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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이 즐긴 10년의 고독

지성은 10년 전, 10년 후를 바라봤다. 그때쯤 존재감 있는 배우로서 시작할 수 있길 바랐다. 좋은 것만 고르려는 선택을 지양했고, 좋지 않은 결과를 예상하며 시작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가 계획한 10년 후 <킬미, 힐미>를 만난 지성은 드디어 스타트라인에 섰다.

BYELLE2015.05.22



그레이 셔츠는 Zadig & Voltaire. 누워 있는 브라운 인형(110cm)은 Line Friends.

“내 생각을 정리하는 거야 어떤 계기가 되어 돌아볼 순 있겠지만 평상시에 뜬금없이 돌아보긴 힘들잖아요. 그래서 안 해본 행동이라든지 시도 등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게 돼요. 그럴 때 느껴지는 것들을 머릿속에 체크하면서요. 어떻게 보면 <킬미, 힐미>도 그런 작품이었어요.” 배우 17년 차, 마흔(빠른 77년생), 6월이면 아빠가 될 지성은 얼마 전 종영한 <킬미, 힐미>로 배우의 인상을 뒤바꿨다. 그래서 그 드라마가 어쨌길래, 라는 얘기는 이미 숱한 인터뷰를 통해 친절하게 밝혀진 바 <엘르>는 문득 그의 과거가,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그리하여 마주앉은 그에게 온통 질문과 빈칸으로 이루어진 샤론 존스의 <쓰고 태워라>는 책을 건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한정된 인터뷰 시간 중 첫 장 ‘진실’ 챕터에 쓰여진 ‘예술가는 거짓말을 통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중략) ‘진실’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질문에 답하기 바랍니다.’라는 두 문장에 무려 30분을 소비한 것이다. 그 사이 “네가 연기자로 성공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거나 “쟤는 뭔가 2%가 부족해”라는 얘길 들으면서도 스스로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았던 그의 끈기. “딱 보니까 40대 때도 내가 최고가 될 순 없을 것 같으니 40대부터 쌓아나가서 누가 더 길게 가는지 보자, 그랬어요. 그때가 되면 제대로 시작할 수 있겠다 싶었거든요”라는 현실적 목표의 지점을 알게 됐다(더 자세한 ‘진실’에 관한 지성의 워밍업 인터뷰는 5월 15일 또 다른 화보 이미지와 함께 elle.co.kr에서만 공개될 예정이다). 촉박한 시간 안에 더 많은 답을 듣기 위해, 그를 더 잘 알고 싶어서 에디터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이 이야기는 에디터가 메모해 놓은 책 속 가이드를 따라 그가 스스로 읽고 대답한 자발적 인터뷰다. 인터스텔라식으로 그의 인생 조각을 맞추는 인터뷰 플레이 시작!









팔꿈치의 레드 포인트가 포인트인 블랙 니트 티셔츠는 Marni by Boon the Shop. 블랙 팬츠는 All Saints. 블랙 슈즈는 Dior Homme.





그레이 수트는 Dior Homme. 메탈 밴드의 포르토피노 크로노그래프는 IWC. 실버 브레이슬렛은 Golden dew.


내가 아이였을 때 되고 싶었던 것 야구선수. 류현진 선수 같은 톱 스타들을 보면 ‘내가 야구했으면 저 정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대리만족의 상상을 하곤 해요. 야구공에 대한 애착이 커서 언젠가 어떤 캐릭터를 할 때 야구공을 툭툭 던지고 받으면서 연기를 하고 싶어요. 예전 <로얄 패밀리> 때 한번 시도해 보려고 했는데 톰 크루즈가 <야망의 함정>에서 먼저 써먹었더라고요.

내가 크면서 방안에 붙였던 포스터들 영화 <대부>, <흐르는 강물처럼>, <레인맨> 포스터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야구를 못하게 하셔서 차선책으로 배우를 선택했어요. ‘1년만 있으면 자유로울 수 있으니 그때 내 꿈을 이뤄내리라’ 그랬어요. 심지어 대학 시험 볼 때 아버지한테는 정치외교학과, 경영학과 간다고 그러고 계속 연극영화과 시험을 봤거든요. 그런 내 마음을 몰라주고 다 떨어뜨리더라고요. 늦어졌지만 그래도 결국 합격했죠.

