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피부는 남자가 구한다
한국 남성의 1인당 화장품 구입 비용이 세계 1위란다. 스킨, 로션은 물론 BB크림과 ‘닦스(닦아 쓰는 스킨)’를 구분할 줄 아는 시대. 아직도 ‘상남자’의 존심을 지키느라 쉽게 뷰티 세계에 발을 들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41세의 남자 뷰티 에디터가 전하는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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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늦지 않았다. 나중에 큰돈 들이기 전에 습관부터 당장 바꾸시길. 이미 다른 남자들은 ‘몰래’ 다 하고 있을 테니까."
2000년대, 스물예닐곱 살 때쯤부터 스킨과 로션을 ‘꼬박꼬박’ 챙겨 바르기 시작했다. 그 이전엔 달랐다. 후텁지근한 여름엔 세수한 다음 얼굴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다. 가뜩이나 습한 공기에, 화장품을 바른 얼굴이 쉽게 끈적였다. 땀을 흘리면 정성껏 바른 화장품이라도 금방 씻겨 나가니 굳이 바를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무관심해도 피부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냥 ‘내 피부의 힘’이 스스로 나를 지켜주고 있었으니까. 한데 가까운 지인의 말 한 마디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더 나이 들어 주름이 생기고, 기미 같은 것도 생기면 피부과에 가야 문제가 해결돼요.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는 건 싫으니 병원에 갈 거예요. 큰돈 들이면 해결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쉽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봐요. 지금부터 스킨, 로션만 바르면 좋은 피부를 쉽게 유지할 수 있다고요. 화장품만 꾸준히 챙겨 발라도 확실히 달라질 거예요. 내 말 믿으라니까요.”
매우 단순하게, 이런 설득에 넘어간 지 10년이 넘었다. 요즘의 내 ‘뷰티 루틴’(Beauty Routine 매일 하는 피부 관리나 습관)은 이렇다. 과로나 과음으로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정성 들여 세안한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귀찮을 정도로 힘이 들 때도 세안만은 빼먹지 않는다. 세수를 마치면 물기가 마르기 전에 서둘러 화장대(?)로 간다. 무려 화장 솜(!)에 토너(피부 결을 정돈하는 물 같은 화장품)를 묻혀 얼굴을 살살 닦아낸다. 깨끗하게 세수한 듯했지만 피지가 묻어 나오는 걸 보면 기분이 좋다. 이제 정말 깨끗해졌다 싶으니까. 촉촉하게 스킨을 바를 차례다. 비슷하게 생긴 묽은 액체지만 이번엔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피부에 영양을 공급할 준비 단계가 스킨이니까. 다음은 아이크림이다. 눈 주변을 살살 두드려 가며 바른다. 그러곤 세럼(토너나 스킨보다 조금 덜 묽은 액체형 화장품) 차례다. 수분이 필요한 계절엔 수분 강화 세럼, 기미 같은 것이 걱정될 땐 미백용 세럼, 피곤해 보이는 게 고민일 땐 노화 방지 세럼을 바른다. 두세 가지 세럼을 한꺼번에 바를 때도 있다. 다음은 크림이다. 지금까지 쏟아 부은 정성이 헛되지 않도록, 영양 성분을 잘 가둬두도록 찬찬히 챙겨 바르면 된다. 글만 읽어도 피곤함이 몰려온다는 남성들이 많을 것이다. 여성 독자라면 ‘이 남자 뭐야? 재수없게’라고 손사래를 칠 수도 있겠다. 아무튼 이 모든 과정, 세수를 하고 화장품을 바르는 데 족히 10분은 걸린다. 귀찮지 않냐고? 귀찮다. 정말 너무너무 귀찮아서 ‘내가 왜 이러나?’ 싶은 생각도 든다. 아주 가끔은 이게 귀찮아서, 일이 없는 주말 이틀 동안 집밖에 나가지 않을 때도 있다. 다시 씻고 피부 관리하는 걸 도저히 반복할 수 없어서 말이다.
