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붉은 심장이 뛴다

'에반게리온 파'가 돌아왔다. '서'는 서막에 불과했는다는 걸 알리기 위해 '파'는 모든 것을 변화의 파국으로 몰아간다. 소심한 신지가 세상을 향해 눈을 뜬다. 그리고 심장으로 울부짖는다. 레이, 죽지마! 우린 다시 부활할 거야!

프로필 by ELLE 2009.12.09

불확실성. 그것은 언제나 세기말의 화두였다. 그러나 ‘에바(에반게리온의 애칭)’처럼 불확실성의 원리를 인생의 궤도 안으로 적극 수용한 작품은 어디에도 없었다. 에바는 그저 트렌드나 상품이 아니었다. 1995년 TV시리즈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시작해 극장판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까지 이어진 <에반게리온>시리즈는 하나의 사회현상을 일으키며 새로운 애니메이션 붐을 일으켰다. 당시 에바를 본다는 것이 다음 세기로 넘어가기 위한 통과 의례가 되었다.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으로 가득 찬 이 애니메이션은 오디푸스 컴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소년 주인공(신지)을 통해 세대간의 소통 부재와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되어가는 신세대의 방향 상실을 담아냈다. 자침이 고장난 나침반처럼 어느 방향도 가리키지 못하는 세상. 그렇게 에바는 세기말의 자의식을 반영하는 거울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에바의 혼을 정의내린다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일본의 많은 지성인들과 아티스트들은 이미 에바가 갖고 있던 문제의식을 다양한 층위로 표출해왔다. 에바의 테마는 새로울 게 없었다. 그럼에도 에바가 신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특유의 모호한 방식 때문이었다. 추상성과 무의식과 균열로 가득 찬 세계. 에바를 탄생시킨 안노 히데아키의 상상력은 급기야 불친절하다는 인상마저 주었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 담긴 어둠과 부정성을 다시 치유의 힘으로 이끌어나가는 것이 에바의 기묘한 매력이었다. 지금도 에바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마디로 의문투성이다. 바로 그 지점이 열혈 오타쿠를 탄생시키는 힘으로 작동했다. 이를 테면 하나의 사도가 등장할 때마다 에너지를 공급받아 에바가 싸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5분이다. 태생적 한계라고는 하나 왜 이런 제약이 있을까? 에바와 사도의 전투 시 방어와 공격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 AT 필드(Absolute Terror Field)도 전투가 아니라 집단역학에서 보던 심리적 영역선을 떠올리게 만든다. 말 그대로 의식의 방어막이다. 게다가 극장판 <에반게리온: 파>에서 새롭게 등장한 마리가 신지에게 "너의 LCL은 냄새가 특이하다"고 말하는 걸 보면 LCL은 에바 파일럿에게 액체 상태로 산소를 공급해주는 것 이상의 의미나 상징성이 담겨 있다. 이렇듯 오타쿠들에게 에바의 실체는 커다란 의문이자 숙제였다. 그들은 에바 이야기의 여백과 사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채워갔다. 따라서 인조인간형 병기 에바의 주인은 둘시아네를 찬양하는 라 만차의 기사가 아니라 고뇌하는 햄릿이 되었고, 동(動)이 아니라 정(靜)의 작품으로 귀결되었다.




