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 바람을 품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정우. 이 낯선 이름 앞에서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벌써 데뷔 10년 차 배우인 그는 영화 <숙명> <짝패> 드라마 <신데렐라맨> 등에 출연해 왔다. 그래도 모르겠다면, 일명 ‘고추장 액션’이라는 신 경지를 일궈낸 이성한 감독의 <스페어>를 떠올려 보라. |

소심남, 마초를 꿈꾸다정우는 생애 두 번째 주연작 (이하 )의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이 영화는 놀랍게도 그의 자전영화다. 폭력과 권력이라는 위악적인 매력에 도취된 영화 속 십대 소년 ‘짱구’는 바로 10년 전 그의 자화상. 사람들은 꽤 자주 자신의 10대 시절을 돌아보곤 한다. 그 시절의 ‘나’는 아련한 추억인 동시에 상처이기도 하다. 모든 소년 소녀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정우는 자신의 생채기를 용기 있게 들추고 과거를 다시 살아냈다. 그리고 치유를 경험했다. 이는 누구에게나 쉽게 주어지지 않는 특별한 체험이다. “전 진짜 소심한 아이였는데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싸움 잘하는 형이 너무 멋져 보였어요. 보통 남자의 심리에는 우두머리가 되고 싶고 강해보이고자 하는 욕구가 있잖아요. 특히 제가 부산에 살아서 더 심했던 것 같아요. 이 영화는 소심하던 아이가 학교 ‘짱’으로 등극하는 과정을 근사하게 그리는 게 아니라, 남자의 ‘찌질한’ 속내를 가차없이 보여주거든요. 때리는 사람도 맞는 사람 못지않게 두려워요. 괴롭히는 것과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한끝차이예요. 이 영화를 보면 때린 친구들이나 맞았던 친구들 모두 치유 받지 않을까요?” “당신에게 맞았던 사람은 치유는커녕 이 영화를 보면서 새삼 이를 갈 것”이라는 말에 그가 와르르 웃음을 쏟아낸다. “그렇게까지 심하게 때리진 않았어요. 나 혼자만의 착각인가? 으하하.” 그가 이 영화를 찍으며 잡아챈 감정은 비단 자신의 지난날만이 아니라, 못 본 척 숨겨둔 아버지를 향한 진한 그리움이다. 고등학생 때 아버지를 잃었을 때는 정작 큰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영화를 찍으며 다시 만난 아버지는 연민이란 이름으로 다가왔다. “그땐 철없던 시절이라 아버지에 대한 거리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지금이 더 슬퍼서 의식적으로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아요. 현장에서도 감정 주체가 안 돼서 힘들었어요. 아버지를 목욕탕에 모셔 드리는 장면이 있는데 아버지의 힘 없는 뒷모습을 보면서 울컥했어요. 눈물을 흘리면 안 되는 신이었는데...” 어느 새 장난기 가득하던 그의 눈망울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런데 새삼 반항만을 일삼던 천생 ‘짱구’가 배우가 될 생각을 품었다는 게 기특하다. 그는 불량서클 ‘짱’으로 활동하는 공사다망한 와중에도 연기학원에 다녔다. “어릴 때부터 끼가 있었던 것 같아요. 나 자신을 분출하고 싶은 욕구랄까. 영구와 맹구를 보면서 개그맨을 꿈꿨고, 현진영과 듀스를 보면서 댄스가수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조금만 방황하는 낌새를 보이면 바로 형한테 두들겨 맞았기 때문에(웃음)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죠. 그러던 중 대학 입시철이 다가왔고 연예인이 되어야겠다는 욕망은 더욱 강해졌어요. 제가 붙잡을 곳이라고는 부산에 오직 한군데 있던 연기 학원밖에 없었어요.” 한때 연극무대에 섰던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지로 학원에 다니게 되었지만, 물론 그는 그곳에서도 적응하지 못한 채 겉돌았다. “글쎄, 학원에 갔더니 예쁘게 생긴 남자애들이 서울 말씨로 연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아우, 소름이 쫙 돋았죠.” 평범해서 오히려 어려운 남자 세상은 유형을 분류하는 것을 즐긴다. 그것도 최근에는 한층 쉽고 간편해졌다. 아날로그냐 디지털이냐. 그러나 세상에는 쉽게 양식화 되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 가장 최신의 홈시어터로 반세기쯤 묵은 영화를 감상하는 사람인들 왜 없겠는가. 자신의 취미와 취향마저 그럴 듯하게 가장되는 시대지만, 정우는 이러한 강박의 덫에서 사뿐히 벗어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번지르르한 말로 자신을 꾸밀지 모르는 ‘촌스러운’ 남자다. “긴장을 늦추기 위해 무얼 하나요?” “그냥 집에 있어요. 영화보고 게임하고. 가끔 친구들 불러서 맥주 한 캔 마시는 정도예요.” “하루 일과는?” “운동 집 운동 집.” 참 재미없다. 본인 스스로도 인정한다. 맛집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즐긴다고 하길래 어떤 음식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날아온 대답은 대뜸 “육고기와 비빔밥”이란다. “여자친구는 당연히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을 좋아하죠. 그런데 그런 곳에 가면 여자친구가 음식 사진을 자꾸 찍어대요. 아니 밥상머리에서 왜? 그것도 함께 있는 사람이 아닌 음식을 찍어서 홈페이지에 올리는 이유가 뭐죠?(웃음)” 이어서 “즐겨듣는 음악은?” “최신가요.” 묻는 사람이 무색할 정도로 ‘이렇다 할’ 취향이 드러나지 않는다. 다행히도(?) 최근 우연히 접한 존 레전드의 노래에 푹 빠져 있다고 덧붙인다. “어디 가서 팝송 한곡 멋지게 부르면 좋잖아요. 그래서 가사를 외워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으하하.” 가식이 없어서 편견도 없을 것 같은 이 남자. 