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의 연애 || 엘르코리아 (ELL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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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의 연애

확고한 주관, 주위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시크한 애티튜드. 고도의 전문성과 일상에서 드러나는 허술한 면모. 나만 알고 싶은 '덕후'의 매력

ELLE BY ELLE 2019.04.26


‘오타쿠’라 하면 어떤 모습이 먼저 떠오르나? 연애와 거리가 먼 것만은 확실하다. 인터넷을 10분만 뒤져도 ‘오타쿠 모태 솔로의 카톡 대참사’ 같은 짤이나 <오타쿠는 연애하면 안 되나요> <오타쿠에게 사랑은 어려워> 같은 만화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너드(Nerd)나 긱(Geek) 역시 동서양의 차이일 뿐, 사전적 정의는 동일하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너드와 페이스북의 설립 과정을 그린 영화 <소셜 네트워크>에서 마크 저커버그(제시 아이젠버그)에게 여자친구 에리카(루니 마라)가 던진 이별 통보만 봐도 그 처지가 짐작 가능하다. “넌 네가 IT에 푹 빠진 ‘긱’이라서 여자애들이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여자애들이 널 좋아하지 않는 건 바로 네가 재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야.” 생각만 해도 끔찍한가? 하지만 나는 다음 설명으로 그들이 고상하면서도 치명적인 매력(혹은 그 가능성)의 소유자라고 말하고 싶다. 그 특유의 매력은 오타쿠를 정의하는 제1 특징, 어떤 주제에 대한 집요한 애정에서 비롯된다. 사회적 관심과 시선, 대중의 취향, 물질에 전혀 영향받지 않는 외골수적 사랑 말이다. 그게 컴퓨터든 만화든, 하물며 네 명의 오타쿠의 사연을 그린 일본 연극 <취미의 방>의 ‘도이’처럼 귤을 까는 새로운 방법에 관한 것이든 맹목적이며 상상 이상으로 전문적이다. 너드 영화의 선조 격인 <웨인즈 월드>의 웨인(마이크 마이어스)과 가스(데이너 카비)는 작은 지하실 스튜디오에 모여 개인 라디오 방송에 목숨을 건다. 팟캐스트의 개념조차 없던 시절, 그들만의 진지한 유희에 푹 빠진 모습은 물론이고 “사람들이 오로지 돈 되는 일만 하는 것 같아 참 슬프단 말이지”라는 대사는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남자 너드의 비율이 현저히 높은 건(혹은 높아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이 고상한 덕력은 남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가 여자들이 재미없다고 했나?’라는 글귀로 <베니티 페어> 커버를 장식한 미국 코미디언 티나 페이, 영국에서 남녀 불문하고 가장 유명한 너드 중 한 명인 배우 미란다 하트, 그리고 너드였던 자신의 학창 시절을 투영해 만든 시리즈 <더 민디 프로젝트>로 큰 성공을 거둔 프로듀서이자 배우 민디 캘링 등 세상에는 트렌디하지 않지만 조금 이상한, 그래서 대체 불가능한 여자 너드가 얼마든지 존재한다. 민디 캘링은 자서전 <모두 나만 빼고 노는 거야? Is Everyone Hanging Out Without Me?>에서 ‘누군가 내가 뚱뚱하다고 해서 밤새워 가며 괴로워하지 않지만 멍청하다거나 재미없다는 말은 참을 수 없다’고 적었다. 미란다 하트 역시 책 <미란다처럼>에서 180cm에 달하는 거구로 종종 ‘아저씨’라는 소리를 듣지만 눈썹 염색이나 얼굴 마사지, 예쁜 핸드백이 있어봤자 조금 나은 버전의 자신이 될 뿐이니 적당히 깨끗하고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낫다고 당당히 말했다.