에바가 점점 잊혀져 갈 무렵, 2006년 안노 히데아키는 ‘신극장판 에반게리온’을 선언하고 나섰다. 스스로 새로운 시대상에 걸맞은 에바를 부활시키고자 함이었다. 국내에서도 <에반게리온: 서>가 2008년 1월 개봉하면서 다시 에바의 신화를 재장전하는데 이르렀다. <서>가 등장하자 다시 엄청난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작품성은 다소 회의적이었다. 사실 스토리나 캐릭터들이 기존의 <에반게리온>과 다를 바 없다는 평가를 남겼다. 역시 이 신화적인 스토리를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쉽지만 새 프로젝트는 에바 팬들을 위한 보너스처럼 보였다. 그러나 안노 히데아키와 츠루마키 카즈야는 가슴에 폭탄을 담고 있었다. 그 열정이 이야기의 도입부인 <서>에서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이 점화된 것은 두 번째 이야기 <에반게리온: 파>다. <파>야 말로 에바의 새로운 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 에바의 변화와 진화를 위해 내린 처방은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이다. 총감독 안노는 츠루마키 감독에게 “마리를 등장시켜 에바의 세계를 파괴해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5호기의 파일럿으로 소개되는 비중없는 캐릭터가 갑자기 축구의 리베로처럼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마리 이야기를 보다 드라마의 중심부에 접근시켰다. 다시 말해 이야기를 바꾸는 캐릭터로 만들어 갔었다. 그것은 <서> 공개 직후의 커다란 전환이었다. 돌아보면 거기서부터 진짜 출발이었다.”고 츠루마키는 말한다. <파>의 오프닝부터 등장하는 마키나미 마리는 붉은색 체크 스커트에 머리를 양쪽으로 묶고 붉은색 뿔테 안경을 쓴 캐릭터다. 네르프의 미사토 대령조차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이 파일럿은 사도와의 싸움을 마음껏 즐긴다. 사도와의 격투를 위해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는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도, “재미있으니까 상관없어!”라고 외칠 정도로 열혈 전투광이다. “자신의 싸움을 위해 어른들을 이용해도 좋은지 몰라”라고 할 정도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도전적이고 자존심이 강한 척하지만 속마음은 여린 아스카보다 더 승부욕이 넘치는 캐릭터다. 또한 <파>에 의문을 남기는 캐릭터는 여전히 카오루다. <서>에서도 등장했던 정체불명의 소년 나기사 카오루는 이번에도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또 다음 편으로 넘어간다. <서>의 엔딩처럼 <파>의 엔딩에도 등장한 카오루는 3부 <에반게리온: 급>을 위한 여운을 남길 뿐이다. 카오루는 원작 TV시리즈 24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해서 에반게리온을 탈 수 있는 5번째 소년이자 마지막 사도 역할을 했던 캐릭터다. 그가 이미 신지를 잘 알고 있다는 식의 대사(“약속의 시간이야, 신지 군. 이번에 너만은 꼭 행복하게 만들어 보이겠어”)를 슬쩍 흘리는 것으로 봐서는, 이야기의 또 다른 변화가 예상 된다. <파>의 엔딩에서 인류의 종말처럼 ‘서드 임팩트’마저 예고하는 걸 보면, 스토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다.

긴급 수혈한 캐릭터들로 새로운 스토리라인을 구축했다는 점 말고도, <에반게리온: 파>를 봐야 할 이유는 또 있다. 한층 발전한 전투 신이 압도적인 영상을 선사한다. 디지털 3D CG로 만든 에바와 사도와의 전투 신은 기존의 로보트 애니메이션이 생산해냈던 비주얼과 역동성을 훌쩍 뛰어넘는다. 에바의 출격과 전투 신에서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의 생동감이 솟아난다. 일본에서 6월에 개봉한 <파>가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을 2주 연속 누르고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총 수익 4,200만 달러 돌파). TV버전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신지의 집착과 회의(심리적 갈등) 대신 <파>는 파격적으로 냉혹한 전투에 치중한다. 신지의 초호기와 레이의 0호기, 아스카의 2호기까지 세 대의 에반게리온이 총출동해 사도와 대결하는 신은 로보트물에서 전투의 묘미를 극대화하고 있다. 특히 에바가 신 도쿄시의 스카이라인을 뛰어넘어 사도를 향해 미친 듯이 전력질주하는 신은 <서>의 야시마 작전에서 보여준 전투의 전율을 훌쩍 넘어서버린다. 스스로 원작을 해체하고 새로운 신화를 탄생하는 순간이 에바의 전투에서도 이어진다. 아스카가 죽고 레이마저 사도에게 먹힐 위험에 빠지는 엔딩에서, 관객이라면 누구나 “신지, 어른이 되지 않아도 좋아! 어서 레이를 구해!”라고 외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날개를 주소서”라는 희망의 노래조차 낯뜨겁지 않다. 이것이 강력한 중독을 전파하는 에바의 세계다. 그리고 <파>가 끝나기가 무섭게 <급>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숙명이다. “You are not alone!”라는 에바의 메시지를 마음에 담고.

Credit

  • 글 전종혁 프리미어 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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