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50대 연프의 맛

사랑은 쉰 살부터! 시니어 연프 <끝사랑> ‘덕질’기.

프로필 by 전혜진 2024.10.04
나이 들며 마주하는 낯선 변화가 때론 두려울 때, 같은 걸 경험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는 사랑 말이다.

‘연프’의 끝판왕이 등장했다. 섬에 갇혀 상대를 유혹하고, 지난 연인과 한집에서 동거하고, 남매의 짝을 찾아주다가, 돌싱들의 결합을 넘어 무당의 연애까지 확장된 지금 대한민국 연애 콘텐츠 프로그램. 이 춘추전국시대를 평정한 건 여덟 명의 50대 이상 시니어 솔로 남녀가 제주도에서 10일간의 합숙을 통해 인생 후반전을 함께할 마지막 사랑을 찾는다는 <끝사랑>이다. 연프 과몰입자인 나로서도 이곳은 미지의 세계였다. 막내(?)의 귀여움은 누가 차지할까? 그들의 삼각관계는 스릴이 있을까? 50대의 플러팅은 어떨까? 일단 데이트하기에 체력은 괜찮으신가…. 대한민국 황혼 이혼율은 날로 높아지고, 그보다 기대수명 자체가 120세가 된 마당에 우리는 분명 인생 후반전 플러팅에 대해 눈여겨볼 필요가 있었다.

첫 등장부터 심상치 않았다. 고즈넉한 숙소에서 창밖을 보며 “지병도 나을 것 같아요” 하고 아이스 브레이킹하는 것부터가 ‘이게 50~60대의 연애다!’ 하고 외치는 것 같은 참가자들. 첫인상을 택하는 자리에서 관심 있는 상대의 이름을 깜빡해 잘못 부르기도 하고(그럴 수 있다), 누가 장 보러 간다면 빠다코코넛과 맛동산, 짱구, 누가바를 서로 짠 듯 요청했다. 데이트할 때는 셀카보다 대포 카메라를 들고 흑백의 출사 사진을 찍어준다. 마음에 든 참가자에게 문자보다 ‘정숙 씨의 맑고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라는 식의 글귀로 매일 밤 펜을 쥐고 손편지를 쓴다. 꾹꾹 눌러쓴 게 누구의 필체일지, 어제 그 필체와 오늘 필체가 같은지 설레며 궁금해지는, 두세 장의 긴긴 아날로그적 진심이 흥미로웠다. 황혼이 돼도 여전히 요리에 자신 없는 사람들은 자신 없고, 밥을 50년 먹었어도 칼질 못하는 사람들은 못했다. 이들의 느슨함은 왠지 나 또한 저때도 지금의 나와 똑같을 것이라는, 연애 앞의 허점은 그때도 허점이어도 된다는 용기까지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스스로도 놀란 건 수많은 연프를 보면서도 그들의 패션과 뷰티에는 큰 흥미가 없던 내가 진심으로 이들의 관리법과 뷰티 팁이 궁금해졌다는 사실! 아름답게 나이 들고 싶다는 환상이 그저 환상이 아니라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는 시니어들의 ‘관리된’ 비주얼은 로맨스 드라마에도 설레지 않는 내게 그보다 더한 희망과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밤에도 스킨케어를 빠트리지 않고, 조깅이나 푸시업으로 시작하는 그들의 아침을 보며 생각한다. 단지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무기로 세우는 것이 아닌, 자신을 가꾸고 나이를 거스르며 만들어낸 진짜 아름다운 노력의 얼굴이 이토록 매력적이었던가?

