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괴, 가죽 꿰매는 사나이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이름’만 팔리는 시대지만, 그럼에도 어디선가 묵묵히 옷을 짓는 디자이너들이 있다. <엘르>의 한국 디자이너 인터뷰. 그 첫 번째 주인공은 디자이너 ‘요괴’. 투박한 손으로 가죽을 꿰매는 동시에 밭에 나가 배추를 심는, 양극단의 취향을 가진 사나이에 관한 이야기다.::김선욱,디자이너,엘르,엣진,elle.co.kr:: | ::김선욱,디자이너,엘르,엣진,elle.co.kr::

전화벨이 울렸다. 요괴. 함께 있던 이가 휴대폰 액정에 뜬 두 글자 이름을 보고 ‘뜨악’한다. “요괴? 마귀도 아니고 요괴??” 다소 기괴한 이름의 주인은 패션 디자이너 김선욱. 그의 주변 사람들은 이 세 글자 이름 대신 ‘요괴’라는 말로 그를 부른다. 국내의 한 내셔널 브랜드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던 그는 지난 2007년, 조직에서 벗어나 홀로 요괴라는 이름의 브랜드를 론칭했다. 모두가 ‘소년’을 만들던 지난 3년의 시간 동안 그는 홀로 ‘남자’ 만들기에 몰두했다. 백스테이지를 공개하는 독특한 형식의 쇼를 마친 뒤 다음 시즌을 준비 중인 그를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주말 오전에 인터뷰하자고 해서 놀랐어요. 개인 작업하는 디자이너들은 아무래도 밤늦게까지 일하고 늦게 일어날 거라는 편견이 있었거든요. 여기(요괴와 하투크라이온의 쇼룸 겸 트렁크 숍)에 이것저것 막 널브러져 있었는데 아침에 좀 치우느라고 일찍 일어났죠. 평소에도 5시 반이면 일어나요. 규칙적으로 시간 정해서 작업하는 편인가 봐요. 요즘 다음 시즌 옷 준비하고 있다는데 그럴 땐 예민해지는 편인가요? 예민해지는 시기가 따로 있긴 한데 그게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예민해지죠. 아는 이들도 있겠지만 익숙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일반적인 얘기부터 해볼게요. 내셔널 브랜드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독립해 ‘요괴’라는 브랜드를 론칭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계기는 욕심이죠. 내 것을 해보고 싶은 욕심. 회사에 다니다가 어느 날 ‘와, 이렇게 사는 건 정말 아니다’ 싶었죠. 옷 만들며 살려고 마음먹었을 때 처음 가졌던 꿈을 언젠가는 펼쳐야겠는데, 그 시기가 언제인지가 문제였어요. 졸업하고 바로 해보려 했지만 그땐 성숙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아, 그래. 완숙은 아니지만 반숙 정도는 됐다.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거 한번 해볼까?’ 그래서 하게 된 거죠. 브랜드명은 처음부터 ‘요괴’를 마음에 두셨나요? 처음엔 브랜드명에 대한 생각은 거의 없었어요. 하투크라이온 디자이너 임수정 씨와 술을 마시다가 생각하게 됐죠. 임수정 씨가 예전에 ‘옷신령’이라는 브랜드를 했었는데 느낌이 재밌다고 느꼈어요. 한글 이름인데다가 이미지가 뭐랄까…. 영적인 느낌? 네 그런 느낌이요. 신령, 무당, 괴물, 마귀. 그런 단어들을 떠올리다가 요괴는 어떨까 생각했죠. 나중에 론칭하면서 알게 됐는데 ‘요괴’라는 단어의 한자의 의미를 깊게 들어가 보면 ‘괴이하게 아름답다’는 뜻이거든요. 그런 이미지가 저와 잘 맞다고 느꼈어요. 영어나 프랑스어보다 각인되기도 쉽고요. 브랜드명 때문에 틀에 갇히는 느낌은 없나요? 보통 옷의 이미지에 따라 브랜드 이미지가 결정되곤 하는데 ‘요괴’라는 말은 이미 강렬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데요. 디자이너는 여러 부류가 있어요. 어떤 이들은 늘 새로운 것을 제시하면서 트렌드를 이끌어가죠. 발렌시아가나 라프 시몬스 같은 이들에겐 사람들이 늘 새로운 것을 원하잖아요. 하지만 외골수로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꾸준히 보여주는 디자이너들도 있어요. 아주 좁은 범위 안에서 말이에요. 저의 경우, 후자 쪽이 성향에 맞아요. 어떤 틀 안에서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싶죠. 