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휘, 늘 거기에, 그렇게
어릴 때부터 스스로가 쓸모 있는 사람인가에 대해 고민하던 이동휘는 발효의 시간을 겪고 난 뒤 더 많은 물음표를 밟고 서 있다. 사람들에게 위로와 즐거움을 주는 배우가 된 지금도 그는 충분히 견딜 가치가 있는 시간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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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 스타일의 로고 트렌치코트는 Gucci.
<라디오스타>에서 설현과 함께 출현한 것에 대해 “운명의 흐름인 것 같다. 사이클이 돌다가 딱 맞아떨어졌다”고 했다. <엘르>와의 만남도 ‘운명의 흐름’일까 어제 어머니께 <엘르> 화보를 찍는다고 하자 신기해했다. 내가 오래전부터 사보던 잡지라는 걸 아신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강동원 선배의 커버가 기억난다. 너무 멋있어서 한참 봤다.
어릴 때부터 잡지를 많이 봤다며 세상에 관한 호기심이 많았다. 모험심이 있는 타입은 아니어서 간접 경험이라도 많이 하자는 취지로 잡지를 보기 시작했다. 패션지를 종류별로 정기 구독하고 <타임>이나 <뉴스위크>지도 읽었다. 똑똑해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강동구 깊숙한 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내게 잡지라는 창을 통해 본 세상은 넓고 방대했다. 이때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이었는데 여전히 잡지들을 사본다. 화보뿐 아니라 그 안의 정보들을 다 챙겨보고 배우, 아티스트들의 인터뷰 기사에서 배우고 느끼는 것들도 많다. 잡지는 나한테 교과서 같은 매체다.
기억에 남는 인터뷰가 있다면 어떤 남성지에 실렸던 조디 포스터의 인터뷰. 그녀가 갖고 있는 생각들과 삶의 방향성을 편하게 대화하듯이 이끌어낸 게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머니볼>과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에 나왔던 조나 힐의 인터뷰. 코믹한 배우라고 여겼는데 작품에 접근하는 방법이 철두철미하고 끊임없이 연구하더라. 이후 그의 연기를 다시 보게 됐다.
해외 배우들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들은 인터뷰에 대한 태도가 열려 있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다. 편하게 식사하거나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서 인터뷰를 하기도 하고 한 번의 인터뷰를 위해 여러 번 시간을 내주기도 한다. 그러니 좀 더 속 깊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그럴 수 있겠다. 조나 힐의 인터뷰도 그랬던 것 같다. 오후 몇 시에 그를 만났다, 그 다음 날 만난 그의 얼굴은 어떠했다, 이런 식이었다.
본인은 어떤가? 지금 충분히 마음이 열려 있나 그럼. 잡지는 오래 즐겨봤기 때문에 다른 어떤 매체보다 가깝게 느껴진다.
만약 본인에게 <엘르> 지면이 주어진다면 어떤 내용을 다루고 싶은가 ‘한국인에게 옷을 잘 입는다는 것의 기준은 무엇인가’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해 보고 싶다. 사람들은 ‘보통의 기준’이란 걸 갖고 산다. 우리나라에서 ‘옷을 깔끔하게 잘 입는다’고 하면 대부분 ‘모나미 룩’을 떠올린다. 블랙과 화이트 컬러에 충실한 스타일 말이다.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단정하게 입어야 옷을 잘 입는 사람으로 인식된다. 반대로 그것과 다른 스타일을 시도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한다. 요즘 시각적 공포를 자아내거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성을 드러낼 때 눈치를 보게 만드는 사회 시선이 옳은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정제된 디자인의 오프 화이트 컬러 셔츠는 Louis Vuitton. 마린 스타일의 와이드 데님 팬츠는 Juun. J.

그런지 느낌을 살린 하와이언 셔츠는 Saint Laurent by Hedi Slimane. 레이어드한 탱크톱은 American Apparel. 브레이슬렛은 에디터 소장품.