첫 차 차에 애착이 없어요.

첫 공연 <햄릿>. 햄릿 역은 아니고 기획, 프로듀싱까지 전 과정에 다 참여했죠.

당신이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했었던 마지막 때는 언제입니까 오늘 처음 한 것도 있어요. 화단에서 죽은 나무를 뽑아냈는데 은근 무섭더라고요. 얘가 안 죽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 살리려고 해봤는데 전혀 반응을 안 보였어요.

어른이 된 나이 결혼이겠네요, 결혼. 전 와이프를 통해서 저를 봐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바꾸고 싶은 것 많은데. 지난 17년간 배우로 활동해 오면서 힘든 일이 많았어요. 덕분에 지금의 단단한 내가 되지 않았나 싶긴 한데 지금 쌓인 연기력 그대로 과거로 돌아가서 데뷔하고 싶어요. ‘처음인데 이 정도야?’ ‘너 뭐 해 봤어?’ ‘다음 작품 주인공 해!’ 이런 얘기들을 한번 들어보고 싶어요(웃음).

어릴 때 수집했던 것들 없어요. 전 물건에 대한 애착보단 꿈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것 같아요. 뭘 했으면 싹 비워야 돼요. 어느 시점이 됐을 때 읽은 책들은 다 치워버리고 새로 읽을 책을 머릿속에 넣고 싶어요. 비우는 작업을 잘해요. 전 안 좋은 기억들을 지우는 지우개도 갖고 있어요(웃음). 그래서 스트레스를 좀 덜 받아요. 한때 너무 아파서 생긴 습관인 것 같긴 하지만요.

내가 중독된 것들 연기, 야구,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거라면 다. 해 뜨기 전에 조깅하는 걸 좋아해요. 몸에서 열이 나고 땀이 배출되는 기분이 끝내주거든요. 아침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요. <킬미, 힐미> 촬영할 때 감독님께 “첫 신 말고 두세 번째 신부터 들어가면 안 돼요? 좀 뛰고 오게요” 그랬을 정도였고, 전작인 <비밀> 할 땐 2시간 잘 수 있는 시간이 생기면 그 2시간을 뛰는 데 썼어요. 러닝은 생각을 좀 더 맑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것 같아요. 페이스를 잃지 않게 도와주기도 하고요. 오바마 대통령이 매일 아침 8km씩 뛴대요. 그에 관한 에세이를 읽으면서 나랑 비슷하네 그랬는데, 작년에 오바마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제가 다니는 짐이 있는 호텔에 묵었어요. 설마 했는데 다음 날 아침 운동하고 있는데 그가 나타난 거예요. ‘굿모닝’ 인사를 건네면서요. 주위 의식하는 일 없이 엄청 열심히 운동하더라고요.

내 인생의 갈림길에서 했던 가장 극적인 선택 배우로 살아가기로 한 거요. 한 번도 ‘하지 말까?’ ‘안 되나?’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혼날 때조차 난 된다고 생각했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다섯 가지 순간 여기 써놓은 대로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다섯 작품으로 할까요? 과거형이니까 <킬미, 힐미>는 뺄게요. 첫 작품은 <뉴 하트>, 군대 제대하고 컴백한 드라마이기도 했고 다른 의미도 있고요.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올인> <카이스트>를 뺄 순 없을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한 칸이 남았는데 <맛있는 청혼>이나 <왕의 여자> 중에서 선택하고 싶어요. 음, <왕의 여자>를 꼽을게요. 저의 첫 사극 도전작이었거든요. 사실 배우로서 10년 후를 계획하게 된 계기는 <올인>이었어요. 이병헌 선배 덕분이었지만 시청률이 50% 이상 나온 작품이라 저에게도 현대극 캐스팅이 정말 많이 들어왔어요. 주연으로 거듭날 만한 역할들이었죠. 근데 저는 제가 연기 못하는 걸 알고 있었어요. 연기 공부를 위해 선택한 작품이 <왕의 여자>예요. 돌아가신 김재형 국장님께 배우고 싶었어요. 사극을 통해서 새로운 자신감도 얻고 싶었고요.

