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지 모를 공간에서 의자에 앉은 한 여자는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머릿속에는 시공간을 넘나드는 격정적인 공연을 실현 중이다(연습연 C). 제17회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수상작가 오민의 새로운 시도를 담은 개인전이 막을 올렸다. 서울대학교에서 피아노 연주와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고, 예일대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오민은 영상과 퍼포먼스를 통해 추상과 구상의 컴포지션을 만들어왔다. 이런 컴포지션에서 발견되는 논리는 어린 시절 피아니스트로 훈련받았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익숙해진 음악 언어에 기반한다. 우리가 음악을 들을 때 그 안의 구조나 음이 쓰여진 논리를 모르면서 그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오민 작가의 작품도 겉으로는 많은 일이 일어나는 것 같지 않고 굉장히 간결해 보이지만, 그 속에 고전 예술가처럼 치밀한 탐구를 통해 구축한 시간과 관계의 정교한 구조가 담겨 있다. 다소 난해하게 다가올지 모를 이 대화는 11월 4일까지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만날 수 있는 <연습곡>을 감상하는 또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연습곡>이란 전시의 주제는 어디에서 왔나 지난해 뉴욕에 머물 때 줄리아 울프라는 작곡가의 음악을 접했는데, 굉장히 특이했다. 주제가 곧 제시될 듯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 느낌? 계속 중간 상태에서 공회전하는데도 엄청난 속도감이 느껴지는? 그 원인을 추적하던 중, 절친 피아니스트 이영우가 지난해 서울대 음대에서 기획한 ‘에튀드의 모든 것’이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열두 명의 현대음악 작곡가와 열두 명의 피아니스트를 초대해 새로운 연습곡을 만드는 프로젝트였다. 연습곡을 보면 그 시대의 음악에 어떤 연주법이나 기술이 많이 쓰이는가를 알 수 있다. 과연 2017년 ‘연주자에게 필요한 기술은 무엇일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연습곡이란 것은 완성 이전의 상태 아닌가? 또 굉장히 신체적인 음악이고. ‘중간 지점에서 발생하는 빠른 속도감’이 줄리아 울프의 음악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 연습곡에 대한 리서치를 시작했다. 연습곡에 대한 리서치를 하면 할수록 흥미로운 지점이 많이 나와 독립 주제로 분리했다.  그렇게 탄생한 4개의 작품을 ‘인식하는 기술’을 연습하기 위한 연습연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기술’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그것이 신체에만 국한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가’도 기술이지 않을까 하는. 이제까지 영상과 공연을 제작하면서 인터뷰나 오디션을 통해 각 작업에 적합한 협업자를 찾아왔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무슨 기술을 찾으려는지 반추해 봤고, 결국 그것은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문제로 귀결됐다.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이것을 실행해서 연습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 지금 인터뷰하고 있는 순간도 우리가 이렇게 마주보고 있지만, 어떤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보기도 하고, 어떤 대답을 하는 것이 좋을지 미래를 보기도 한다. 또 여기 물리적인 공간을 보기도 하지만, 생각할 때는 내 안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연습연 A·B·C·D’는 이처럼 인식과 관련된 공간과 시간, 보는 행위 사이의 관계를 설정한 뒤 단계를 나눠 구조를 짜고, 여기에 인물과 장소, 행동, 장면, 형태, 앵글 등을 정교하게 엮어 만든 컴포지션이다.    5채널 영상 ‘연습연 B’.‘연습연 C’와 ‘연습연 A’ 설치 전경.독립적이면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 각각의 작품을 좀 더 설명해 준다면 ‘연습연 A’는 지금, 여기를 보는 기술을 연습하기 위한 연습연이다. 그런데 ‘보는 기술’이라는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구체적인 장면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절차나 과정이 필요했다. 먼저 오픈된 공간에서 출발해 점점 안으로 들어가 생각의 공간에 이르는 흐름을 만들었다. 장소를 인식할 때 흔히 사용되는 형(수직, 수평, 대각선 등)과 그 형태를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장소의 디스크립션을 만들어 프로덕션 매니저와 함께 장소를 하나씩 찾아나갔다. 이후 이 장소에서 공연자가 ‘무엇을, 어떻게, 어떤 각도로 볼 것인가’ 등 디렉션을 위한 각종 자료와 스토리보드가 나왔고,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 5채널 영상 ‘연습연 B’이다. ‘연습연 C’는 과거와 미래를 보는 연습이다. 안무가에게 ‘연습연 B’의 모든 내용을 일단 암기하고, 그 내용을 토대로 다섯 가지의 다른 공연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면서 안무해 달라고 요청했다. 영상 속 안무가는 의자에 앉은 채 과거와 미래의 계획을 왔다갔다하면서 무대 설치를 계획하거나, 무용수들의 행동과 모습을 떠올리거나, 즉흥적 움직임을 만들거나, 공연의 리허설을 보는 상상을 하며 안무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연습연 D’는 이곳 전시장에서 펼쳐질 라이브 퍼포먼스이다. 미니멀한 실내 공간을 배경으로 한 전작들과 달리 야외 공간에서 촬영된 ‘연습연 A’는 자연스럽게 영화적인 상상을 하게 만든다 이번 작업이 내게도 전방위적인 연습곡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식의 기술을 연습하기 위해 현실 공간과 생각의 공간을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만큼, 이전 작품에서 주로 머물러 있던 생각 속 공간에서부터 현실 공간으로 나오는 것이 필요했다. 이때 영화 장면을 참고하며 공간들을 구성했다. 영화 속 장면에서 조형적인 부분이나 몸이 보여지는 방식 등을 수집하고 이를 토대로 형태나 앵글을 계획하면서 내게도 일종의 연습이 됐다. 가장 존경하고 영향받은 예술가로 현대음악가 스티브 라이히를 꼽았다. 