리적 갈등) 대신 <파>는 파격적으로 냉혹한 전투에 치중한다. 신지의 초호기와 레이의 0호기, 아스카의 2호기까지 세 대의 에반게리온이 총출동해 사도와 대결하는 신은 로보트물에서 전투의 묘미를 극대화하고 있다. 특히 에바가 신 도쿄시의 스카이라인을 뛰어넘어 사도를 향해 미친 듯이 전력질주하는 신은 <서>의 야시마 작전에서 보여준 전투의 전율을 훌쩍 넘어서버린다. 스스로 원작을 해체하고 새로운 신화를 탄생하는 순간이 에바의 전투에서도 이어진다. 아스카가 죽고 레이마저 사도에게 먹힐 위험에 빠지는 엔딩에서, 관객이라면 누구나 “신지, 어른이 되지 않아도 좋아! 어서 레이를 구해!”라고 외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날개를 주소서”라는 희망의 노래조차 낯뜨겁지 않다. 이것이 강력한 중독을 전파하는 에바의 세계다. 그리고 <파>가 끝나기가 무섭게 <급>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숙명이다. “You are not alone!”라는 에바의 메시지를 마음에 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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