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까지 스페인은 요리 문화와 전통에 관한 한 유럽의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올해 최고 권위의 레스토랑 매거진이 발표한 ‘산 펠레그리노 베스트 레스토랑 리스트’에 스페인은 무려 네 곳의 레스토랑을 톱 10에 올려놓았다. 2000년대 들어 스페인이 새로운 미식의 수도로 등극하는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프랑스의 요리사 폴 보퀴즈 등이 중심이 되어 화려하게 꽃피운 누벨 퀴진은 1970년대부터 20여 년간 세계 요리를 지배했다. 이후 프랑스 요리업계가 자만심과 매너리즘에 빠져 정체기를 겪으며 뉴욕과 런던의 요리사들이 급부상하는 사이 스페인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스페인 요리를 세계화하자는 취지로 시작된 이 움직임은 요리사, 화학자, 레스토랑업계, 정부의 긴밀한 공동 작업으로 이루어져 산지 재료에 과학적이고 창의적인 요리법을 결합한 모던 스패니시 퀴진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 새로운 혁명의 중심에는 분자 요리법의 선구자 페란 아드리아가 있다. 페란 아드리아는 1962년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로스피탈레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요리 세계와 거리가 멀었다. 그는 요리에 특별한 소질이 있지도 않았으며 요리학교를 다니지도 않았다. 축구와 파티를 좋아하던 그는 유흥비 마련을 위해 호텔 식당에서 접시 닦이를 했고 이 경력으로 19세에 군대에 들어가 취사병으로 복무했다. 이를 계기로 요리에 대한 열정과 천부적 재능에 눈뜬 그는 제대 후 1984년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엘 불리’ 레스토랑에 들어간다. 재능을 인정받아 18개월 만에 수석 주방장에 오른 아드리아는 전혀 새로운 미식 세계를 펼쳐 보이며 까다로운 미식가들을 신선한 충격에 빠뜨렸다. 페란 아드리아의 지휘 아래 눈부신 성장을 이룬 엘 불리는 1997년부터 현재까지 미슐랭 스리 스타 레스토랑의 지위를 유지해오고 있으며 레스토랑 매거진에 의해 총 4회에 걸쳐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으로 선정되었다(2002년, 2006~2009년, 2010년 2위) 페란 아드리아에게 모든 요리는 새로운 도전과 실험 끝에 탄생한 유니크한 창작품이다. 지속적인 창조를 위해 그는 1년 중 6개월만 손님을 맞는다. 나머지 6개월은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아이디어와 영감을 얻고 바르셀로나의 실험실로 돌아와 화학자와 함께 새로운 맛과 레서피를 완성하는 데 바친다. 엘 불리만의 독특한 맛, 질감, 향, 형태가 담긴 요리 하나를 위해 5000개 이상의 실험 요리들이 버려진다. 카탈루냐 지방 산골에 자리한 엘 불리는 미식가들의 성지가 되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예약하기 힘든 레스토랑으로 꼽힌다. 예약 경쟁률이 평균 1000대 1에 달하는 폭발적인 인기에도 엘 불리는 1년의 절반은 문을 닫는 고집스러운 정책으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감수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세계 각지에 분점을 내서 큰돈을 벌 수도 있는 기회도 마다하고 오로지 요리 연구에 열을 올린다. 게다가 좀 더 창조적인 요리를 만들기 위해 아예 올해 12월부터 2014년까지 엘 불리의 문을 닫는다고 발표해 다시 한번 요리업계를 놀라게 했으며 그의 분자 요리를 맛볼 기회를 손꼽아 기다리던 미식가들을 상심하게 했다. 세계 요리업계에 커다란 붐을 일으킨 분자 요리란 무엇인가. 프랑스의 물리화학자 에르베 티스가 창시한 분자 요리법은 원재료의 맛을 최대한 살리면서 모양을 변형시키거나 식재료와 조리시간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새로운 맛과 질감을 창조해내는 요리법으로 페란 아드리아라는 천재 요리사에 의해 결실을 보게 되었다. 아스파라거스와 검은 송로버섯으로 만든 얼린 막대 사탕, 딸기 머랭으로 만든 알파벳 수프, 구면화 처리한 완두콩 라비올리, 시리얼을 곁들인 얼린 에어 파르메산, ‘아이스크림은 왜 항상 달까?’라는 의문에서 만들어진 미네랄 맛 아이스크림, 이름도 역설적인 뜨거운 아이스크림 등 상상을 초월하는 기상천외한 아드리아의 요리들은 미식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 진보된 식문화의 미래를 그려보게 한다. 오감을 자극하는 기발한 상상력이 총동원된 그의 요리는 전통주의를 신봉하는 동료 요리사로부터 질투 섞인 비난을 받음과 동시에 한편에서는 뜨거운 지지와 함께 모방과 추종을 낳는 등 요리업계를 논란으로 양분화시키기도 했다. 