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LE DECOR

웨스 앤더슨부터 페드로 알모도바르까지, 영화 속 탐나는 공간들

스크린 속 정교하게 설계된 취향의 방으로 들어가 볼까? 북유럽 빈티지 거실부터 웨스 앤더슨의 탐미적 세계, 브루탈리즘의 거친 미학과 알모도바르의 보색 대비까지. 공간과 사물이 건네는 은밀하고 매혹적인 프로덕션 디자인 스토리.

프로필 by 이경진 2026.04.10

센디멘탈 밸류

영화는 삼각형 지붕이 있는 목조주택의 문과 벽에 바짝 밀착해 훑으면서 시작된다. 북유럽에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유행했던 드라게스틸(Dragestil) 건축양식의 집이다. 박공지붕은 많은 눈이 지붕에 쌓이지 않고, 빗물도 빠르게 지붕 아래로 흐르게 만들고, 삼각 구조로 인해 지붕 아래에 생기는 다락 공간은 일종의 단열층 역할을 해서 북유럽의 긴 겨울 동안 집 안을 따뜻하게 유지해 준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이 만든 대부분의 전작처럼 <센티멘탈 밸류> 역시 노르웨이 오슬로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이 집은 노라의 가족이 1930년대부터 대를 이어 살고 있어 집 안 곳곳에 가족의 추억과 삶의 희로애락이 묻어 있다. 심지어 벽에 생긴 미세한 균열까지도. 노라의 아버지 구스타프는 딸들이 어릴 때 갑작스러운 이혼 후 집을 떠났고, 노라는 유명한 연극배우로 성장하지만 항상 마음속에는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심한 불안과 우울증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다 노라 어머니의 장례식 날, 15년 만에 아버지가 나타난다. 가족이 함께 살던 바로 그 집에. 영화 속에는 가족의 주택 외에 독립한 노라의 집, 결혼한 동생의 집까지 총 3개의 집이 등장하는데 그 안을 채운 가구와 조명 소재, 디자인은 크게 다르지 않다.미드센추리 모던 스타일의 북유럽 빈티지 가구, 이케아와 루이스폴센을 비롯한 북유럽 브랜드의 가구와 소품이 긴장되고 건조한 스토리의 흐름 속에서도 공간들을 따스하게 채운다.


빈티지 뱅앤올룹슨 오디오 시스템과 LP판, 다양한 분야의 고서들은 영화감독인 아버지, 심리상담가인 어머니가 있는 학구적이고 예술적인 집 분위기를 재현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세트 디자이너인 카트린 고름센은 같은 공간에서 1930년대, 1950년대, 1990년대 풍경이 연이어 펼쳐지는 장면을 위해 가죽 커버가 씌워진 클리판 소파, 니클라스 선반 유닛을 비롯한 빈티지 이케아 가구를 배치했다고 한다. 노라 어머니의 치료실에 놓인 알바 알토 디자인의 파이미오 암체어는 자연스러운 세월의 흔적을 위해 일부러 경매에서 오래된 제품을 구입하기도 했다.


그녀는 옛 노르웨이의 집 안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그 시절의 인테리어 매거진, 자신의 할아버지가 라이카 필름 카메라로 촬영했던 오래된 흑백사진을 참고했다. 다양한 조명 또한 영화 속 장면을 고요히 스쳐 지나간다. 가족 주택의 테이블 위에는 루이스폴센의 PH5 펜던트, 동생의 집 다이닝 룸에는 같은 브랜드의 VL45 펜던트 두 개가 달려 있다. 집 안 곳곳에 놓인 많은 부분 조명 또한 북유럽 특유의 분위기를 완성한다. 오슬로의 겨울은 낮에 햇살을 즐길 수 있는 때가 5시간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대부분 밝고 강한 직접 조명보다 간접 조명을 여러 개 두어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을 선호한다. 영화에서는 루이스폴센의 AJ 테이블 램프, 판텔라 250 포터블, 헤이의 PC 포터블 램프 등이 등장해 스크린에 따스함을 더한다. <센티멘탈 밸류>는 집에서 영화를 시작해 집으로 마무리될 만큼 집이 가족의 사랑과 유대의 안식처이자, 미움과 앙금을 해소하는 장소로 표현된다. 지친 몸과 마음이, 크고 작은 상처들이 다시 숨쉬고 회복할 자리 역시 집이라는 듯이.