놀랍게도 나는 이들에게 빠르게 스며들었다. 일단 내 ‘원픽’은 진휘 아저씨다. 진휘 아저씨의 인자한 웃음이 좋다. 좋아하는 상대에게 12첩 반상을 해주며 든든히 먹이고 ‘이제 시작이야’라고 알려주고 싶다는 포부도 좋았지만, 가족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눈이 깜깜하다며 돋보기를 챙기는 모습에 웃다가도 돋보기를 쓴 모습이 내 완벽한 이상형에 부합해서 다시 한 번 놀랐다. 셰프가 직업이어서가 아니라 요리를 세월의 관록으로, ‘찐’으로 맛을 내는 남자를 주변에서 본 적 있던가? 아무래도 내 취향은 바다에서 갓 잡은 생선으로 회를 떠주는 어른 남자였나 보다. 보통 연프에서는 그 사람의 긴장감 있는 플러팅 기술이나 직업, 패션 센스, 와인 취향 같은 걸 본다면 이번에는 그 사람의 삶에 축적된 시간을 보게 됐다. 마침 도착한 가족의 편지들, 둘만 살아도 공허함을 느끼지 않게 하려 했던 엄마의 노력을 응원하는 딸이나 엄마의 이름으로 살라는 응원들, 뭐든 잘하는 아이였기에 부모님과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남의 시선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을 찾는다는 용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이들은 어느날 다 함께 바다를 거닌다. 그러다 아이처럼 신난 표정으로 말한다. “어머… 왜 행복함이 느껴지지?” 대부분 참가자는 첫날 편지에 마음에 든 상대에게 ‘찐친’ 혹은 ‘절친’이 되고 싶다고 적었다. 그 나이쯤 되면 이들에게 사랑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취향? 외모? 이룩해 낸 어떤 것? 진휘 아저씨는 말했다. “여기 들어와서 아이의 유무나 다른 모든 과거와 사연을 배제하고 그냥 상대만 생각하겠다”고. 이미 결혼이나 사랑에 실패해 봤거나, 오래 외로웠거나, 삶의 시간이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믿는 그들은 그 어떤 때보다 온전한 상대의 마음, 배려 그리고 서로가 보듬어줄 수 있는 구석을 찾는 것 같다. 이미 어떤 궤도에 오른 이들은 물질과 말이 앞서는 사랑보다 허전한 마음을 채워줄 친구 같은 사랑, 그리고 그 마음은 노골적인 플러팅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전달되는 그런 사랑을 추구한다. 사소한 습관들로 반추해 보는 약 50년의 인생에 대한 신뢰가 동반된 채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나이 들며 마주하는 낯선 변화가 때론 두려울 때 같은 걸 경험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는 사랑 말이다.

30대인 내가 바라보기에 이들 사랑의 무게는 인생의 무게만큼 더 무겁게 느껴질 거라는 생각과 다르게 시니어들의 발걸음은 새털처럼 가벼워 보였다. “지금이 바로 제 전성기입니다”라고 외치며 생애 가장 가벼운 마음으로 문을 열고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 같다. 정숙 언니가 첫날과 둘째 날의 마음이 다른 것에 놀라며 “저도 제가 감당이 안 되네요”라는데 “이제 더 이상 감당하지 않으셔도 돼요!”라고 옆에 가서 말해 주고 싶을 만큼 유연하고 날쌘 마음들. MC로 참여한 정재형이 프로그램 방영에 앞서 “이제 겁이 없을 나이라 깜짝 놀라게 한다. 저지르고 본다. 변화무쌍하다. 스릴러까지 나왔는데, 끝이 호러가 아니었으면 한다”고 언급할 만큼 이토록 가볍고 용감한 사랑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

<끝사랑>은 참가자 검증에 실패한 덕에 한 사람의 분량이 실종되는 위기를 겪었지만, 최근 회차에 ‘시니어 덱스’라고 불리는 메기 출연자가 등장하면서 전개가 흥미로워졌다. 과연 이들은 <연애남매>의 윤재와 윤하 커플처럼 결실을 맺고 ‘고척 돔’에서 결혼하게 될까? 연프 밖에서도 시니어들의 연애는 뜨겁다고 한다. 50대 이상 중장년을 위한 데이팅 앱이 우후죽순 생기고, 중장년층 커플 매칭 업체는 나날이 사업 규모를 키운다. 유료 데이팅 앱에 거침없이 지갑을 열고 연애 중인 이들은 더 이상 스스로를 ‘노년’이라 생각지 않고, 가꿈을 통해 활력을 찾고 함께할 상대를 찾는다. 결혼은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경험해 봤으니 구속도 불편함도 없는, 오로지 자유연애를 추구하는 경향이 짙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제 연애도, 결혼도 어떤 시기에 하는 게 맞고 어떤 시기에 하는 건 틀렸다고 볼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나의 20년, 30년 후를 설레며 기다리게 하는 선배님들의 멋진 연애담. 앞으로도 우리는 설렐 날이 많다고, 추억은 끝없이 생성된다고, 죽을 때까지 오롯이 내 이름과 존재로 누군가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격려한다. 처음에는 ‘끝사랑’이라는 제목이 아무래도 틀렸다고 생각했다. 분명 100세 시대의 사랑은 다시 찾아올 테고, 이번이 끝은 아니니까. 하지만 제목의 진짜 뜻은 그거다. 20대든 60대든 우리는 변치 않고 이 사랑이 끝이길 바라는 뜨거운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 송하춘의 소설 <하늘은 왜 파란가>의 한 구절로 진휘 아저씨와 사랑의 선배들을 응원해 본다. “그녀를 만나고, 차를 마시고, 눈은 내리고, 찻집은 훈훈하고, 더구나 혼자가 아닌 것이 마냥 좋았다. (중략) 실버가 은빛이라면 실버들의 사랑은 어떤 빛깔일까. 젊은 사랑의 빛깔은 핑크빛이라는데 실버들의 사랑도 핑크빛일까. 주황이고 싶다.”

Credit

  • 에디터 전혜진
  • 사진가 박현구
  • 아트 디자이너 구판서
  •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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