좋아하는 영화감독은 좋아하는 감독은 너무 많은데, 퍼포먼스를 준비하면서 최승윤 안무가와 브레송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눴다. 브레송이 배경음악을 쓰지 않고 실제의 소리에 집중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는데, 그럼에도 충분한 리듬감과 긴박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보통 영화는 모든 장면이 모여 하나의 내러티브를 완성하는데, 브레송의 영화에서는 장면 하나하나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그 자체로 완결된 느낌을 받았다. 파편화된 장면은 관객이 스토리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지만, 마냥 거칠게 느껴지는 게 아니라 이상하게도 음악이 구성되는 방식과 유사하게 느껴졌고 어떤 면에서는 내게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음악의 형식이나 작품에 담긴 정교한 구조를 전혀 모른다 해도 오민의 작품을 즐기지 못할 것은 없다. 나 역시 당신의 작품에서 ‘아름답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런 감상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글쎄, 내 작업은 기본적으로 ‘추상’이다. 보통 ‘추상’이라면 ‘모르겠다’거나 부정적 반응이 많은데, 사실 추상은 다른 문화와 언어를 초월해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기본적인 감각이다. 그런 감각적인 교류가 ‘아름다움’으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는 그래픽 디자인의 영향인지, 음악이 지닌 추상성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꼭 필요한 요소만 담고 단순한 형태를 추구하는 가운데 디테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그런 흔적을 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본디 영상 작업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시작됐나 피아노에서 그래픽 디자인으로 넘어오면서 한동안 내 관심은 ‘정지해 있는 평면적인 형’에 머물렀다. 그런데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대학원에 진학해 영상 작업을 시작했을 때, 굉장히 친숙한 느낌을 받았다. 음악이 기본적으로 시간 예술이다 보니 영상 역시 시간을 다룬다는 점에서 편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첫 관심은 내러티브에서 시작했고(현재는 좀 멀어져 있긴 하지만) 여기에 형태와 사운드, 시간, 움직임 등을 한꺼번에 실험할 수 있는 좋은 매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공부한 친구들은 주로 인쇄 매체에 관심을 가졌던 데 비해 나는 그때부터 영상으로 모든 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면 할수록 궁금한 것도 많아지고, 실험해 보고 싶은 것들이 생기면서 어느 순간 디자인의 맥락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러티브나 메시지를 담은 작업물도 보게 될까 초반 작업에는 그런 것들이 조금 있었는데, 그때도 영화나 소설처럼 인과관계에 따라 ‘선’적으로 흘러가는 내러티브에는 관심이 없었다. 기회가 된다면 꼭 만들어보고 싶은 단편영화가 한 편 있기는 하다. 몇 년 전부터 이 얘기를 하고 있는데, 자본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언제 실현될지 모르겠다. 언제 올지 모르는 기회를 대비해 이번 연습곡에서 영화적 표현과 제작 방식을 시도해 본 측면도 있다. 에르메스의 지원으로 파리 레지던시에 머물며 작업하면서 지금처럼 세계 어디서나 웬만한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시대에 내가 프랑스에서 작업하며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했다. 일단 ‘프랑스의 풍부한 영화와 음악, 무용의 유산을 최대한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 함께 작업한 프로듀서, 시네마 포토그래퍼, 무용가들처럼 그 유산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력 풀이 굉장히 풍부했기 때문에 의외로 쉽게 접근 경로를 찾을 수 있었다.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수상작가로 선정돼 이번 전시를 열기까지, 그간의 시간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 지난 1년 반이 너무 행복하고 신났다. 장기 계획을 세우고 이를 차근차근 실행해 나가는 기쁨이 정말 컸다. 다각적으로, 또 깊게 생각을 발전시켰고, 그 과정에서 다른 호기심이 생겨나기도 해서. 준비하는 내내 기쁘고 고마웠다.  작업을 통해 본인이 갖고 있는 ‘인식하는 기술’에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변화라기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이번 작업을 통해 더욱 명확해지는 것 같다. 작업하면서 내 몸이 가리키는 방향을 예민하게 찾고, 그 감각을 가지고 또 뭔가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느낌이다. 곧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간다. 암스테르담을 베이스로 삼은 이유는? 그곳에서 또 어떤 연습을 계획하고 있나 내가 연구하고 싶은 관심사를 찾았고, 그 연구를 어디서 지속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던 중 네덜란드에 문화와 예술에 대한 지원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향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네덜란드 디자이너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는데, 그들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 핵심을 찌르는 태도 같은 것에 호기심이 생겼고 배워보고 싶었다. 그곳에서 2년간 라익스 아카데미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작업 기반을 잡았고, 장기적으로 정착하기로 했다. 현재는 작업에 따라 서울과 암스테르담을 오가면서, 때론 뉴욕이나 파리 등 다른 장소에서 작업하기도 한다. 새로운 곳에 갈 때마다 늘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노력한다. 모든 것이 나한테 연습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