주변 신경 쓰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도 눈 하나 깜짝 안할 것 같지만, 의외로 주위 시선을 의식하는 소심함이 그의 본질이다. “길을 걸을 때도, 운동할 때도 사람들과 되도록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허공을 응시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그 상황을 생동감 있게 재연하기 위해 별안간 벌떡 일어나 스튜디오를 이리저리 배회한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 사진 촬영 중에도 그는 마구 고함을 질러댔다. 순간 몰입한 탓이다. 친구들이 그를 ‘똘아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그 의미를 조금 알 것도 같다. “배우가 됐을 때부터 지금까지 겉멋 드는 것을 경계하는 편이예요. 다만 주눅 들기 싫은 건 있죠. 어느 자리에 가도, 눈앞에 어떤 대단한 톱스타가 있어도, 절대 기죽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이 있어요. 전 부산싸나이잖아요!” 긴장과 불안은 나의 힘 그의 일상을 듣다 보면 마초기가 다분한 천생 촌스러운 ‘대한민국 남자’라는 생각이 들지만, 한 시간 남짓한 인터뷰 중에, 별 장치도 없는 이곳에서, 웃었다가 눈시울이 붉어졌다가 하는 걸 보면 남다른 감수성을 지닌 영락없는 배우다. 배우라는 족속에겐 어떤 특별한 스위치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 스위치가 한번 켜지면 돌이킬 재간이 없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그 사람의 언어로 말을 하고 그 사람의 습관대로 움직인다. 하지만 그는 “배우는 보통 사람과 똑같다”고 말한다. “프로이기 때문에 집중하는 것뿐이죠. 직업이잖아요. 화가가 정신없이 몰입해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배우는 그저 연기에 몰입하는 거예요.” 남들보다 주목받고자 했던 소년. 내 안의 뜨거운 에너지를 어떻게 발산해야 할지를 몰라 주먹질을 배웠던 소년은, 이윽고 배우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치열하게 당도한 이 세계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거의 10년 간 조단역에 머물며 안달 났을 법도 하건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제겐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더 중요했어요. 내가 스스로를 칭찬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은 기회는 얼마든지 온다고 생각했고요. 답답하고 짜증이 났던 건 내가 내 연기를 보고 칭찬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어요. 넌 왜 집에서 연습할 때처럼 카메라 앞에서 못하니?! 남들에게 잘했다고 칭찬받은 적도 있지만 그때도 난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했어요.” 긴장과 불안이 그를 지탱하는 8할일 정도로, 그는 촬영이 있으면 편하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의외로 예민한 남자다. 그는 스스로를 괴롭혀 만족을 얻는 일종의 ‘마조히스트’. “크랭크인 무렵이 되면 시나리오가 너무 지긋지긋해져요. 그만큼 많이 보고 분석해서 한시도 내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어요. 급기야 시나리오를 집어 던져버리고 나면 비로소 마음이 가벼워져요. 그리고 나면 왠지 자신만만해지고요. 다 덤벼보라 그래!(웃음)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힘들죠.” 아이러니컬하지만 그의 근사한 근육도 다 자기 학대의 결과물이다. “전 불안할 때 운동에 집착해요. 내 몸이 좋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내 심리상태가 불안하다는 뜻이에요.”본래 두려움은 실체가 없는 법. 삶을 즐기는 방법은 진짜 자신을 발견하고 나를 건강하게 사랑하는 것일 테다. 그러기 위해선 두려움을 던지고 진짜 나를 만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는 비교적 어렵지 않게 진짜 자신을 만나 한껏 즐기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바로 카메라 앞에서다. “재미있어요. 카메라 앞에서 내가 미친놈처럼 즐기고 있을 때 연기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가 지금까지 쌓아 온 이미지는 다소 껄렁껄렁하고 코믹하다. 하지만 그토록 감수성 풍부한 그라면 다양한 이미지에 대한 욕심이 없을 리 없다. “전 마초 같은 캐릭터가 좋아요. 그리고 센 영화. 철저한 작가주의 영화도 좋고요. 지금은 선택받는 입장이지만 언젠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믿고 있어요.” 그는 “저 배우 연기는 참 괜찮아”라는 말을 듣는 것이 자신의 최종 목표라는 얘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짜릿해했다. 일상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의 느긋함과는 달리 그는 사뭇 예민하고 진지해져 있었다. 그의 삶은 이미 ‘연기’라는 대지에 첨예하게 뿌리 내린 듯했다.적당한 긴장감은 공간의 에너지를 집약시켜 단단한 밀도를 형성한다. 그는 가벼움과 무거움, 여유로움과 치밀함을 적절히 오갈 줄 안다. 이 효과적인 리듬으로, 그는 상대방을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시킨다. 그가 이 리듬을 스크린 위에서도 자유자재로 요리하게 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엘라서울 11월호 NO.21호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