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을 두드리는 노년의 시(時), 영화 <시(詩)>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여인은 문장을 만나 잃었던 시간을 찾았다. 내 인생 가장 뜨거운 순간은 언제였던가. 시는 여인의 세월을 거꾸로 흐르게 한다. 이창독 감독의 영화<시>는 시를 쓰는 소녀에 관한 영화다. ::영화, 이창동, 오아시스, 박하사탕, 만무방, 눈꽃, 시로의 섬, 위기의 여자, 삐에로와 국화, 저녁에 우는 새, 자유부인, 신궁, 화조, 사랑의 조건, 여수, 윤정희, 안내상, 엘르, 엣진, elle.co.kr:: | ::영화,이창동,오아시스,박하사탕,만무방

감독 이창동 출연 윤정희, 안내상, 김희라, 김용택 개봉 5월 13일‘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내 인생 가장 뜨거운 순간 다시 깨어난 부신 눈으로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잔잔한 음성으로 미자가 시를 읊는다. 예순을 훌쩍 넘긴 여인은 그 순간 소녀가 되어 세상을 품는다. 한 그루 나무도 허투루 보지 않는다. 잘 봐야 한다. 그래서 시를 써야 한다. 이마에 잡힌 주름까지 곱게 보인다. 70년대를 풍미한 여인, 윤정희다. 4월 14일 수요일 압구정 CGV에서는 이창동 감독의 새 영화 의 제작보고회가 열렸다. 이후 15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하는 윤정희의 출연으로 화제가 되었던 영화는 그간 제작보고회도 현장공개도 없이 수개월 동안 베일에 싸여있었다. 마침내 공개된 메이킹 필름으로 이창동 감독이 써내려 간 짧지만 강렬한 여운이 남는 시 한 편을 들을 수 있었다.미자(윤정희)는 작은 풀꽃에도 가슴 설레어 할 줄 아는 천상 여자다. 허름한 경기도의 작은 아파트에서 손자와 단둘이 살고 있던 미자는 동네문화원에서 시 수업을 듣는다. 그때부터 미자는 시에 빠져 산다. 시로 담을 수 있는 사소한 일상의 모든 것에 시선을 기울이며, 그 안에서 제 삶을 추억한다. 내 인생 가장 뜨거웠던 순간은 언제였던가. 아이러니하게도 미자는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는 순간 동시에 배반을 느낀다. 는 순전히 윤정희를 위한, 윤정희에 의한 영화다. 처음부터 끝까지 미자가 끌고 가는 이야기다. 공교롭게도 배우 윤정희의 본명까지 ‘미자’다. 이창동 감독은 윤정희를 생각하면서 시나리오를 작업했고 채 완성이 되기도 전에 이 노장의 여배우를 찾아갔다. 이창동 감독은 “미자는 겉으로 보기엔 순수하고 맑다. 그러나 그 내면은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깊다. 그런 미자를 차게 연기할 수 있는 것은 윤정희 선생님밖에는 없다. 착각일수도 있겠지만 평소 작품을 통해 만났던 윤정희 선생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 미자는 꽤 비슷하다”고 고백했다. 윤정희는 이창동 감독이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온 감격에 겨운 때를 떨리는 목소리로 회상한다. “나를 위한 시나리오를 썼다는 이창동 감독의 말에 기쁘고 행복했다. 항상 나의 새로운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를 감독이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며, 미자로 산 지난 몇 개월의 시간을 설명한다.이창동 감독은 물질주의에 젖어 있는 현재에 숨쉬고 있는 이 시대의 무감각해진 사람들에게 를 바치고 싶었다. 물질적으로 환원되지 않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삶의 ‘무엇’이 우리 등뒤를 받쳐주고 있음을 일깨워주고 싶었다. 이것은 소수자만이 감상하는 감독 자신의 작품, 그리고 왜 영화를 만드는지에 대한 감독 자신의 근원을 묻는 질문과 같기도 하다. 이창동 감독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필요한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이 점차 사라져가는 요즘 세태에 관해 관객과 나누고 싶었다”는 바람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관객과의 소통이 절실했다. 자꾸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관객에게 확인 받고 싶었다. 그래서였다. 는 전작인 , 보다도 힘을 많이 뺐다. 이창독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는 세상에 사라져 가는 모든 것에 헌사 하는 시다. 