페니키안 스킴

웨스 앤더슨의 <페니키안 스킴>은 1950년대를 배경으로 세계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사치스러운 삶을 즐기는 자자 코다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작품이다. 자자 코다는 수차례 암살 위협에 시달리다 자신의 사업을 수녀가 되기 위해 수련 중인 딸 리즐에게 물려주기로 결심하고, 주요 동업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가상의 땅인 페니키아로 함께 떠난다. 페니키아는 지금의 레바논과 시리아 해안 지역에서 무역과 항해, 문자와 도시 문화를 통해 지중해의 흐름을 바꾼 문명이었다. 알파벳 문자와 보라색 염료를 창조하고 목재와 유리, 보석, 향료를 전 세계에 수출했던, 더없이 화려하고 풍요로운 시대이기도 했다.


이 영화의 프로덕션 디자이너인 아담 스톡하우젠과 세트 디자이너 안나 피녹은 세상에 없는 새로운 페니키언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 아르데코, 이탤리언, 미드센추리 모던, 유러피언 빈티지를 고루 혼합했는데, 특히 피녹은 19세기 석유 사업가인 칼루스트 굴벤키언(Calouste Gulbenkian)을 모티프로 삼아 자자의 공간을 창조했다. 굴벤키언은 사후 그의 방대한 수집품 컬렉션으로 리스본에 미술관을 만들 만큼 예술을 사랑한 부호로, 피녹은 굴벤키언이 머물렀던 파리 저택과 베네치아의 귀족 저택인 팔라초, 베를린 주변의 성을 방문해 많은 영감을 얻었다. 자자가 6년 만에 딸과 상봉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자자의 집은 벽에 기둥과 패턴을 원근감 있게 그림으로 그려 착시와 웅장함을 더한 팔라초 특유의 양식이 적용됐다. 온통 대리석으로 마감된 듯한 집 벽면에 진짜 돌은 하나도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랍다.


코다가 고급 욕실의 욕조에 앉아 식사하고 책을 읽는, 특별하고 아름다운 오프닝 장면도 관객의 시선을 압도한다. 빈티지 타일 패턴부터 욕조 형태, 하녀들의 슬로 모션은 수많은 모델링 작업과 연습을 통해 만들어진 것. 19세기 초 유럽에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상형문자 같은 고대 이집트의 상징적 모티프를 건축과 장식에 적용한 이집트 부흥 양식이 엿보이는 사막 호텔도 이 영화의 백미다. 프로덕션 팀은 상형문자를 현대적으로 디자인해 인테리어에 반영했다. 영화 속에는 자자가 수집한 명화 컬렉션도 등장하는데, 르누아르의 1889년 작 ‘푸른 옷을 입은 아이’와 마르그리트의 1942년 작 ‘적도’를 비롯한 몇 점은 놀랍게도 진품이다. 촬영장에는 명작을 보호하기 위한 경호원이 배치됐고, 엔딩 크레딧에는 이 작품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앤더슨 감독은 진품을 고집한 이유에 대해 “촬영장에 걸린 작품의 진품 여부에 따라 배우들의 심리와 행동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 특유의 아우라를 그들도 느낀다”고 말했다. 이 말은 관객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로 시작된 웨스 앤더슨만의 판타지와 컬러 팔레트는 10년이 넘어도 여전히 흥미롭고 즐겁다. 이전 작품의 밝고 따뜻한 파스텔 톤보다 잿빛 필터를 씌운 블루, 브라운, 그레이 같은 낮은 채도의 색상은 완벽한 세트 디자인 속에 고요하고 어두우며 은밀한 공기가 흐른다. 서로 목적이 달랐던 부녀의 기묘한 여행은 제법 따스하게 끝난다. 앤더슨이 얘기하고 싶은 건 형태는 달라도 언제나 인류의 사랑이다.