그래서 브랜드 안에 갇혀 있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들어요. 생존하는 디자이너 중에 좋아하거나 신경 쓰이는 사람이 있나요? 좋아하는 디자이너는 확실히 있어요. 코스믹 원더. 사람들은 제가 옷을 ‘다크’하게 만드는 사람을 좋아할 거라 생각하지만 그보다 철학이 확실한 사람을 좋아해요. 코스믹 원더의 경우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 열정을 품고 있는 게 확실히 보이거든요. 그는 늘 빛과 우주, 자연 같은 것을 표현하려고 애쓰죠. 옷은 언제부터 만들었나요? 학생 때부터 꾸준히 만들었어요. 그때부터 작업실에 가서 옷 만드는 게 일상이었어요. 보통 학생들은 과제 때문에 옷을 만들지만 저는 놀기 위해서 했어요. 당시 한창 클럽이라는 게 생겼는데, 거기 입고 갈 옷을 만들기 시작한 거죠. 본인을 위한?(웃음) 네, 순전히 자신을 위해서요. 파티 날짜가 정해지면 이틀 전부터 디자인을 해서 패턴 뜨고 원단을 사서 봉제한 다음에 완벽하게 세팅해서 입고 놀러 나갔죠. 어떤 스타일이었나요? 당시 스타일은 지금보다 훨씬 더 키치하고, 뭐랄까 좀 변태스럽다고 할까요? 아무튼 좀 센 것들이었어요. 그런 식으로 옷을 가지고 ‘놀기’ 시작한 거죠. 2년 전, 데일리 프로젝트에서 쇼를 진행했을 때 신인 디자이너로 처음 소개됐는데요. 몇 년이 지난 지금 달라진 게 있나요? 그땐 자신감으로 가득했어요. 지금은 자신감이 적어졌다기보다는 감출 줄 알게 됐죠. 당시 인터뷰를 보면, 질문이 이상하면 ‘당신이 기자로서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이해할 수 없다. 당신을 어떻게 기자라고 할 수 있나? 이런 질문은 ‘씨잘데기’ 없으므로 패스!’ 이런 식으로 답했었죠(웃음). 그땐 좀 어렸고 매우 날카로웠어요. 지금은 똑같은 질문이 주어져도 그런 식으로 대하진 않죠. 지금은 기꺼이 웃어주나요?(웃음) 사실 이건 단편적인 얘기에요.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까 좀 성숙해진 거죠. 당시 인터뷰를 보면 강한 남자를 떠올리며 옷을 만든다는 이야기가 늘 등장해요. 호르몬이 넘쳐 주체하지 못하는 남자, 링 위에서 피 터지게 싸우는 K-1 파이터, 거친 트럭 운전사들의 이미지를 추구하신다고요. 그건 변하지 않아요. 어쩌면 제가 가지지 못한 남성의 모습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죠. 파이터들의 강한 이미지를 추구해요. 머리를 기르더라도 계집아이처럼 기르는 게 아니라 좀 ‘개’처럼 막 기른 그런. 아, 정말 디올 옴므 유행할 땐 주변의 ‘끼 부리는’ 남자들 보면서 정말 재수없다고 생각했죠. ‘남자다운 남자’를 추구한다기보다는 그저 강한 이미지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번 시즌 쇼에선 여성 모델에게도 그런 옷을 입혔잖아요. 저는 사실 옷을 봤을 때 “와! 저 옷 예쁘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예쁜 건 정말 모르는데 멋있는 건 알겠어요. 여자를 봐도 마찬가지에요. 제게 예쁜 여자는 없어도 멋진 여자는 있죠. 그래서 그땐 여자 모델에게도 남성적인 옷을 입혔어요. 반대로 남자에겐 치마를 입혔죠. 남자가 치마를 입는다 해서 여성스러워지는 건 아니거든요. 오히려 남성적이죠. 검도복이나 스코틀랜드 스커트 아래로 다리털이 삐져나온 장단지가 보이면 정말 멋지죠. 옷을 만들면서 가장 표현에 신경 쓰는 신체 부위가 있나요? 일단 남자는 머리가 커야 한다고 생각해요. 후드를 만들 때도 머리가 3개 정도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매우 크게 만들어요. 스키니 바지를 만들 때도 바지는 작게 만들지만 그것을 입는 남자의 허벅지는 굉장히 두꺼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허벅지 근육과 성기가 울룩불룩 튀어나오는 모습을 상상하죠. 아우터를 만들 때도 사람이 두 명 정도는 들어갈 수 있게 크게 만들어요. 더 강해 보이게, 커 보이게, 어두워 보이게 만드는 편이죠. 커머셜 라인을 따로 만들어 판매하는 걸 본 적 있어요. 커머셜하진 않았을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한 번 제품을 풀었던 적이 있긴 한데 굉장히 쓴맛을 봤죠. 이도저도 아닌 게 돼버렸어요. 