왜 그런 고민을 하게 됐나 내 인생의 낙은 꾸미는 거다. ‘이 옷은 내가 입으면 재미있겠다’ ‘남들이 잘 소화하지 못하는 옷인데 난 어떨까?’ 옷을 통해 내 개성을 표현하려고 한다. 배우 이동휘를 떠올렸을 때도 이미지와 개성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입혀주는 옷만 입는 배우’라는 소릴 듣고 싶지 않다. 문제는 공식 석상에 참석하면 ‘쌍문동 패셔니스타가 이렇게 입었다’ ‘이동휘, 역시 패셔니스타’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쏟아진다는 거다. 사실 내가 나서서 패셔니스타라고 공언한 적은 없지만 이런 기사를 접한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되는 옷을 입었는데 왜 패셔니스타야?’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 실제로 이런 반응을 체감하고 있어 공식적인 자리에선 자제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스타일과 취향이 실시간으로 이슈가 되면서 옷 입는 재미가 줄어든 건가 대중의 관심 밖에 있을 땐 뭘 어떻게 입든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런 상황을 의식하게 된다. 옷을 살 때도 망설여진다. 그렇다고 나는 ‘쿨’하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이럴 수가 없다. 패션으로 어필해야 하는 일을 한다면 망설임 없이 표현하고 외부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지만 배우에겐 지켜야 할 어떤 지점이 있다. 뭔가 화려함을 추구하고 밀어붙인다면 평범한 캐릭터를 맡았을 때 혼동을 야기할 수 있다.
오히려 지금 보이는 모습이 일종의 위장막이 돼 다른 캐릭터를 연기할 때 반전 요소가 되지 않을까 그러면 좋겠지만 선입견이라는 게 진짜 무섭다. 이걸 깨는 과정이 너무 고통스럽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선배들을 보면서 알았다.
이런 고민을 지인들과 공유하기도 하나 친분이 있는 디자이너와 친구들 사이에서도 화두다. 한 친구가 딱 잘라서 이러더라. ‘SNS를 안 하면 되잖아.’ 그 친구 말대로 개인적인 즐거움으로 간소화하고, SNS나 공식적인 자리를 통해 공유할 필요가 없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고 있다.
패션에 관한 수다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빅뱅’의 최승현이 많은 조언을 해 준다. <라디오스타>에 출연했을 때도 의상 컨펌을 해 줬다(웃음). 내가 요즘 화려하게 입는 것 같다고, 사람들이 많이 시청하는 예능 프로그램에선 단정하고 귀엽게 입으라고 해서 촬영 직전에 바꿔 입었다. 변요한과 류준열과도 이런 대화들을 종종 한다. 각자의 스타일이 있는 친구들인데 나를 존중해 준다. “패션은 동휘 형이지” 하면서.
본인 스타일에 대한 의견 또는 지적을 잘 수렴하는 편인가 다른 사람들의 생각 또한 개성의 일부이기 때문에 논쟁화하지 않고 잘 들으려고 한다. 다만 수렴은 하되 결정은 내가 내린다.
옷장에서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아이템은 무엇인가 맨투맨과 스웨트셔츠. 하나에 꽂히면 수집하다시피 한다. 그리고 ‘엠에이원 재킷’이라는 항공 점퍼. 이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많다. 가끔 전문 숍에 온 듯한 느낌도 든다. 그걸 알면서도 “이 디테일과 매듭!”이라고 감탄하며 누가 봐도 비슷한 점퍼를 또 산다.

실크 파자마 셔츠는 Louis Vuitton. 레이어드한 멜란지 그레이 티셔츠는 Riding High by Mue.

플라워 아플리케로 장식한 더스티 블루 컬러의 가죽 셔츠는 Valentino. 샌드 컬러의 실크 팬츠는 Kimseoryong. 화이트 셔츠는 Cheap Monday. 선글라스는 이동휘 소장품. 브레이슬렛은 에디터 소장품.
오늘은 핑크색 맨투맨과 신발로 깔맞춤했다 요즘 같은 봄 날씨에는 핑크다. 실은 핑크에게 미안할 정도로 우려먹고 있는데 역시 오늘 옷장 문을 열자마자 핑크색이 보였다(웃음).
학창 시절부터 패션 내공이 남달랐다고 들었는데 어느 정도였나 주위에 옷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나 만큼은 아니었다. 막노동을 해서 ‘나이키 에어맥스 97 리비에라’를 사기도 했고 교복 입고 브랜드 숍에 구경 갔다가 ‘여기 옷을 살 수나 있겠어?’ 하는 냉대도 많이 받았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한 푼 두 푼 모아, 실은 부모님 몰래 성악 레슨비를 챙겨 갤러리아백화점 편집매장 ‘맨지디에스(MANgds)’에서 서상영, 김서룡, 정욱준 선생님이 만든 옷을 사 입었다. 아무도 몰라줬지만 남보다 앞서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의 옷을 입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얼마 전 김서룡 선생님께 이 얘기를 드렸더니 좋아하며 웃으시더라.