브루탈리스트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유행했던 건축양식이자 콘크리트와 철강, 유리 등 거친 질감의 소재들, 장식을 최소한으로 배제한 기하학적 형태, 효율성과 기능성을 극대화한 구조 등으로 표현되는 브루탈리즘. 영화 <브루탈리스트>에서 이는 주인공의 강인하고 우직한 취향과 성격을 반영하고 주인공이 거쳐온 인생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표현방식으로 사용된다.


라즐로 토스는 홀로코스트와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아 1947년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계 헝가리 출신 건축가로, 그동안 이룬 건축가로서의 성과를 뒤로하고 신대륙에서 이민자의 삶을 살게 된다. 그의 삶은 헝가리 출신의 건축 거장인 마르셀 브로이어와 겹쳐 보인다. 에스토니아 출신이자 미국에서 활동한 루이스 칸 역시 비슷한 결이다. 미국에 도착한 토스는 사촌이 운영하던 한 가구점으로 피신한다. 식민지 시대의 스타일을 벗지 못한 공장형 가구로 가득하던 가게는 토스의 영향으로 강철 파이프를 사용한 캔틸레버 체어를 비롯한 바우하우스 스타일의 가구로 채워진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형태의 가구들은 영화를 위해 새롭게 디자인됐다.


그 후 토스는 사업가 밴 뷰런의 아들 해리의 의뢰로 밴의 서재를 리모델링하게 된다. 아르데코 스타일의 가구와 붉은 커튼으로 빛을 가린 서재는 돔 형태의 천장과 빛이 스며드는 리넨 커튼, 수직 구조를 강조한 나무 책장을 품은 공간으로 변모한다. 경첩을 돌리면 모든 책장이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장면을 위해 프로덕션 디자이너인 주디 베커는 한 치의 오차도 없도록 책장 길이와 이음매를 수없이 확인했다. 그 안에 놓인 라운지체어는 서재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마르셀 브로이어의 B35 체어와 닮아 있다.


토스는 원석을 알아본 밴 뷰런의 의뢰로 도서관과 극장, 체육관, 예배당 등이 모인 커뮤니티 센터를 설계하게 된다. 해가 이동하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십자가 모양은 안도 타다오의 빛의 교회, 루이스 칸의 퍼스트 유니테리언 교회가 연상되는 디자인이며, 센터 지하의 기둥은 토스가 머물렀던 유대인 수용소가 반영됐다. 영화 속 커뮤니티 센터는 건물을 새롭게 짓는 대신 정교한 모형을 여럿 제작해 촬영한 것이다. 두 개의 다른 모형으로 외부 컷을 촬영하고, 내부 디테일은 헝가리에 있는 요제프 그루베르 저수지에서 촬영했다.


영화 속 배경은 미국이지만 실제 촬영은 대부분 헝가리에서 진행됐다. 제작진의 눈에는 1950년대 필라델피아 공업지대를 재현하기에 부다페스트가 무척 어울리는 도시였던 것. 밴 뷰런의 펜실베이니아 저택은 1894년 부다페스트 근교에 지어진 안드라시 성으로, 내부에 무려 50개의 방이 있다. 토스가 일용직으로 일한 현장은 다뉴브 강 부근의 곡물 창고였고, 토스와 밴 뷰런이 센터에 사용할 대리석을 고르는 장면은 이탈리아 최고의 대리석 원산지인 카라라의 채석장에서 촬영됐다.


<브루탈리스트>는 3시간 반 동안 점과 선, 면으로 이뤄진 현대적 가구와 건축을 펼쳐 보이며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영화에서 흔치 않은 장치인 인터미션 또한 한 편의 예술 공연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때 등장하는 1930년대 헝가리 유대교 회당에서 열린 결혼식을 충실히 재현한 35mm 필름 사진마저 눈부시게 아름답다.




