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요즘 가장 낭만적인 패션 컬러는 진짜 의외입니다

스포트라이트 밖에 머물던 그레이의 재발견. 올 시즌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그레이.

프로필 by 손다예 2026.03.29

회색 옷을 떠올리면 늘 비슷한 장면이 떠오른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머리도 감지 않은 채 편의점에 나가야 할 때 대충 집어 입는 회색 추리닝. 사람 많은 곳에 가기 싫은 날, 괜히 눈에 띄지 않으려 꺼내 입던 회색 맨투맨 티셔츠. 옷장 속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색이지만 자주 손이 가는 색. 어쩌면 회색은 우리에게 그런 존재였는지 모르겠다. 나의 존재감을 낮춰주고, 오늘 하루쯤은 세상과 적당히 거리를 두게 해주는 일종의 보호색.


DRIES VAN NOTEN

DRIES VAN NOTEN

VIVETTA

VIVETTA

그래서일까? 회색은 언제나 무난하고 조용한 색으로 기억된다. 회색지대, 회색 도시, 회색 인간, 회색빛 기억…. 이런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 회색의 이미지는 늘상 모호하고 중립적이며, 어딘가 흐릿하다. 때로는 침체된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고, 때로는 나이 듦을 상징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회색은 욕망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 색이기도 하다.


ERMANNO SCERVINO

ERMANNO SCERVINO

MARCO RAMBALDI

MARCO RAMBALDI

BOTTEGA VENETA

BOTTEGA VENETA

화이트에서 순수와 고결함이, 블랙에서는 조용하지만 넘치는 카리스마가, 레드에서는 단번에 시선을 끄는 도도함이 느껴진다면 그레이에서는 무엇이 느껴질까. 아마도 스포트라이트 밖에 서고 싶은, 욕망 아닌 욕망일 것이다. 눈에 띄지 않으면서 조용히 존재하고 싶은 마음. 어쩌면 그래서 스님들의 승복 역시 회색에 가까운 색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번 시즌 런웨이에서 마주한 그레이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DIOR

DIOR

조용히 뒤로 물러나 있는 색이 아니라, 낭만의 중심에 서 있는 색이 됐다. 유연하게 흘러넘치는 드레이핑, 공기처럼 가볍게 흔들리는 러플, <브리저튼> 속의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풍성한 실루엣까지. 지금 런웨이에서 그레이는 조용하고 수수하기보다 가장 로맨틱한 감정을 담아내는 색이 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끈 건 조너선 앤더슨이 선보인 첫 번째 디올 여성 컬렉션이다. 하우스의 상징적인 뉴 룩 실루엣을 현대적으로 풀어내 커다랗게 부풀린 스커트 라인을 중심으로 리본과 드레이핑이 부드럽게 몸을 감싸는 화려한 그레이 드레스는 우리가 알고 있던 회색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크림처럼 부드러운 톤의 그레이가 구조적인 실루엣과 만나면서 놀랄 만큼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SAINT LAURENT

SAINT LAURENT

VICTORIA BECKHAM

VICTORIA BECKHAM

FENDI

FENDI

반면 생 로랑의 그레이는 또 다른 인상을 준다. 디올의 그레이가 달콤한 로맨스라면, 생 로랑의 그레이는 태풍 전야의 먹구름 같은 다크 로맨스다. 묵직한 콘크리트 그레이에 윈드브레이커에서 볼 법한 얇은 나일론 소재, 거대한 퍼프 소매, 겹겹이 더한 러플 디테일로 극적인 볼륨을 만들어냈다. 가볍게 흔들리는 소재와 과장된 실루엣으로 폭풍 속에서 벌어지는 다크 로맨스의 한 장면을 만들어낸 것.


드리스 반 노튼의 그레이 미니드레스 역시 흥미롭다. 이 드레스의 소재는 어딘지 익숙하다. 우리가 하나씩 가지고 있는 그 ‘회색 추리닝’을 떠올리게 하는 저지이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는 이 평범한 소재를 Y2K 스타일의 보헤미언 미니드레스로 재해석했다. 몸을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실루엣과 가벼운 러플 디테일이 더해져 편안한 홈웨어의 기억이 낭만적인 패션 모멘트로 변모한다.


DRIES VAN NOTEN

DRIES VAN NOTEN

너무나 일상적인 소재가 런웨이에서 이렇게 새롭게 선보였다는 사실이 꽤 흥미롭지 않은가? 그야말로 회색을 다시 볼 때다. 늘 조용하고 무난한 색으로 여겼던 그레이가 런웨이서는 가장 낭만적인 색이 돼 있으니 말이다. 사랑스럽고, 우아하고, 때로는 극적인 실루엣 속에서 그레이는 더 이상 자신의 존재감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 어느 색보다 풍요로운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눈길이 가는 ‘에포트리스 로맨틱’이라는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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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손다예
  •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 디지털 디자이너 김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