그가 분자 요리의 선구자로서 미각의 신기원을 이룩한 요리 혁명가임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요리가 분자 요리로 한계 지어지는 것을 거부하고 ‘누에바 누벨 퀴진’이라는 명칭을 선호한다. 시각적으로 모던 아트를 연상시키는 그의 요리는 미술계에서도 인정받아 2007년 요리사로는 최초로 현대미술 전시회 ‘카셀 도큐멘타’에 참여했으며, 올해 가을 학기부터는 하버드대에서 요리 물리학을 강의할 예정이다. 단순히 요리사라기보다 발명가이자 연금술사라는 명칭이 썩 어울리는 아드리아다운 행보다. “메뉴는 한 편의 영화와도 같다. 시작과 끝이 있고 그 사이에 스토리가 존재한다. 1년 후에 나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똑같은 영화를 다시 보여줄 수는 없다” 라고 말하는 페란 아드리아. 긴 공백 끝에 찾아올 그의 귀환이 어떤 놀라움을 몰고올지 벌써부터 세상이 주목하고 있다. 대서양 건너 뉴욕에서도 작은 혁명이 일어났다. 지난 10여 년간 뉴욕의 다이닝 신은 눈부신 발전을 거두었지만 몸매에 신경 쓰는 뉴요커들의 식단은 아직도 어딘가 심심해 보였다. 그들에게 단조롭고 값비싼 스시 이상의 건강식은 없는 걸까. 바로 이때 그들을 새로운 맛의 세계로 인도해준 요리사가 등장했다. 반갑게도 그는 어머니가 직접 담근 김치를 먹고 자란 한국계 2세다. 2004년 데이비드 장이 뉴욕에서 작은 누들바 ‘모모푸쿠’를 열었을 때 지금의 성공을 예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무난한 요리들을 내놓았으나 여느 누들바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요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근근이 식당을 유지해가던 그는 이왕 문 닫을 바에야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것을 맘껏 만들어보기로 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손님과 상패들이 그에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현재 각기 다른 컨셉트를 표방하는 6개의 모모푸쿠 레스토랑을 가진 그의 왕국은 계속 성장해가며 뉴욕 레스토랑업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다. 1977년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자수성가한 한국 이민자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데이비드 장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준 한국 요리와 단골 중식당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때 7개의 레스토랑을 경영하던 그의 부친은 곱게 키운 아들이 고된 일을 하는 요리사가 되는 것을 결코 생각해본 일이 없었고 아들이 주방에 들어오는 것을 말리곤 했다. 하지만 주변 성장 환경은 그에게 다양한 아시아 식재료에 대한 경험과 창의적인 영감을 제공했다. 대학 졸업 후 다른 진로들을 노크해보았으나 적성에 맞지 않았던 그는 결국 요리학교 프렌치 컬리너리 인스티튜트(FCI)를 수료하고 미국과 일본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밑바닥부터 일을 배웠다. 자신이 일했던 고급 레스토랑의 젠체하는 분위기에 거부감을 느꼈던 그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식당이 아닌 맛있고 부담 없는 가격의 대중 레스토랑에 대한 열망을 품게 되었다. 누들바에서 초기의 시행착오를 거쳐 “내가 만들고 싶은 음식과 고객이 원하는 음식 사이의 절묘한 선”을 찾은 데이비드 장은 한·중·일의 아시아적 풍미에 프랑스의 미적 스타일을 가미한 새로운 요리를 창조했고 다른 라면집이 흉내 낼 수 없는 라면 이상의 것을 내놓았다. 특히 해선장 소스를 바른 삼겹살 구이와 직접 담근 오이피클을 부드러운 빵 사이에 끼운 ‘포크번’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그의 시그너처 요리가 되었고, 이를 발판으로 2007년 제임스 비어드 재단이 수여하는 ‘올해의 신인 셰프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그의 식당은 캐주얼한 분위기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미리 예약해야만 맛볼 수 있는 미식가들의 명소가 되었다. 2006년 두 번째 식당 ‘모모푸쿠 쌈바’는 한국식 보쌈 요리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되었다. 그의 창의성이 가미된 돼지고기 보쌈 요리는 2008년 그에게 제임스 비어드 재단 최우수 뉴욕 요리사상을 안겨주었고, 쌈바는 <뉴욕 타임스>에서 ‘최우수 뉴 레스토랑’으로 선정되었다. 2008년 연 ‘모모푸쿠 코’는 코스 요리 전문 레스토랑으로 모든 요리사들의 꿈인 미슐랭 별 두 개를 받았다. 