룸 넥스트 도어

소설가 잉그리드는 오랜 친구, 마사의 투병 소식을 듣고 암 센터로 향한다. 그리고 마사로부터 삶의 마지막 순간에 ‘옆방’에 있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전작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 관객에게 각인시킨 강렬한 색채의 향연을 <룸 넥스트 도어>에서도 풀어낸다. 그는 영화의 색감을 위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참고했는데, 실제로 영화 속에 호퍼의 1960년 작 ‘햇빛 속의 사람들’이 벽에 걸려 있고, 마사와 잉그리드가 그 작품을 오마주하듯 베란다의 선베드에 눕는 장면이 등장한다.


또 영화 속에서는 보색 관계인 그린과 레드가 삶과 죽음처럼 두 주인공의 공간과 패션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처음에는 두 인물의 다른 생각을 반영하듯 주로 마사는 그린, 잉그리드는 레드와 연결돼 있다가 영화 말미에 두 컬러가 교차되고 섞인다. 영화 속에서 숨은 두 가지 컬러를 찾아내는 것도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재미다.


영화 속 주요 공간은 맨해튼에 있는 마사의 아파트와 뉴욕 북부의 모던한 주택이다. 두 공간은 위치와 스타일은 전혀 달라도 곳곳에 컬러 포인트를 배치했다는 점에서 비슷한 흐름을 가진다. 마사의 부엌은 오렌지 상판과 그린 도어의 조합이 인상적이다. 아일랜드 위에는 베르너 팬톤이 디자인한 앤트레디션의 플라워 포트 펜던트가 달려 있는데, 이 역시 강렬한 버밀리언 레드 컬러다. 마사와 잉그리드는 청록색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데, 소파 양옆에는 붉은색 사이드 테이블이 있고 그 위에는 재스퍼 모리슨이 디자인한 플로스의 글로-볼 베이식 제로 디머 램프가 놓여 있다.


마사의 서재 한 벽면은 유기적 형태의 로셰보보아 램지 책장이 차지하고 있다. 마사의 아파트 현관 옆에 걸려 있는 거대한 그림은 스페인 작가 호르헤 갈린도(Jorge Galindo)의 작품이다. 콜라주 기법을 접목한 컬러플한 회화를 선보여 온 그는 알모도바르 감독이 촬영한 사진을 보고 협업을 제안했고, 그 결과물로 뉴욕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영화 속 그림도 두 사람의 합작품인 ‘플로레스(Flores)’다. 숲속 주택은 영화에서 미국 동북부로 설정됐지만, 실은 스페인 마드리드 부근의 산맥 기슭에 있다.


프로덕션 디자이너 인발 웨인버그는 미국에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마르셀 브로이어 등이 설계한 초기 모더니즘 주택을 둘러봤으나 결국 스페인 건축 스튜디오 아랑구렌+갈레고스(Aranguren + Gallegos) 스튜디오의 ‘카사 소케(Casa Szoke)’를 선택했다. 각진 형태의 여러 건물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이곳은 독특한 각도의 창문과 경사진 천장에서 왠지 모를 긴장과 슬픔이 느껴진다. 웨인버그는 이곳이 뉴욕 인근으로 보이도록 동부에서 자라는 꽃과 식물을 주택 주변에 식재했다.


주택 거실에 놓인 레드와 그린 패브릭 소파는 로셰보보아의 알루시옹(Allusion)이며, 소파 앞 퀸텟(Quintet) 테이블 역시 같은 브랜드의 제품이다. 컬러플한 무라노 꽃병도 각기 다른 공간에서 색감을 더한다. 주택 안에 가득한 컬러 덕분에 서로를 향한 대화가 삶이나 투병, 죽음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은 어쩐지 따스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영화를 보는 내내 슬픔보다 그들을 향한 위로와 연대감이 느껴졌다면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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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이경진
  • 글 정윤주
  • 사진가 유니버설 픽쳐스·워너 브러더스 코리아·그린나래미디어
  •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민경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