영화를 보고 모든 사람들이 꿈을 꿀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윤정희의 말처럼, 우리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풀빛이자 잃어버린 문장에 대해 이 시대의 문명에 감독이 던진 중요한 화두다. 영화 를 어떻게 해서 만들게 되었나. 이창동: 모든 작품이 그랬지만, 역시 도전이자, 새로운 것을 해보는 씨름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얼마나 도전을 잘 치를 수 있고, 이를 관객들이 받아줄 수 있을지 걱정이 많이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어떤 것들이 사라지는 세태에 관해 관객들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를 만들게 되었다. 영화제목이 ‘시’다. 과연 관객들이 많이 보러올까.이창동: 비슷한 질문을 영화 만들 때마다 받았다. 때에도 장애인, 사회 부적응자가 나오는 영화를 누가 보러 올까 그랬었다. 근본적으로 관객과 소통하고 싶다. 관객들의 가슴을 두드리고 싶다. 진심이 전달되면 관객들과 소통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이창동 감독님 영화의 대부분의 주인공이 전체 영화분량의 90%이상을 소화한다. 주로 일상적인 생활에서 아픔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이번 영화 의 주인공인 미자는 어떤 인물인가.이창동: 영화를 보여주지 못하고 이야기를 하려니, 속 시원히 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옆에 있는 윤정희 선생은 전설적인 여배우다. 동시에 한 남자의 아내로 뒷바라지 하며 사셨다. 지금도 파리에서 살고 계시는 대단하게 보이는 분이다. 작은 아파트에서 스스로 작은 것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60대의 여인과 다를 바가 없다. 나이는 먹고 주름을 들었지만 내면만큼은 나이를 먹지 않는 그런 여인이다. 달을 보면, 뭐가 그렇게 황홀한지 그런 감정에 젖어 현실을 잊기도 하는 여인이다. 이런 여인이 자기 삶에 대해 생각해보고 자기가 내려야 하는 어떤 선택을 앞두고 있는 인물이다. 왜 윤정희를 미자로 선택하게 되었나. 평소 잘 알고 있는 인물이라서? 우연찮게 주인공인 미자와 윤정희의 본명도 미자로 동일하다. 이창동: 당연히 원래 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잘 알지는 못한다. 가끔 부산영화제 같은 데서 시상하다가 뵙기도 했고. 스크린 속의 모습이 실제 모습은 아니지만, 이미지는 그 인물이기도 하다. 나는 그런 선생님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당연하게도 윤정희 선생님이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가 완성되기 전에 선생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했고 선생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셨다. 원래 시나리오가 완성도 되기 전에 배우와 감독이 만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인데도. 선생님의 본명이 미자가 아니었더라도, 배역의 이름은 미자 였을 것이다. 흔한 이름이지만, 이름에 아름다울 美가 있고. 그만큼의 촌스러움과 아름다운 느낌이 함께 들어있는 주인공이었으면 했다.윤정희 선생님의 오랜 공백 끝에 복귀하신 작품인데, 부담감은 없었나.이창동: 나는 부담스러운 것이 별로 없었다. 그간 윤선생님이 3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하셨는데 과거에 하신 것이 이미 몸에 배이셨을 것이다. 그냥 연기 경험이 없는 분과는 다르다. 만약 나와 부딪힐 경우에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너무 열려 있었던 분이셨다. 배우로서 갖기 힘든 미덕이다. 흔히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깨는 것에 대한 저항이 생기기 마련인데, 윤선생님은 최대한 열려 있었고 잘 안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굉장히 속상해하셨다.오랜만에 영화에 출연하셨는데, 소감이 어떤가.윤정희: 1년 6개월 전인가. 이창동 감독님이 나를 생각하면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얼마나 감동적이고 기쁘고 행복했는지. 아직 줄거리도 못 들었는데, 감독님 작품들을 봐왔기 때문에 남편(피아니스트 백건우)과 나는 기쁨으로 잠을 못 이뤘다. 정말 흥분 속에서 촬영을 했다. (이창동 감독에게)굉장히 고맙게 생각한다. 