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은 왜 프랑스 남부 시골에 한지 작업실을 차렸을까?
예술가 김민정의 세계에서는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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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생폴 드 방스의 자연을 배경으로 스튜디오 큰 창문 너머로 보이는 작업 풍경.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성철 스님의 법어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뜻을 담고 있다면, 예술가 김민정의 세계에서는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된다. 파도가 절벽에 부딪히는 소리를 겹겹이 그려 하나의 산을 완성한 상징적 연작 ‘산(Mountain)’으로 김민정은 자연을 명상의 경지로, 새로운 눈으로 이어 나간다. 김민정은 한지를 작업의 중심에 둔다. 불꽃이 스치고 잉크가 스며드는 과정을 거쳐 조각난 한지를 층층이 쌓아 올린다.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며 태운 한지 조각을 섬세하게 배열하는 행위는 흐트러진 기억과 자연의 파편을 한데 엮어내는 수행과 같다.
이토록 독창적인 작업방식은 김민정이 오랜 시간 쌓아온 경험과 내면의 힘에서 비롯된다. 어린 시절부터 서예와 수채화를 익힌 작가는 홍익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뒤 밀란 브레라 미술 아카데미에서 서구 미술 사조를 접하며 시야를 넓혔고, 이후 서구의 추상미술과 동양의 전통적 지필묵 기법을 결합해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해 왔다. 깊은 인내와 강렬한 내면의 힘이 없었다면 시대에 따라 급변하는 예술 흐름 속에서 30여 년 동안 자신만의 언어를 탐색하고 확고한 예술세계를 구축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2006년, 김민정은 끊임없는 자극에서 벗어나 오롯이 창작에 몰입하기 위해 도시를 떠났고, 이곳 생폴 드 방스에 정착했다. 한적한 시골 환경이 주는 고독 속에서 비로소 예술에 집중할 수 있었다. 고독은 그녀가 오랜 시간 지켜온 창작 방식이었다. 지금 김민정은 알프스와 지중해가 맞닿은 프랑스 남부 생폴 드 방스(Saint-Paul de Vence) 스튜디오에서 자연과 호흡하며 마음속의 시를 한지 위에 써 내려간다. 느슨한 휴식과 뜨거운 창작이 공존하는 이곳에서는 김민정만의 고요한 시간이 흐른다.

분수 뒤쪽에 놓인 오브제는 김민정 작가에게 큰 기쁨과 영감을 주는 ‘앵무조개 화석(Nautilus Fossil)’.
생폴 드 방스는 풍광과 따뜻한 날씨 덕분에 많은 예술가가 자연스럽게 모여드는 지역이죠. 자연과 역사, 예술이 어우러진 이곳의 일상은 어떤가요
아침, 점심, 저녁의 빛이 각각 다른 모습을 보며 하루를 지내다 보면 작업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곳은 조용하면서도 창작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예술가에게는 이상적인 공간이에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는 오전 11시 30분에서 정오 직전 그리고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예요. 정오의 강렬한 빛으로 바뀌기 직전의 부드러운 햇살이나 한낮의 빛이 잦아든 후의 고요한 시간이 매력적이죠.

작업실 한쪽에는 염색하지 않은 화선지와 색지가 걸려 있다.
당신에게 이상적인 작업 환경이란
그 자체로 너무 아름다워 감각을 압도하지도, 반대로 지나치게 열악해 작업을 방해하지도 않아야 해요. 작가로 하여금 마음속 깊은 곳을 차분히 들여다보고 내면의 목소리를 끌어낼 수 있는, 조용한 울림을 주는 공간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요. 외부 자극이 과도하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영감이 스며드는 환경이야말로 창작을 본질적으로 이끌어내는 중요한 조건 아닐까요?

밀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 생폴 드 방스에 정착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오래 도시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 속에서 고요히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프랑스 남부는 예부터 많은 예술가가 창작 활동을 해온 곳이잖아요. 생폴 드 방스는 아주 시골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도시의 소란스러움에 휩싸이지도 않는 도시예요. 딱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지닌 특별한 곳이죠. 생폴 드 방스의 풍경과 환경은 창작의 영감을 줄 뿐 아니라 제 작업과도 조화를 이뤄요.