같은 해 디저트 전문 ‘베이커리 & 밀크바’와 2010년 4월 베트남 퓨전 레스토랑 ‘마뻬슈’를 잇따라 개업하며 멈추지 않는 창의성과 열정을 보여주고 있는 그는 올해 <타임>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되었다. 자신의 별명처럼 ‘King of Pork’로 등극한 것이다. 아시아와 유럽을 아우르는 다양한 문화를 예술적으로 조합했다는 찬사를 받으며 요리사에게 주어지는 모든 상을 휩쓴 그는 이제 직접 요리하기보다 경영과 해외 탐방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국의 사찰에 머물며 사찰 음식을 배워가기도 한 그가 다음엔 어떤 맛의 세계를 보여줄지 궁금해진다. 전 세계적으로 웰빙 푸드 열풍이 시작된 지 오래이며 한식은 웰빙 푸드를 선도할 만한 여러 요건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를 세계인의 구미와 감성에 맞게 접근시키지 않는다면 한식의 세계화는 앞으로도 요원할 것이고 세계의 요리 문화에서 다른 국가가 차지하는 위상을 언제까지고 부러워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여기에 데이비드 장이 보여준 활약은 한식의 세계화에 대한 희망과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는 듯하다. 그에게 뉴요커들이 열광하는 것은 자신의 문화적 뿌리를 반영한 퓨전 요리를 그들에게 맞는 스타일로 선보여 새로운 맛에 대한 갈망을 채워준 데 있다. 그는 자신의 요리를 통해 직접 담근 김치와 된장을 성공적으로 내놓으며 뉴요커들의 입맛을 한식에 길들여가고 있다. 페란 아드리아의 요리는 질투 섞인 비난과 함께 뜨거운 지지를 받아 요리 업계에 논란을 일으켰다. 어쨌든 그가 분자 요리의 선구자로서 미각의 신기원을 이룩한 혁명가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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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자신의 재능과 영향력을 주방에 국한시키지 않고 적극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발휘하는 요리사도 있다. TV쇼 ‘더 네이키드 셰프’를 통해 젊은 천재 요리사로 각광받으며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제이미 올리버는 순식간에 미디어의 총아가 되었다. 이후 수많은 TV 쇼에 출연해 자신의 요리 철학을 펼친 그의 경력은 미디어 활동과 함께 성장해왔다. 요리에 대한 놀라운 재능과 함께 신선하고 정직하며 맛있는 요리의 창조에 열정을 보여온 그는 최근 영국과 미국에서 건강한 식습관을 통한 비만 추방 캠페인을 벌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는 불과 7~8세부터 부모가 운영하는 펍 레스토랑에서 자연스럽게 요리를 배웠다. 16세에 학교를 떠난 그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수련을 쌓았는데 영국 풀햄의 ‘더 리버 카페’에서 부조리장으로 있던 중 1999년 BBC 관계자의 눈에 띄어 TV에 데뷔하게 된다. 젊은 요리사가 진행하는 ‘더 네이키드 셰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간편한 조리법을 소개해 많은 인기를 모았고 그가 펴낸 요리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그는 수상관저에 초청되는 등 가파른 스타덤에 올랐다. 부와 명성을 쌓게 된 그는 곧 사회 환원에 눈을 돌렸다. 2002년에 피프틴(fifteen) 재단을 설립하여 매년 불우한 배경을 지닌 15명의 젊은이에게 요식업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그는 이런 활동을 인정받아 2003년 왕실 훈장 MBE를 받았다. ‘피프틴 채러티 레스토랑’은 런던에서의 성공에 힘입어 이후 암스테르담과 멜버른에 분점을 낸다. 2005년에는 ‘Feed Me Better’라는 캠페인을 시작하는데 이는 영국 학교의 어린이들에게 건강한 음식을 섭취하고 정크푸드를 멀리하도록 교육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같은 해 <제이미의 스쿨 디너스>라는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통해 그린위치의 학교 급식 현장에 뛰어들어 직접 운영을 맡아 아이들의 학교 식단을 개선해가는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이는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켜 영국 정부로부터 예산 집행 약속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영국민들은 그를 2005년 ‘정치적으로 가장 영감을 준 인물’로 선정했다. 