이상은 자기 고백서다. ‘뷰티 에디터’라는 직업상 새로 나온 각종 화장품도 써봐야 하니 이런 작업을 귀찮아도 열심히 하는 나는, 41세 남성이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남들 보기에 지나치다 싶은 면이 있을 정도로 피부 관리에 공을 들인다. 인정한다. 별나다. ‘이상한 남자’다. 인정한다. 한데 한 가지 위안은 이제 ‘동지’들이 하나 둘씩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객관적 지표로 확인할 수 있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지난해 5월 ‘한국 남성이 스킨, 로션 등 화장품 구입에 쓰는 돈이 1인당 세계 1위’라고 전했다. 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가 2013년 조사한 결과를 인용했다. 2위인 덴마크의 3배가 넘는 금액을 쓴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 남성만 유별난 것 아니냐고? 그렇지도 않다.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남성 화장품 소비자의 65%는 아시아 남성이다. 2013년 한 해 동안 여성 화장품 산업은 4.8% 성장했다. 같은 기간 남성 화장품 시장은 9.4%나 늘었다. 성장 속도가 가파르다. ‘화장품=여성의 것, 여성적인 것’이란 통념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얘기다. 논리를 조금 비약하면, 당신의 친구인 누군가는 “야, 너 화장했냐?”며 당신을 놀리지만 실은 자신이 훨씬 더 얼굴 가꾸는 데 공을 들이는 남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뉴욕 타임스>는 그 배경을 이렇게 진단했다. “한국은 아시아에서도 유교 문화의 영향력이 강한 나라다. 남자가 꾸미는 것을 터부로 여겨온 문화적 전통이 있다. 아시아에서 한국 사회가 가장 보수적이다. 그런데도 한국 남성들이 화장품 구입에 쓰는 돈이 세계 1위라는 건 대단히 모순적인 모습이다. (중략) ‘외모=경쟁력’이란 주장이 한국 사회에서 ‘화장=남자답지 못한 것’이란 통념 따위는 별것 아닌 주장으로 만들어버렸다.” 타자(他者)의 분석이 때론 우리를 훨씬 더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만든다. 전업주부인 한 중년 여성의 고백은 이렇다. “생전 피부 관리라곤 관심도 없던 남편이 ‘제일 좋은 노화 방지 화장품’을 사달라는 거예요. 주말 골프를 치러 갈 땐, 자외선차단제를 나보다 훨씬 더 자주 덧발라서 남 보기 창피할 때도 있어요.” 이 여성의 남편은 50대 초반의 대기업 임원이다.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고 해요. 과한 음주를 곁들인 회식을 한 다음 날, 피부가 생기 있어 보이는 부하 직원과 칙칙하게 피곤에 절어 있는 것 같은 후배를 번갈아 보곤 정신이 번쩍 들더래요. ‘나의 상사도 마찬가지 생각을 하겠구나. 능력이 고만고만하면, 더 생생해 보이는 사람이 매력적이겠구나’라고요.” 청년이든 중년이든 가릴 것 없이 남성의 생존 공식에도 피부 관리가 필수 항목이 된 시대다.
여기까지 읽고도 피부 관리에 신경 쓰지 않겠다면, 당신은 정말 ‘상남자’다. ‘남자답지 못하게 화장을!’(실은 그냥 ‘화장품을 바르는 것일 뿐’인데도)이라는 상남자의 저항에 화장품 업체도 고민이 많다. 이들을 투항하게 만들어야 미래 시장을 개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오페 맨 에어쿠션’은 여성용 팩트, 파운데이션처럼 손거울 달린 용기에 든 자외선차단제다. 칙칙한 피부 톤을 보정해 주는 기능도 있으니 일종의 BB크림 팩트라고 보면 된다. 쿠션 패드에 화장품을 ‘찍어 바르는’ 형태다. 이런 색다른 사용 방법, ‘상남자’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모양새다. 업체에선 상품기획 단계에서 난상토론을 거쳤다 한다. “짜서 바르는 BB크림까지야 저항감이 덜하지만 손거울 달린 화장품을 쓸 남자가 얼마나 될까”라는 심각한 고민 끝에 제품을 출시했다. 지난해 2월에 출시된 이 상품은 해를 거듭하며 순항 중이다. 손거울 달린 남성용 화장품이 팔리는 곳, 한국이다. 급기야 최근 ‘어른이’가 사족을 못쓰는 영웅 캐릭터가 들어 있는 남성 화장품도 출시됐다. ‘라네즈옴므 어벤져스 스페셜 에디션’이다. ‘이래도 안 살래?’라는 마케팅쯤으로 평가절하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편으론 세계 최고의 소비를 자랑하는 한국 남성 화장품 소비자에 대한 우대 마케팅으로도 읽힌다. 키티 캐릭터를 쓴 여성 화장품을 더 선호하는 여성 소비자가 있다면 어벤져스의 영웅들을 갖고 싶어 하는 남성 화장품 소비자도 있다는 진취적인 전제가 이를 가능케 했으니 말이다.
이래도 끝까지 투항을 거부하고 ‘화장 안 하는 상남자’ ‘마지막 포로’로 남겠다는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건네줄 한 마디. 스킨, 로션, BB크림(자외선차단제) 정도로 상남자의 자존심을 꺾을 순 없다고? 아니다. 한국 화장품 시장엔 이미 남성용 눈 화장품(눈썹용 젤 마스카라와 눈썹용 펜슬)과 기름기를 잡아주는 파우더, 피부 톤을 화사하게 해 주는 남성용 프라이머까지 나와 있다. 4월 초 한국에 출시된 ‘톰 포드 뷰티’의 남성 라인 ‘톰 포드 포 맨’은 한 발 더 나아갔다. 잡티를 가려주는 컨실러는 기본이다. 진하게 바르면 태닝한 효과를 내고, 얇게 바르면 BB크림처럼 잡티를 감춰주는 ‘브론징 젤’이 발매와 동시에 인기 상품으로 떠올랐다. ‘여성들이 훔쳐 쓰는 남성 화장품’으로 입소문이 번지는 중이란다. 이쯤 되면 상남자의 마지막 저항이 무기력한 시도라는 걸 눈치채시길 바란다. 요즘 남자들은 예뻐지려고 화장하는 게 아니라 멋있어 보이려고 화장한다. 팩트를 들어 화장품을 얼굴에 찍어 바르고, 화장 솜에 스킨을 묻혀 얼굴을 살살 문지르는 것, 그것은 결코 당신을 여성으로 변화시키려는 음모가 아니다. 그저 멋진 남자로 변신케 하는 과정일 뿐이다.
10여 년 전 스킨과 로션을 가볍게 무시하던 나도 한때는 ‘상남자’였다. 그것도 정말 무. 모. 한. 상남자 말이다.
Credit
- editor 김미구 writer 강승민(중앙일보 스타일 콘텐트 팀장) photo getty images
- 멀티비츠 design 최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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