화선지에 색을 입히는 김민정 작가.
사진으로 담아낼 수 없는 작업실 분위기를 묘사해 준다면
많은 사람이 제 작업실에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해요. 책상 위에는 먹, 색색의 종이 조각, 태운 흔적들, 작은 통에 모아둔 재료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고, 옆에는 큰 책상이 있어 필요에 따라 펼쳤다 접기도 해요. 항상 어느 정도 여백을 유지하기 위해 작업실을 가득 채웠다가 비우는 과정을 반복해요. 그 여백이 주는 여유가 공간 전체를 아늑하고 차분하게 만들어주거든요. 이 공간은 제 작업이 지향하는 균형과 삶의 가치관을 그대로 담고 있어요.

(위) ‘Red Mountain’(2021). (아래) ‘Blue mountain’(2022).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은 어디인가요
작업실 코너에 있는 큰 창이에요. 자연과 연결되는 이 공간은 저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 창을 통해 가까이 보이는 정원과 멀리 이어진 산과 바다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죠. 이 풍경은 작업에 몰두하다가도 잠시 멍하니 마음을 비우고 싶을 때 큰 위안이 돼요. 휴식과 창작은 서로를 물고 오는 공존 관계입니다. 휴식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창작이 이어지고, 창작을 하다 보면 또 휴식이 필요해지는 순환이죠. 바깥 풍경을 오랫동안 바라보거나, 멀리 보이는 산과 지평선을 응시하며 마음을 비우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차분해지고, 아무런 계획 없이도 작업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죠. 그런 흐름 속에서 작품이 나오는 순간을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가장 얇은 화선지를 작은 원형으로 자른 후 향으로 가장자리를 태우는 과정을 거쳐 겹겹이 붙이는 ‘Drawing’ 시리즈.
최근 생폴 드 방스에 있는 매그 재단(Fondation Maeght)에서 대표 연작 ‘마운틴(Mountain)’을 선보였어요. 그곳 미술관의 통창을 통해 유럽의 자연 경관이 보였어요. 한국의 산세를 연상시키는 당신의 작품이 흥미로운 대비를 이뤘죠. 강렬한 풍경이었습니다. 서양 풍경을 보며 사는 일상에서 한국적인 풍광을 그려내는 일이 작가 김민정에게는 자연스러운가요
작업할 때 저는 제가 서양에 있는지, 동양에 있는지 의식하지 않아요. 외부 환경보다 내면의 깊은 곳에 집중하죠. 그리고 그것을 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기법과 접근을 시도합니다. 의식적으로 한국적인 풍경을 그리는 게 아니라 제 안에 알게 모르게 남아 있는 기억과 그리움이 자연스럽게 종이 위로 드러나는 것 같아요. 어디에 있든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풍경들이 조용히 종이 위로 스며드는 과정이죠. 그래서 제 작업은 단순히 외부 풍경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풍광을 찾아가는 여정에 가까워요.

차분한 모습의 김민정 작가.
그 여정은 수백 번의 붓질을 하고, 가장자리를 불로 그을린 한지를 덧대는 과정을 통해 구현되죠
스스로 이 과정에 깊이 잠기길 바라며, 실제로 그런 몰입 속에서 작업이 완성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다스리며, 새로운 성찰의 기회를 얻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관람자에게도 제가 느꼈던 고요함과 정신적 편안함을 전달할 수 있길 바라죠.

‘Zip’ 시리즈는 각기 다른 색의 한지를 얇게 잘라 지그재그로 한 줄 한 줄 이어 붙이는 콜라주 작업이다.
한지와 불, 먹을 주 매체로 삼기까지 작업방식에 대한 어떤 고찰이 있었습니까
불을 사용하기 전에는 한지 위에 수묵과 수채화를 섞어보는 등 서예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선을 많이 사용했어요. 그러다 불을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태워서 생겨난 우연한 자국과 마주하게 됐고, 그것을 겹겹이 레이어로 쌓아보거나 수채와 서예 요소를 혼합하는 과정을 탐구했습니다. 이런 과정은 단순히 계획된 결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재료와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여정입니다. 지금도 탐구하며 배우는 중이고, 이 과정 자체가 제 작업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어요.