내가 죄책감을 느끼는 것 혹시나 누군가 나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면… 미안합니다.

톱 3 영화 <레인맨> <대부> 그리고 브래드 피트랑 에드워드 노턴 나오는 영화…. 아 <파이트 클럽>이요. 제가 갖지 못한 면을 많이 보여준 작품이라 달달 외우듯이 봤어요.

16세 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어느 정도로 멋지다고 생각할까 잘했다,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

지난 12개월 동안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만큼 성취했던 세 가지 <킬미, 힐미> 한 거. 그리고 주방에 들어가기 시작한 거요. 안 해본 걸 하는 게 어디 쉽나요. 그래도 전 남편과 아내가 공평해야 된다고 봐요. 그래야 좋은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인생의 밸런스도 깨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연기도 똑같아요. 상대 배우와 공평해야 해요. 그래서 반칙 쓰는 연기자는 별로예요. 혹 누군가 그러면 촬영을 중단하고 물어봐요. 왜 그러냐고. 그렇게 푼 적이 있어요.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 군대. 그 전까진 뭣 모르고 꿈을 향해 달려갔던 것 같고 꿈 자체가 너무 버거웠고 마음이 급했어요. 아, 그리고 군대 가기 전까지 책상 정리를 해 본 적이 없어요. 근 4년 동안 쌓아놓은 그 책상을 군대 가기 전날 새벽에 치웠어요. 비우고 정리하는 쾌감을 그때 처음 깨달았던 것 같아요.

내가 지금 쫓기는 것 좋은 아빠가 되어야 하는데 이게 쉬운 게 아닌 것 같아요. 책을 봐도 모르겠어요. 6월 말이 아내의 출산 예정일이라 조심해야 되는 부분들도 있고, 집중해야 하는 시기에요. (혹시 아내가 임신했을 때 메스껍다거나 아내와 비슷한 증상을 겪진 않았나요) 저는 와이프랑 똑같이 배가 나왔었어요(웃음). 제가 잘 때 좀 둔한 편이라 요즘엔 일부러 선잠을 자려고 노력해요. 12시에 잠들면 보통 6시에 일어나는데 아내가 다리에 쥐가 많이 나서 한 2시 반쯤 한 번, 4시 반쯤 한 번 알람을 맞춰 놓고 자요. (주물러 주려고요?) 네. 이건 쓰지 마세요(미안합니다, 대한민국 남자들의 발전을 위해 안 쓸 수가 없어서요). 그럴 때 제가 행복해요. 중요한 건 와이프가 그만큼 저한테 한다는 거예요. 서로 주고받는 거죠.

지금까지 내가 배워온 것들 집중. 뭘 얘기하는지, 무엇에 집중해야 되는지는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10년이 지나도 똑같은 대답인 것들을 배워왔어요.

여기서부터는 ‘현재’에 대한 질문이에요. ‘이를 답하기 위해서 당신은 현재의 순간 밖으로 걸어 나가 회상의 공간으로 가야 합니다. 현재를 정확히 보기 위해서는 현재의 밖에 있어야 합니다’ 맞는 말 같아요. 그래야겠네요.

내가 내려 놓아야 하는 것들 고집. 예를 들면, 6시에 무조건 조깅해야 한다는 고집이요. 그래서 요즘엔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 땐 굳이 나가지 않으려고 해요. ‘오늘은 그동안 안 먹어본 걸 먹어볼까’ ‘오늘은 안 해 본 일을 해볼까’ 얽매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기도 해요.