처음으로 돌아가 오타쿠의 특징을 다시 정리해 보자. 촌스러운 패션 감각? 옷에 집착하지 않는 대신 돈에 연연하지 않는다. 반사회적인 습성?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건 획일화된 대세를 따르거나 기득권층에 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그러니까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야말로 호감의 결정적 도화선 아닌가. 그리하여 나의 지난 연애에서 마니아 기질을 가진 상대들은 그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알 수 없는 남자’가 되곤 했다. 솔직히 쉽지 않은 상대였다. 세상의 모든 연애는 시간이 걸리는 법이지만, 마음을 열고 긴밀한 관계를 맺기까지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인내심이 필요했다. 그동안 꽤 다양한 스타일의 남자들과 연애를 해왔다고 자부해 왔건만, 이 남자의 머릿속은 내가 경험했던 어떤 회로와도 로직 그 자체가 달랐다. 서툴기 짝이 없는 그의 시그널을 해독하는 일은 미적분을 방불케 했다. 밀당 같은 건 통하지도 않았으니 자존심 따위는 내려놓고 최대한 솔직하고 분명하게 원하는 것을 말해야 했다(연애할 때 그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게다가 그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애니메이션을 찾아보는 일이 잦아질수록 어쩐지 나도 같은 부류가 되는 기분이었다. 가장 슬픈 사실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그의 인생에서 내가 첫 번째일 수 없다는 거였다. 이미 그들에게는 부동의 우선순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꿈의 기기가 입고됐다며 데이트를 취소하고 달려가는 건 다반사고, 그의 수집품은 너무도 소중한 것이라 손끝 하나 댈 수 없었다. 남자친구의 반려동물에게 질투를 느끼는 여자들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내 경쟁 상대가 무생물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갑자기 그들이 부러워질 정도였다. 이게 ‘팬질’인지 연애인지 헷갈렸던 악몽. 하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을수록 집착하게 된다는 건 연애의 오랜 진리다.


그게 마냥 싫었다는 건 아니다. ‘덕밍아웃’을 하자면, 나도 애초에 약간의 덕질을 즐기곤 했다. 그렇다고 ‘일코(일반인 코스프레)’를 해야 할 정도는 아니다. 어릴 때부터 만화책 좀 읽고 게임을 즐기며 장난감을 몇 개(그래, 수십 개) 모으는, 그저 ‘덕후스럽다’고 표현할 수준이다. 한 남자는 그걸 ‘층위’라고 표현하면서 반전 매력에 끌렸다고 털어놨다.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여자 주인공이 축구팀 FC 바르셀로나의 팬이라는 이유로 호감 지수가 70점에서 단숨에 90점으로 수직 상승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여기엔 숨은 룰이 있다. 만화책 <슬램덩크>나 <나루토> 같은 명작은 괜찮지만 ‘모에(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장인물에 대한 강한 애정을 일컫는 덕후 용어)’를 불러일으킬 만한 매체는 안 되고, 게임 <GTA>는 얼마든지 환영이지만 PC방에서 <리니지>에 매진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는 식이었다. 그가 원한 건 완전한 덕후가 아니라 “그래, 난 정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 같은 말을 받아칠 줄 알고, 가끔은 함께 플레이 스테이션을 즐길 수 있는 여자였다. 동성 친구와 나누던 취향을 공유하고 나아가 설렘까지 경험할 수 있는 양성적인 취향의 여자가 오랜 이상형의 한 축이라는 건 그다지 놀라운 사실도 아니다. 그리고 그 판타지는 덕력(덕후가 아닌)으로 치환될 수 있다.


요즘은 ‘쿨’한 덕후의 시대다. 패션계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타쿠야말로 ‘뉴 블랙’, 그러니까 위험하고 중독적인 매력의 새로운 트렌드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얘기다. 그중에는 피규어 수집 같은 걸 부유한 취미의 하나쯤으로 여기는 페이크 오타쿠도 있지만, 일반인에 가까운 패션 센스와 ‘덕’의 기질을 고루 갖춘 이들도 꽤 있다. 얼마 전 친구 A가 첫눈에 반했다고 털어놓은 그 남자 역시 반듯한 외모와는 달리 알고 보면 꽤 극단적인 취향(그래, 변태적인)의 애니메이션 마니아였다. 첫 만남에서 넷플릭스의 <토이>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추천하며 피규어와 애니메이션에 대한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는데, 그 모습이 꽤 지적인 데다 외모와 상반되는 의외성이 그렇게 치명적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3일 후, 그녀는 이런 비보를 전해왔다. “알고 보니 여자에게 인기가 굉장히 많은 데다 여성 편력이 심하대. 피규어처럼 여자친구들도 수집하나 봐. 아주 나쁜 놈이었어!” 그리고 이런 위험한 농담을 덧붙였다. “아, 나도 컬렉팅당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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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글 김희민
    에디터 김영재
    사진 TAKAY/TRUNK ARCHIVE
    디자인 오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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