얇게 자른 종이를 겹겹이 붙여 향으로 태운 선들이 연필선의 드로잉처럼 보이게 만드는 ‘Drawing’ 시리즈.
종이를 태우는 작업에서 ‘시간성과 존재의 층위’에 대해 언급한 적 있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종이를 태운다는 것은 종이가 사라지는 과정을 의미해요. 일반적으로 종이가 자연적으로 소멸되기까지 수백 년이 걸릴 수도 있지만, 태우는 행위는 그 긴 시간을 압축하는 과정이에요. 불에 타면서 종이는 빠르게 사라지지만, 동시에 없어지기 직전의 찰나적 순간과 흔적, 변화를 강렬하게 드러내요. 저는 이 과정을 통해 시간과 존재의 경계를 탐구하며, 사라지기 전의 마지막 아름다움을 작업으로 담아냅니다.

작업대 뒤편에는 이탈리아 문학 전집과 궁전 건축 서적, 대가들의 화집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꽂혀 있다.
2021년 갤러리현대에서 큐레이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와 대화를 나눴고 당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종이는 제 피부예요.” 종이는 당신에게 아주 오랜 시간 중요한 매체였어요. 종이가 아닌 다른 매체를 사용하는 상상을 해본 적 있습니까
종이는 매체를 넘어 저와 깊이 연결된 존재로 느껴집니다. 다른 매체가 주목받는 환경에서도 종이를 통해 제 생각과 감정을 가장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제 길을 걸어올 수 있었어요. 솔직히 다른 재료로 작업한다는 상상을 해본 적 없어요. 종이는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알아가고 배워야 할 것이 많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재료예요.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재료로 어떤 종이는 물을 거의 흡수하지 않고, 어떤 종이는 물을 많이 머금어요. 부드러운 종이도 있지만 거친 종이도 있죠. 이런 특성 때문에 도전적이지만 매력적인 협업 상대처럼 느껴져요. 제 작업은 ‘종이와의 대화’라고 할 수 있죠. 제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재료이자 좋아하는 종이와 계속 작업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이에요. 종이의 고유한 성격과 제 의도가 만나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 자체가 창작의 본질이자 즐거움입니다.

생선 음식을 대접할 때 장식으로 사용하는 오브제.
어느 인터뷰에서 “60세에 성공을 거두는 것이 목표였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인생의 속도를 늦추는 시점에 이런 결심을 하게 된 이유는
나이 예순에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이유는 성공이 자연스럽게 찾아올 때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더 잘돼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어요. 성공은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큰 부담과 책임을 동반하죠. 성공 후의 불안감이나 더 나아가야 한다는 압박감을 이겨내고,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며 작업에 집중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그 성공이 진정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젊었을 때는 성공을 잘 다룰 수 있을지 스스로 의문이 많았어요. 그래서 자신을 잘 이해하고, 차분해진 시점에 성공을 맞이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느꼈어요.

요리를 즐기는 그녀의 작업실에는 큰 부엌이 있다.
예술가로서의 삶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지금까지 저를 이끌어준 힘은 작업과 삶에 대한 긍정적 믿음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자긍심과 자부심이라고 생각해요. 흔들리지 않고 저를 일궈가며 꾸준히 작업을 이어가는 것이 제 삶의 중심이죠. 예술가라는 특별한 역할보다 작업이 제 일상이자 인생의 본질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는 점이 중요해요. 작업은 마치 천명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지속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예술은 저에게 특별한 무엇이기보다 그저 제 삶 그 자체예요.
Credit
- 에디터 권아름
- 사진가 OLIVIER AMSELLEM
- 아트 디자이너 김강아
- 디지털 디자이너 민홍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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