상업적으로 만들고 아예 합리적인 가격에 판매했던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이번 시즌엔 쇼피스들을 그대로 판매하나요? 네. 그리고 추가적으로 디자인한 것들도 있고요. 지금은 멀티숍 플로(Flow)와 이곳 트렁크숍(Trunkshopseoul.com)에서 판매하고 있는데요, 유통을 더 늘려 나갈 계획인지요? 그럴 생각이 없어요. 늘려서 많이 팔면 물론 좋겠죠. 하지만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진 않아요. 현재로서는 그냥 제 개인적인 삶, 그리고 제 색깔을 이어가는 게 더 중요해요. 디자인 팀 없이 혼자서 작업하시죠? 디자인 팀이 있었다면 옷을 만들기 편했겠지만 옆에 누군가 있을 때 받는 스트레스가 있거든요. 예를 들면 그런 거예요. 고등학교 때 집 방향이 같은 친구가 있는데 서로 아는 거예요. 근데 친하지는 않죠. 어쨌든 마주쳤으니 20분 하굣길을 같이 걸어야 해요. 그런 상황의 스트레스 알아요? 할 말은 없고, 차라리 혼자 걷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죠. 저한테는 그런 마음이랑 비슷해요(웃음). 지난해 딤 레더(Dim Leather by Yokoe)라는 가죽 라벨을 론칭하셨어요. 가죽 소재의 매력은 뭔가요? 가죽은 원단 자체가 가진 힘이 강력해요. 가죽의 탄생에는 언제나 죽음이 있죠. 단백질에 이것저것 재료를 섞어서 만든 원단이 아니잖아요. 가죽이 생겨나려면 누군가 죽어야 하고, 누군가 죽으면 그 외피를 벗겨내야 하죠. 거기에 굉장히 강렬한 느낌이 있어요. 원단 안에 삶이 있다고 해야 하나? 그런 걸 느끼면서 작업하는 게 저는 좋아요. 예를 들면 물론 불법이지만 넓게 생각해보면 엊그제 제 친구가 죽었는데 그 친구의 가죽을 벗겨서 가방을 만드는 일. 그것과 같은 맥락이에요. 동물도 어찌 보면 내 친구잖아요. 생각해보면 가죽은 원단이 아니라 살이에요, 살. 살을 꿰매고 기워서 옷을 만들어 그걸 다시 살에 입히는 것. 그건 식물 인간의 눈을 빼서 다른 사람의 눈에 넣는 일과 일맥상통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매력적이죠. 가죽 옷의 경우 손으로 직접 꿰매서 만드신다고 들었어요. 옷의 경우에는 가죽 부분만 손으로 꿰매요. 원단과 가죽이 섞인 옷의 경우 원단을 기계로 하고 가죽 부분은 손으로 직접 꿰매서 둘을 연결하죠. 매우 오래 걸려요. 가방 등의 액세서리는 모두 손으로 만들고요. 옷 말고 또 어떤 것에 관심이 있으세요? 시골이요. 전 빨리 시골에 가서 살고 싶어요. 시골의 새벽이 좋아요. 기운 자체가 서울과 다른 것 같아요, 평화롭고, 고요하고. 이해할 수 없거나 못마땅한 패션이 있으세요? 그런 생각 안 갖는 게 속 편해요. 저도 예전에는 그랬어요. ‘저 사람은 대체 왜 저런 데서 저런 옷을 사 입지? 근데 이제는 저들이 뭘 입건 상관 안 해요. 한 가지 안타까운 건 있어요. 비싸 보이지 않은 옷을 비싼 돈을 주고 사는 거. 그건 못마땅하다기보다는 불쌍한 일이죠. 아무리 봐도 그만한 돈을 주고 살 만한 가치는 없어 보이니까요. 그렇다면 비싼 돈을 주고 살 만한 옷은 어떤 건가요? 디자이너로서 뚜렷한 생각이 담긴 옷, 분명한 철학이 담긴 옷이요. 그런 건 아무런 디테일이 없어도 큰 돈을 주고 사야겠단 생각이 들죠. 발맹 같은 브랜드가 굉장히 유행이었잖아요. 전 그런 옷 싫어하거든요. 옷이 스스로 말하잖아요 ‘난 너희들과 달라!’ 라고요. 온갖 디테일을 쏟아 부은 것처럼 갑옷처럼 보이는 옷이죠. 근데 그게 제 눈엔 굉장히 싸 보이거든요. 그걸 몇백만 원씩 주고 산다는 걸 이해할 수 없어요. 아무런 현실적인 제약 없이 쇼를 할 수 있다면, 어떤 걸 해보고 싶으세요? 어? 그런 건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아무런 현실적인 제약이 없다면…. 그건 제게 너무 큰 꿈이라서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늘 현실에 맞춰 만드는 데 익숙해진 건지. 이 질문은 남겨둘게요. 1 딤 레더(Dim Leather)의 이미지 북. 예쁘장한 모델이 아닌 근육질의 ‘진짜’ 남자를 모델로 세웠다.2 2010 F/W 컬렉션의 인비테이션에 사용된 이미지. 가죽을 다루는 그의 마음을 보여준다. 3 강한 동시에 유머러스한 딤 레더(Dim Leather)의 이미지. *자세한 내용은 엘르 본지 8월호를 참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