오늘 내가 배운 것 자신을 저평가하는 건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좋은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바로 지금 나를 화나게 하는 세 가지 없어요. 조금 다른 얘긴데 저는 항상 상대방 옆에 카메라가 있다고 생각해요. 처음 연기를 가르쳐 주신 분의 조언이었어요. 그 얘길 들었을 땐 “그럼 평상시에도 연기를 하란 말씀이신가요?”라고 물었어요. 그렇게라도 해야 된다고 하시더군요. 나로부터 벗어나서 나를 보라는 뜻이었을 거예요. 그래야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몰래 부러워하는 것 몇 가지가 무작위적으로 떠오르네요. 우선 키. 요즘 어린 배우들은 정말 너무 큰 거예요. <킬미, 힐미> 할 때 (박)서준이를 이렇게 올려 봐야 했어요. “서준아 너 너무 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냐?” 그러면 낮춰주곤 했어요. 신발에 ‘그걸’ 몇 개 넣어서 신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죠(웃음). 그리고 <올인> 할 때 감독님이 이병헌 선배와 절친한 관계였어요. <아스팔트 사나이>에서 조감독과 배우로 만난 사이였고, <올인>에서 다시 만나 기막힌 호흡을 만들어내는 걸 옆에서 지켜봤거든요. 나도 배우 생활하면서 저런 파트너와 쾌감이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10년 전 <떨리는 가슴>에서 호흡을 맞췄던 김진만 감독님과 이번 <킬미, 힐미>에서 만났어요. 꼭 다시 만나자 했던 게 10년이 지날 줄 몰랐죠. 과거에 제가 부러워했던 게 제게도 생겼으니 이제 몰래 부러워하는 건 아니네요. 되게 행복했어요. 결과를 떠나서 우리끼리.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다면 가고 싶은 곳 파리. 센 강에서 조깅해 보세요. 해 뜰 때 즈음 노트르담 성당이나 에펠탑 앞을 뛰면 기분 정말 좋더라고요. 뛸 때 비로소 그 도시가 왜 아름다운지 알 수 있어요.

만일 내가 특정 나이에서 늙지 않는다면 그 나이는 50세. 태어날 아이도 있을 거고, 부모로서 건강하고 힘이 있을 때일 것 같아서요.

내가 나의 이름을 바꾼다면 그 이름은 전 이미 바꿨잖아요. 곽태근에서 지성으로. 정말 마음에 들어요. 곽태근이란 이름도 좋은데 사주를 한 번 봤더니 나무와 불이 강하고 흙이 부족하다고 나오더라고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이름을 지어주겠대요. ‘땅 지’ 자를 써서 지성이 됐어요. 근데 중국에선 ‘땅 지’ 자를 쓰면 안 된대요 물건 이름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사람을 세뇌할 수 있는 기계를 갖고 있다면 어디에 쓸 것인가 그런 거 필요 없어요.

내가 직접 만들어본 가장 훌륭한 세 가지 음식 만들어본 게 몇 가지 없어요. 생일날 미역국 끊인 거랑 크림 소스 스파게티, 그리고 뭐지…. 아, 걸쭉한 콩비지 찌개요.

여기서부턴 미래. ‘당신의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가져야 합니다’. 한 가지만 할까요. 나를 가장 흥분시키는 한 가지 이번에 <킬미, 힐미> 하면서 느낀 건 나의 존재감. 내가 배우로 살고 있구나, 싶어서 엄청 흥분됐어요. (마지막 책날개를 읽어주세요) ‘<쓰고 태워라>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이 사회의 유행을 따르지 않고 당신에게 아무것도 공유하지 말 것을 정중하게 요청합니다’. 아, 속았네요. 그래요(웃음). 그래도 저에 대해 떠올릴 수 있어서 재미있었어요.

사실 인터뷰 질문지의 다른 버전을 준비했는데 그 중 ‘독일의 한 극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여자는 깊게 보고 남자는 멀리 본다. 혹시 당신은 얼마만큼 멀리 보는 남자였고, 지금은 어떤가’라는 질문이 있었어요. 10년을 바라보고 온 지성 씨는 그럼 이제 다시 시작인가요 ‘다시’는 아니에요.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그럴 수 있는 시점이 됐다는 게 큰 용기를 줘요.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느냐가 되게 중요하다는 걸 다시금 배웠어요. <킬미, 힐미> 정도면 반응이 좋았던 거니까 뭔가 점수를 얻고 시작하는 느낌이 들어요. 앞으로의 40대가 기대가 되는 이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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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editor 채은미
  • photo 김영준
  • stylist 윤슬기(INTREND)
  • HAIR 현진(정샘물 인스피레이션)
  • MAKE-UP 은경(정샘물 인스피레이션)
  • design 최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