그의 다음 행보는 ‘Jamie’s Ministry of Food’라는 일련의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요크셔 로더햄을 여행하며 사람들에게 건강식에 대해 일깨워주었고 2009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웨스트 버지니아의 헌팅턴을 여행하며 패스트푸드에 의존하는 식생활로 인해 심각한 질병과 폐해를 앓고 있는 미국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한편 그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 남부를 깊숙이 여행하며 느낀 인종차별의 심각성과 비인간적인 미국 의료보험정책에 대해 솔직한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그가 2010 TED 프라이즈를 수상함으로써 그의 캠페인은 다시 한번 미디어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그는 연설을 통해 헌팅턴에서 실시한 항비만 프로젝트 도중 겪은 생생하고 충격적인 일화들을 소개하면서 음식에 대한 우리의 무지에 대해 강렬한 비판의 메시지를 던졌다. 건강하지 못한 식습관으로 사망률이 교통사고 사망자의 15배가 넘고 자녀 세대의 평균수명이 부모 세대보다 줄어들고 있는 심각한 현실에 대해 경고한 그는 건강한 식탁이 패스트푸드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역설하면서 가공식품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벌였다. 한편 학교 급식에서 패스트푸드를 몰아내고 어린이들에게 취미가 아닌 절박한 생존 수단으로 음식과 간단한 요리에 대한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비만을 퇴치하자고 촉구했다. “모든 어린이에게 음식에 대해 교육하는 강력하고 지속적인 운동을 전개하고 가족들이 직접 요리하도록 격려하여 모든 곳에서 비만과 싸우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자”는 그의 연설은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다양한 후원을 이끌어냈다. 세계 최고 요리사가 된 이후 자신의 부와 명성을 사회에 선용하고, 단순하고 정직한 음식에 대한 헌신과 세상 사람들을 건강하지 못한 식습관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실천해가고 있는 그는 단순한 요리사가 아닌 열성적인 사회운동가이다. 올리버가 사회운동가라면 댄 바버는 친환경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식재료 생산 환경에 대한 비판과 연구를 통해 식단과 먹을거리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촉구한 요리사다. 생각하는 요리사로 불리는 댄 바버의 요리 철학은 ‘농장에서 식탁으로’다. 요리사이기 전에 농부인 그는 음식을 위한 가장 친환경적인 선택이 가장 윤리적이고 맛있는 선택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기업형 대규모 농업이 초래하는 생태계 파괴와 자원 고갈에 대해 경고해온 그는 자연에서 해결책을 찾는 농법을 제안한다. 바버는 이를 실천해온 농부들을 찾아 세계 각지를 찾아다니며 각종 강연과 기고를 통해 그 결과물의 경이로움을 널리 알리며 자연의 운영 법칙을 따르는 새로운 개념의 농업을 설파하고 있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농장에서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요리를 시작했던 그는 2000년 5월 가족들과 함께 뉴욕 맨해튼에 레스토랑을 열었고 할머니 농장의 이름을 따서 ‘블루힐’이라 이름 지었다. 자신이 직접 재배한 식재료에 애정을 쏟고 의미를 부여하여 각각의 재료가 지닌 최상의 맛을 이끌어내는 그의 능력은 곧 미식가들을 매료시켰다. 그는 2002년 <푸드 & 와인 매거진>이 선정한 미국 최우수 요리사상, 제임스 비어드 재단의 뉴욕 최우수 요리사상(2006)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그의 또 다른 레스토랑인 ‘블루힐 스톤 반즈’는 단순한 레스토랑이 아니라 색다르고 멋진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소로 뉴욕에서 30마일 떨어진 태리 타운에 위치하고 있으며 농장, 레스토랑, 교육기관으로 이뤄진 식량 농업 센터다. 스톤 반즈 센터는 록펠러가에서 지은 비영리 단체로 3000만 달러의 자금과 4년여의 시간에 걸쳐 완공되었다. 댄 바버가 이사를 맡고 있기도 한 스톤 반즈 센터에는 음식에 대한 그의 열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고객들은 식사를 하기 전에 드넓은 농장과 그곳에서 스트레스 없이 자라는 가축들, 유기농 채소들을 둘러보며 자연을 만끽하고 건강한 식탁에 대해 생각해보는 경험을 갖게 된다. 