나의 새로운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는데. 내가 찾고 싶었던 모습을 알려 주었다. 그래서 현장 분위기, 호흡이 아주 아름답게 진행되었다. 60이 넘은 나이에도 소녀같이 살고 있다. 촬영하는데 육체적으로 힘든 부분은 없었는지. 윤정희: 배드민턴을 하는 장면이 있었다. 팔이 아픈데, 오히려 제작사 쪽에서 병원에 가자고. 나는 그냥 파스를 며칠 붙이고 나니 괜찮아 지더라고. 신나게 그리고 희망을 갖고 즐겁게 일하면 어려운 게 사라지는 것 같다. 이창동: 배드민턴 장면은 꽤 중요했다. 밤에 하는 것이라서 밤새 배드민턴을 하고 있는 모습을 찍어야 해서 걱정이 많이 되었다. 젊은 사람도 힘든데, 오히려 본인이 아무렇지 않다고 하셨다. 미자와 윤정희 선생님의 닮은 부분이 있다면.윤정희: 미자와 비슷한 것이 많다. 들꽃을 봐도 감탄하고 하는 것들이. 요전에 남편이 시나리오를 읽고 나와 많이 비슷하다고 할 정도로. 성격 연기는 걱정이 덜 되었다. 오히려 어떻게 감독님이 원하는 자연스러운 연기를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평생 처음으로 남편 안에서 연기 연습을 했다. 남편이 감독과 똑 같은 말을 하더라. ‘좀 자연스럽게 할래!’ 15년 공백 후 촬영을 하는 건데, 어떤 느낌이 들었나.윤정희: 옛날 친한 친구를 다시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항상 영화 현장을 떠났다는 생각은 안 했다. 그래서 촬영 분위기는 너무 자연스러웠다. 촬영하면서 느꼈던 제작환경의 변화는.윤정희: 예전에는 모니터로 확인하는 기술적인 환경이 없었다. 그래서 촬영 후 내 연기를 분석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칸의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이번 작품으로 칸에 갈 수 있는 전망은.이창동: 칸 영화제에는 작품을 보낸 상태다. 위원장과 위원들의 감상에 대한 의견을 들를 수 있었다. 공식 발표 전까지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관례라 지금 기다리고 있다. 영화 포스터의 ‘시’라는 글씨를 직접 썼다고.이창동: ‘시’라는 글씨는 너무 잘 써도 안 되었다. 미자가 쓰는 시와 같은 느낌이다. 꾸미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는 글씨여야 했다. 그냥 큰 종이에다 썼다. 잘 못 쓰는 사람이 열심히 쓰는 사람 같은 느낌. (포스터 쪽으로 몸을 돌리며)그렇지 않나?소설가 출신의 영화감독이 시라는 제목의 시에 관한 영화를 만들었다. 소설, 시, 영화의 매체가 어떻게 다른 것 같나.이창동: 세상을 보면서 고민하고 느끼고 소통하고 싶은 것은 똑같다. 생활방식이 동일하다. 하필이면 제목을 ‘시’라고 한 것은 질문 하기 좋은 화두였기 때문이다. 사실 없어도 살 수 있는 그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다. 잊기 쉬운 어떤 것. 돈 되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필요한 어떤 것.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삶에 있어야만 하는 것. 그런 점에서는 소설이나, 다른 예술 장르나 똑 같은 것 같다. 영화가 도전이라고 했는데, 어떤 의미에선가.이창동: 항상 영화를 시작하고 매 작품마다 큰 도전처럼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했다. 관객과 만나고 싶은데 쉬운 방법으로 만나고 싶진 않았다. 장애물 경주를 하는 것처럼 그것을 통과하는 어려운 길을 통한 만남의 방식처럼. 이 영화도 그런 점에서 나에게는 새로운 것, 낯선 방식을 통과했던 영화였다. 영화 는 비교적 전작에 비해서는 밝은 영화인 것 같다.이창동: 내 생각에는 전작들도 어둡지만은 않았는데.(웃음) 를 본 주변의 많지 않는 분들은 내 전작들에 비해 덜 불편하다고들 하더라. 미자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했다. 그럼에도 촬영하면서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 윤정희: 나와 비슷한 모습이지만 이것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하느냐, 자연스럽게 표현하느냐 그걸 미칠 때까지 도달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특히 이 영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꿈을 꿨으면 좋겠다. 꿈꾸는 대학생, 꿈꾸는 중년, 꿈꾸는 노년이 되는 것을 이영화가 도와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