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몽상가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파자마 세트와 로브 코트, 슬립 드레스, 시트 드레스, 슬리퍼를 침실이 아닌 외출을 위해 입어야 하는 매혹적인 이유. ::파자마,로브코트,슬립드레스,시트드레스,슬리퍼,침실룩,파자마룩,잠옷,슬립웨어,트렌드,패션,엘르,elle.co.kr:: | 파자마,로브코트,슬립드레스,시트드레스,슬리퍼

여인들의 침실 패션을 부르는 부두아르 스타일(Boudoir Style)은 최근 몇 년 동안 젯셋족들의 트렁크에서 빠진 적 없는 단골 아이템이다. 패션위크 기간엔 파이핑을 두른 파자마 세트와 뒤축이 없는 슬리퍼가 새로운 유니폼처럼 자주 목격되고, 패피를 상징하던 도도함 대신, 여유롭고 힘을 뺀 애티튜드가 세련된 ‘잇’티튜드로 퍼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패션 전문가들은 파자마를 ‘제2의 스키니 진’으로 명명하며 다가올 봄과 여름, 길거리를 평정할 것으로 예견했다. 미끈하게 흐르는 실크와 기분 좋게 사각거리는 코튼으로 만든 파자마 세트, 몸의 굴곡을 자연스럽게 드러낸 바이어스 컷 슬립과 캐미솔 톱, 우아한 이브닝 로브, 쾌적한 침대 시트를 연상시키는 시트 드레스와 밑창이 납작한 실내용 슬리퍼까지, 침실에 머물러야 했던 근사한 아이템들이 빛을 보게 됐다. 믿기지 않지만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이미 운명처럼 슬립 웨어와 사랑에 빠진 상태다. 런던 하이패션의 산실, 셀프리지 백화점은 이런 흐름을 재빠르게 간파하고 란제리와 슬립 웨어 섹션을 대대적으로 확대한 이후, 몇 시즌 만에 매출이 50%나 늘었다.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실린 슬립 웨어 섹션의 바이어 리디아 킹(Lydia King)의 답변은 명쾌하다.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이른바 기분 좋은 패션(Feel-good Fashion)의 종착지가 바로 슬립 웨어이기 때문이죠.” 사생활마저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디지털 세상에서 정신적인 안락을 누리고픈 현대인들의 욕구가 은밀한 침실 풍경을 바깥으로 끌어낸 것이다. 파자마와 로브를 걸쳤을 때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안락하고 느슨한 기분은 일종의 힐링 요법에 견줘도 될 만큼 효과적이어서 한 번 경험한 이들은 계속해서 슬립 웨어에 탐닉하게 된다. 이는 막연한 기분이 아닌, 실제로 입증된 객관적인 사실로 일본 일간지 <니케이>가 2015년에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파자마를 입는 순간, 착용자의 뇌가 수면 모드로 바뀌는 심리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 뿐만 아니라, 슬립 웨어는 스타일적으로도 가장 동시대적인 멋의 기준에 부합한다. 2천년대 이후로 여자들은 애쓰지 않은 듯 자연스러운 멋을 추구해 왔는데, 이를 대표하는 에포트리스 시크(Effortless Chic)와 미완성 스타일(Undone Dressing)이 슬립 웨어에서 방점을 찍은 건 어쩌면 예견된 행보나 다름없다. 슬립 웨어의 느슨한 애티튜드는 티론 르본(Tyrone Lebon), 할리 위어(Harley Weir), 조 게르트너( Zoe Ghertner), 제이미 혹스워스(Jamie Hawkseworth) 등 지금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스타급 패션 포토그래퍼들의 멜랑콜리한 비주얼 속으로 녹아들 수 있는 모던한 멋을 풍기기 때문이다. 길게 늘어진 햇빛 속에서 헝클어진 헤어와 맨 얼굴로 거리낌없이 속옷을 드러낸 청춘들이 등장하는 매혹적인 비주얼은 슬립 웨어의 무드와 일맥상통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편안한 스타일은 보기와는 달리 결코 만만하지 않은 가격대의 슈퍼-럭셔리 버전이라는 반전이 있다. 대표적으로 밀란의 FRS(FRS for Restless Sleepers)의 실크 파자마 셔츠 가격은 70만원대를 훌쩍 넘고, 셔츠와 팬츠를 세트로 구입하려면 1백만원대 이상이다. 그 이유는 모든 피스들이 이탈리아 장인이 직조한 실크로 만든 슈퍼 럭스 제품이기 때문. 베컴 부부의 파자마로 잘 알려진 올리비아 본 할레(Olivia Von Halle)도 예외는 아닌데, 1920년대 스타일의 실크 새틴 로브가 1백30만원대, 스파게티면 같은 가느다란 스트랩이 달린 실크 새틴 슬립 드레스는 50만원대로 이 역시 만만치 않다. 고가에도 불구하고 가격에 대한 저항감 없이 매출이 늘어나는 걸 보면 여자들이 슬립 웨어를 어엿한 외출복으로 인식하고 투자하기 시작했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배우 로빈 라이트(Robin Wright)와 디자이너 카렌 파울러(Karen Folwer)가 론칭한 캘리포니아 식 파자마 브랜드 푸흐 레 펨므(Pour Les Femmes), 센트럴 세인트 마틴 출신의 디자이너 알레산드라 수너 아이젠버그(Alexandra Suhner Isenberg)가 론칭한 더 슬립 셔츠(The Sleep Shirt), 베이식한 파자마에서 탈피해 정교하고 서정적인 나이트 드레스로 차별화한 스리 그레이스 런던(Three Graces London) 등 최근 2~3년 사이에 론칭한 럭스 슬립 웨어 브랜드의 숫자가 스웨트셔츠 브랜드만큼 많아진 현상이 그 인기를 방증한다. 국내에서도 로브로브(LovLov)와 웰던(We11done)의 슬립 웨어가 스타들의 ‘잇’ 아이템으로 떠오르면서 이미 대중적인 유행으로 번지기 시작했고, 이예지의 멜트(Melt)와 지일근의 일근(Ilkeunn)처럼 캐주얼한 슬립 웨어를 컨셉트로 한 디자이너 레이블도 함께 늘어나는 추세. 언뜻 스트리트 유행에 역전된 감이 있지만 런웨이 또한 그 어느 때보다 몽상가적 무드가 강세이다. 9·11 테러 14주기를 맞은 그날에 뉴욕에서 쇼를 연 리카르도 티시는 지방시에서 보낸 10주년이라는 커리어의 ‘빅’ 모멘트를 슬릭한 테일러링으로 다듬은 슬립 웨어로 장식했으며, 알렉산더 왕은 발렌시아가 하우스에서의 마지막 컬렉션을 위한 스완 송을 36벌의 슬립 룩으로 채운 ‘굿 나이트’ 인사로 대신했으니, 하이패션의 최전방까지 슬립 웨어가 장악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럭셔리한 패브릭으로 고급스러움을 더하고, 드레시한 힐과 주얼리를 매치한 디자이너들의 제안은 더할 나위 없이 현실적이다. 디자이너 앨버 엘버즈는 이런 말을 했다. “패션은 반드시 단순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이 충분히 복잡하니까요(Fashion must be simple. Because life is already too complicated).” 이토록 복잡하고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는 여유를 찾을 수 있다면 파자마를 입을 이유는 충분하다. 당장 부드러운 실크 잠옷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꿈결을 걷듯 거리를 활보하고 싶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