지난 3월에 열린 서울패션위크에 관한 인기 해시태그 중 하나는 ‘이동휘’였다며. 런웨이 프런트로에서 모습이 자주 포착됐는데 서울패션위크에 대한 남다른 추억이 있나 대치동의 세텍(SETEC)에서 열렸을 때 표를 구해서 까치발을 들고 쇼를 본 기억이 있다. 8년 정도 알고 지내온 푸시버튼의 곽두영 대표님이 내가 옷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컬렉션 쇼를 보여준 적도 있다. 그게 너무 고마워서 나중에 배우로서 당당히 인정받으면 마음의 빚을 갚으려고 했는데…. 좀 쑥스럽더라. 친분 있는 디자이너들의 컬렉션 쇼에 참석했는데 내가 너무 부각된 것 같아서 말이다. 다음 시즌은 얌전히 응원하려고, 촬영이나 빡빡하게 잡혔으면 좋겠다.
<베테랑> <뷰티 인사이드>를 기점으로 대중의 관심 영역에 불쑥 나타났다. 그러기까지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을 텐데 어떻게 버텼나 친척 중에 연기하는 분이 계셔서 배우가 해도 괜찮은 직업인지 물어본 적 있다. 하지 말라고 하더라. 그땐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뭔지 알겠다. 아버지께서 반대했을 때도 솔직히 그 마음이 이해가 됐다. 실은 아버지와 딱 2년만 더 해 보고 그래도 안 풀리면 연기를 그만두기로 약속했다. 가족의 행복도 중요했고 내 의지를 무조건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당위성 같은 게 없었다. 다행히 약속한 2년이 다 돼갈 때 영화 <집으로 가는 길>에서 처음으로 소위 이름 있는 역할을 맡았다. 어쩌면 유효기간을 정해두었기 때문에 더 치열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일을 하기 잘했다는 확신이 들었던 적은 어릴 때부터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인가, 무엇을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학교에서 암기를 잘하고 시험을 잘 봐야 좋은 직업을 얻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왜 이런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지는지 의문을 가지면서도 정작 그런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배우를 직업으로 선택한 뒤로도 내 가치와 쓸모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전환점이 된 게 <응답하라 1988>이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류동룡’이란 좋은 친구를 통해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는 말을 들으면서 내가 연기한 캐릭터를 통해 누군가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주는 게 가치 있는 일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럴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정제된 디자인의 오프 화이트 컬러 셔츠는 Louis Vuitton.
드라마 <안투라지>에 캐스팅됐고 영화 <키 오브 라이프> <원라인> <공조> 등이 개봉 예정이거나 촬영 중에 있는데 실력 발휘를 하고 있나 밑천이 드러날까 걱정되는 게 이 일을 하면서 짊어지고 가야 할 숙명이겠지만, 실력이 좀 늘었구나 할 때가 있긴 하다. 대본과 콘티를 열심히 보다 보면 그 안에서 내가 해내야 할 몫이 보이면서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연구하게 된다. 그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해서 연기화 될 때 ‘나도 이제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 명쯤 있으면 좋겠다 싶은 친구나 별 걱정 없이 살아가는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 왔는데 차기작에선 어떤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여전히 나를 ‘류동룡’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을 배반하게 될 것 같다. <키 오브 라이프> <원라인> <공조>에서 맡은 캐릭터 모두 일말의 여유가 없는 악한 본성을 갖고 있다.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어서 영화 제목들을 밝힐 수 없는데 자기만 잘난 줄 아는 안하무인 캐릭터가 있는가 하면, 어떤 작품에서는 약자들을 등쳐 먹으면서 생존하는 비열한 역할을 맡았다. 또 버림받은 뒤 살아남기 위해 잡초처럼 자란 못된 캐릭터를 연기한 작품도 있다.
이제는 잠재된 가능성을 발현시켜야 하는 시점이지 않을까 대학교 은사님이자 극단 ‘목화’를 이끌고 있는 오태석 선생님께서 배우는 항상 주머니에 구슬이 많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 다양해야 한다는 의미다. 내가 쥐고 있는 구슬들이 녹슬지 않도록 운용하다 보면 비장의 무기라고 거창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 제대로 된 뭔가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교수님께서 “동휘는 구슬이 많아”라고 하셨는데 지금까지 너무 많은 걸 보여드린 것 같기도 하고(웃음). 배우라면 외향적이고 진취적이며 모험심을 갖고 경험이 많아야 할 텐데 나는 그런 타입은 아닌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잡지를 보면서 얻은 상상력을 바탕으로 나 자신을 이룩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에이, 설마. 지금 하고 있는 공개 연애만큼 배우에게 모험적인 것도 없지 않나 그건 솔직함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남들 몰래 조마조마하게 만나는 게 모험이다.
Credit
- PHOTOGRAPHER 김혁
- EDITOR 김영재
- HAIR STYLIST 이에녹
- MAKEUP ARTIST 류현정
- FASHION ASSISTANT 김수현
- DIGITAL DESIGNER 전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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