사람들의 식탁에 조용한 혁명을 일으켜 생태 자원 보존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농부이자 요리사인 댄 바버. 그는 현재 하버드 의대 보건 및 지구 환경 센터의 자문위원이자 뉴욕 그린 마켓, 미국 슬로푸드 단체를 위해 일하며 좋은 음식의 진정한 가치를 알리는 전도사로서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다. 2008년에 이어 올해도 TED 연사로 나선 그는 스페인의 한 양식장을 소개하며 미래를 위한 농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기업형 농업 모델의 낙후성과 폐해를 지적하고 생태적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진정한 과학은 수치나 효율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자연에 대한 존중이라는 점을 환기시킨 그의 연설은 깊은 울림을 전달했다. 음식에 대한 진한 애정과 함께 요리사로서 강한 책임 의식을 지니고 자신의 신념을 실천해가는 그의 모습은 건강한 음식 문화의 미래이자 희망이다. 과거에도 수많은 유명 요리사가 존재하며 업적과 명성을 쌓아왔지만 요리사의 세계는 여전히 그들만의 리그였다. 하지만 요즘의 스타 셰프들은 어느 셀러브리티 못지않은 부와 명성을 누리고 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요리사로 꼽히는 고든 램지. 때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하지만 TV 쇼를 통해 국제적 스타로 등극하며 요리사들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한 그의 업적은 부인할 수 없다. 모두 12개의 미슐랭 스타를 받은 이 영국의 스타 셰프는 세계적으로 성공한 레스토랑 사업가로 요리와 비즈니스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전 세계 주요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거부다. 큰 키에 우락부락한 외모, 불 같은 성미와 거친 입을 자랑하는 그는 TV에서 사람들에게 고함을 치고 무자비한 욕설을 내뱉으며 전 세계 시청자들과 친숙해졌다. 스코틀랜드 노동자 계급 출신인 그의 어린 시절은 알코올 중독에 난봉꾼이었던 부친의 학대로 점철되었다. 일찌감치 집을 떠난 그는 축구선수를 꿈꾸었으나 19세의 나이에 부상으로 꿈을 접고 호텔 경영을 공부한 뒤에 요리계에 입문한다. 주방 보조에서 시작해 런던의 레스토랑을 전전하며 일을 배우던 그는 뛰어난 요리와 까다로운 성미로 유명한 마르코 피에르 화이트 밑에서 일하게 된다. 3년간 혹독한 수련을 거치며 화이트의 욕설과 폭력에 지친 램지는 프랑스 레스토랑으로 옮겨 알베르 루 밑에서 프랑스 요리를 배운 뒤 파리로 건너가 미슐랭 스타 요리사들과 일하며 실력을 쌓는다. 각고의 노력과 실패를 거쳐 1998년 장인의 도움으로 마침내 첼시에 자신의 레스토랑을 연 그는 2001년 세 번째의 미슐랭 스타를 받으며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된다. 명성을 쌓아가던 그는 2004년부터 두 개의 TV쇼를 진행하게 된다. 요리사 지망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리얼리티쇼 ‘헬스 키친’과 망해가는 레스토랑 구조 프로그램인 ‘램지의 키친 나이트메어’가 그것이다. 쇼가 크게 성공을 거두자 그는 미국에서도 같은 쇼를 진행하면서 국제적인 유명 인사가 된다. ‘헬스 키친’에서 그는 허술하기만 한 수련생들을 가차 없이 몰아세우며 호되게 닦달한다. 한 출연자에게 명예훼손 소송을 당하기도 한 그는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비판에 대해 실제로 급박하게 돌아가는 주방에 가보면 욕이 절로 나올 것이라고 응수한다. ‘키친 나이트메어’에서는 무능한 주방장과 주인을 세워놓고 듣는 사람의 체면은 아랑곳없이 거침없이 독설을 퍼부어 갈등을 빚지만 결국 레스토랑 주인의 고집을 꺾는다. 최고의 요리사인 그는 항상 옳기 때문이다. 그는 불결하고 어수선한 주방을 뜯어내고 복잡하기만 한 메뉴를 없애 단순하고 신선한 요리를 제공한다. 실제로 많은 실패를 경험한 그는 요리가 외면당하는 이유와 왜 손님이 떠나며 레스토랑이 망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주방에서 하루 17시간의 중노동을 견뎌내고 오로지 실력과 근성 하나로 버텨 오늘날의 성공을 이루어낸 그의 조언을 외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글 김잔듸(프리랜스 작가)
제이미 올리버는 자신의 부와 명성을 사회에 선용하고 정직한 음식에 대한 헌신을 실천하는, 단순한 요리사 그 이상의 사회운동가다.
*자세한 내용은 루엘 본지 8월호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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