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18개월 전 누군가 100만 원에 달하는 하이더 아크만의 벨벳 트리밍 트레이닝팬츠를 사려 했다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도 어느새 ‘그’ 트레이닝팬츠를 장바구니 위시 아이템에 담아놓고 있다. 그게 더 자연스러워진 시대가 왔을까?늘 파파라치를 몰고 다니는 로지 헌팅턴 휘틀리도 화려한 드레스 한 벌을 훌쩍 넘길 가격의 끌로에 트랙 팬츠에 회색 티셔츠, 블랙 블레이저를 입고 LA 공항을 나서는 모습이 포착됐다. 단지 여행할 때의 편한 차림은 결코 아니었다. 10cm가 넘는 하이힐을 신었으니 마냥 편할 리 있겠나? 그러니 철저히 계산된 공항 룩이라 단언해도 되지 않을까.반려견과 함께 공원을 산책할 때나 어울릴 옷차림으로 출근하거나, 친구들을 만나러 카페나 레스토랑에 가는 일은 이제 타인의 눈총을 받지 않아도 될 익숙한 모습이 되었다. 그 배경에는 혜성처럼 등장해 파리 뒷골목에서나 입을 법한 후디드 티셔츠와 트랙 팬츠로 신드롬을 일으킨 베트멍이나 이번 시즌 스웨트셔츠와 배기 데님 팬츠의 룰을 선보인 버버리, 발렌시아가, 알렉산더 왕, DKNY 등 런웨이 디자이너들의 공이 크다. 더 나아가 해외 유명 백화점에서는 자신만의 D.I.Y 트랙 팬츠를 주문할 수도 있다니 이건 어찌 보면 오프-듀티 트렌드가 런웨이 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일상생활에 깊게 파고든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당장 <엘르> 사무실만 봐도 그렇다. 스웨트셔츠, 맨투맨에 트랙 팬츠, 트레이닝 슈즈 차림의 사람들로 가득한 이곳을 몇 시즌 전만 해도 패셔너블한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패션을 논한다는 것 자체에 의구심을 가졌을지도. 지금껏 하이패션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느 순간 하이패션을 점령해 버린 상황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의심하거나 반문하기엔 오프-듀티 패션은 하나의 거대한 움직임이 되었다. 단순히 주말 패션이 아니라 효율적인 워크웨어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던져준 것이다. 스트리트 스타일 웹사이트인 ‘All the pretty birds’의 창립자인 타무 맥퍼슨(Tamu McPherson)은 말한다. “정신없는 시대를 살다보니 좀 더 편한 것들을 찾게 된다. 다이내믹한 삶에서 고효율을 추구하다 보면 자연히 포멀한 것에게 멀어지게 된 것.” 이 말은 전 세계적으로 높은 평균 근무 시간을 기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적용된다. 그렇다고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야근과 과중한 업무에 허덕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롭고 유연한 작업 환경에서 일하는 전문직 종사자 중에는 기꺼이 자신의 사생활을 포기하면서 자율적으로 더 많은 시간을 일에 투자하기도 한다. 특히 크리에이티브 인더스트리에서는 이미 온-듀티와 오프-듀티의 경계가 모호하다. 이들을 중심으로 점점 더 많은 소비자들이 바쁜 일상에서 입을 수 있는 편한 옷을 찾다 보니 디자이너와 브랜드들은 자연스럽게 이 오프-듀티 게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전에 패션의 뒷전에 머물렀던 오프-듀티 룩이 이제는 퍼스널리티를 표현하는 도구로 쓰이기 시작했다.” 네타포르테의 리테일 패션 디텍터 리사 아이켄은(Lisa Aiken)은 말한다. “집 안에서 쉴 때 입을 법한 아이템들로 다양한 스타일링을 하는 재미에 빠진 이들이 과감한 투자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어 옷장에서 가장 흔한 아이템이었던 스웨트셔츠가 100만 원이 넘는 구찌 하우스의 태그를 달고 럭셔리 아이템으로 신분 상승한 것만 봐도 그렇다. 오프 화이트나 베트멍의 이름을 단  후디드 티셔츠도 그 가격이 천정부지도 치솟고 있다. 그렇다면 오프-듀티 룩의 뿌리는 어디일까? 지난 10년의 패션사를 살펴보면 2006년 알렉산더 왕이 파슨스 스쿨 졸업 쇼에서 허름한 오버사이즈 티셔츠와 낡아빠진 점퍼를 될 대로 되란 식의 애티튜드로 선보인 것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다양한 캐주얼 룩이 존재했지만 말 그대로 누구나 가지고 있던,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캐주얼 피스들을 캣워크에 올린 건 왕이 유일무이했으니. 2014년 왕은 H&M과의 협업으로 짐 웨어를 발표하면서 애슬레저 룩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도 했다. “평소 운동복을 즐겨 입는다. 이제는 운동복 입고 거리로 나가는 순간 그 또한 유니폼이 될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운동 선수는 아니다”라고 덧붙이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이러한 이지 웨어 트렌드는 단지 편한 옷차림, 오프-듀티의 룰을 떠나 애슬레저 룩을 지지하고 나섰다. 일할 시간도 부족한데 건강을 위해 운동도 포기할 수 없는 이들에겐 ‘안 될 거 뭐 있어(Why not)?’인 셈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운동복을 입고 나간다면 게을러 보이거나 백수 취급을 받았을 테지만 지금은 ‘무척 바쁘지만 스스로를 위한 관리도 소홀하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은근히 드러낸다. 삶이 치열해질수록 옷차림이 편해지는 건 본능적일 수 있으나 소셜 미디어에 올라오는 파워플한 인플루언서들의 영향력도 무시할 순 없다. 성공한 여성들이 어떤 식으로 옷을 입는지 그리고 거기에는 자신의 성공을 알리기 위해 굳이 수트를 입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영민한 팔로어들은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 룰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저 입고 싶은 대로 입을 것!또 하나 궁극적인 질문이 남았다. 애슬레저 룩과 편한 옷 일색인 오프-듀티 룩을 어떻게 온-듀티 룩으로 소화해야 할까? 리사 아이켄은(Lisa Aiken)은 “옷차림이 간편해지더라도 언제나 개인적인 취향이 담긴 특별한 아이템을 한 가지씩 고수할 것. 평소 나는 무슨 옷을 입든 에르메스 워치와 다양한 반지들을 레이어드한다”고 스타일링 비법을 조언한다. 최근 나는 앞으로 6개월간 원치 않는 다이어트를 할 뻔했던 하이더 아크만의 트랙 팬츠를 대신할 완벽한 아이템을 찾았다. 바로 아디다스 오리지널스의 삼선 시가렛 팬츠다. 테일러링이 더해진 애슬레저 룩이라니, 이보다 더 완벽한 게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