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그린 마음
소장하고 싶은 한국 작가의 그림책이 늘고 있다. 목록의 첫째 줄에 적어둔 작가의 이름은 정유미다. 연필을 들고 거울 속의 자신을 오랫동안 찬찬히 들여다본 그 마음을 조심스레 펼쳐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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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먼지아이>의 애니메이션 스틸, 2009.
3 <연애놀이> 2013.
 
 
 
 
 
 

 
우리 그림책 작가들의 활약이 대단하다. 한국 그림책들이 제52회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이 주관하는 ‘라가치 상’ 4개 전 부문에서 입상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이름은 픽션 부문 우수상에 선정된 <나의 작은 인형 상자>의 정유미 작가. 지난해 <먼지아이>로 한국 그림 작가로는 최초로 라가치 상 대상(뉴 호라이즌 부문)을 수상한 데 이어 2년 연속 수상이다. “지난해에는 정말 놀랐어요. 판권을 사 간 스페인 출판사에서 예고 없이 출품했는데 덜컥 대상을 받아서. 아동 도서를 대상으로 하는 상이기 때문에 제 작품은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거든요. 올해는 직접 출품했는데 좋은 결과를 얻어 기뻐요. 한편으론 그림책 작업을 쭉 해온 입장이 아니라 조금 얼떨떨하기도 하고요.”
 
단정한 첫인상 너머로 끈질기게 창작을 이어온 작가의 내공이 느껴지는 정유미. 그녀는 그림책 작가이기 전에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경력을 쌓았다. 관련 수상 기록은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다. <나의 작은 인형 상자>는 미장센단편영화제 최우수상을, <먼지아이>는 뉴욕 햄튼 국제영화제 최우수 단편영화상, 크로아티아 타보 국제영화제 그랑프리와 최우수 애니메이션 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연애놀이>는 베를린 국제영화제 단편 경쟁부문에 초청받았고, 세계 4대 애니메이션 영화제 중 하나인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국제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박찬욱 감독은 미장센 단편영화제 심사에서 접한 <먼지아이>를 ‘보석 같은 작품’이라 평하며 영화 <박쥐> DVD에 특별 부록으로 수록한 바 있다.
 
애니메이션을 본업으로 삼았던 그녀가 처음 펴낸 책은 2005년 그림 일기를 묶어서 낸 <파라노이드 키드>다. “그림책은 꾸준히 관심 갖고 있던 분야라 출판사의 제안을 받고 바로 수락했어요. 라가치 상을 수상한 <먼지아이>와 <나의 작은 인형 상자>는 둘 다 완성된 애니메이션 영화를 그림책으로 옮겼어요. 전자는 영화의 전 장면을 캡처받은 후 편집하는 방식이었고, 후자는 영화의 스토리를 각색해서 새로 그림 작업을 했어요. 사실 제 책들은 아동을 대상으로 하지도 않고, 누구나 좋아할 만한 스타일도 아니에요. 주최 측에서 실험적인 선택을 했다고 생각해요. 보통 그림책들은 호흡이 짧은 편인데, 영화를 기반으로 오랜 기간 작업했기 때문에 밀도 높은 이야기 전달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국내 정식 출간을 앞둔 <나의 작은 인형 상자>는 작가의 어릴 적 기억을 모티프로 탄생했다. 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친구들이 보여 달라고 몰려들자 상자를 닫아버린 기억을 ‘대인관계가 서툴다고 느끼는’ 자신의 모습과 엮어서 만들어낸 이야기. 상자를 걸어 나오는 인형을 통해 불안과 두려움을 마주하며 한 걸음 성장하는 자아의 여정을 그렸다. 이렇듯 그녀의 작품 속 화자는 늘 여자이며, 작가 본인이 몰두하는 고민과 질문을 소재로 삼고 있다.
 
“내면적인 연결 고리 없이는 작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요. 다행히 비슷한 연령대의 여자들이 많이 공감하고 좋아해 주더라고요.” 이야기의 흐름만큼 특별한 건 그녀만의 그림체다. 오랜 시간 정성을 기울여 연필로 세밀하게 표현한 흑백 드로잉은 조용하면서도 강렬한 흡인력을 지녔다. “처음에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한 일종의 선택이었죠. 색보다 이야기나 움직임에 집중하겠다는. 그런데 연필 드로잉을 할수록 세밀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이런 점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제 그림 스타일로 자리 잡았지요. 애니메이션은 계속 흑백을 고수하려는데, 그림책은 컬러를 사용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중국 메르디앙 출판사의 제안으로 우리 전래 동화 <호랑이와 곶감>을 그림책으로 만들면서 컬러 작업을 해봤는데 재미있더라고요.”
 
언어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눈과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는 정유미의 작업물은 세계로 퍼져가고 있다. 애니메이션 전 작품이 유럽 공영 예술 채널 아르떼(Arte)에 판매됐고, 책들은 영어와 스페인어로 번역돼 미국과 유럽, 남미에서 출간되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은 모리스 샌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예요. 앞으로 책을 만드는 데 있어서 원형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한국의 그림책은 아직 알아가는 중인데, 좋은 작가들이 정말 많아요. 저처럼 애니메이션 작업 경력이 있는 분들도 적지 않더라고요. 다양하고 수준 높은 작품에 감탄하게 돼요.”
 
정유미 작가는 올해 7월 애니메이션 <연애놀이>를 옮긴 또 다른 그림책을 선보일 예정이고, <목욕하는 여자들>이란 신작 애니메이션도 마무리하고 있다. 일단은 3월 30일 볼로냐에서 열리는 라가치 상 시상식에 참가한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이다.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조용한 도시예요. 이곳에 세계 각지의 출판사들이 만든 책들이 모여들죠. 그중에는 독특한 취향의 작은 출판사들도 있어요. 좋은 책들을 많이 접하고 제 작품에 관심 갖는 이들도 만나고 돌아오려고요. 사람들이 간혹 궁금해하는데, 라가치 상은 상금이 없어요(웃음). 하지만 상금 이상의 홍보 효과가 있다고 해요.”
 
 
 
 
 
korean picture books
해외에서 먼저 알아본 한국의 그림책들. 
 
 

 
<나의 작은 인형 상자> 정유미
2015년 볼로냐 라가치 상 픽션 부문 우수상. 작가가 2006년 선보인 첫 애니메이션 작품을 그림책으로 재탄생시켰다. 소녀의 성장 이야기를 ‘인형 놀이’를 통해 상징적으로 풀어냈다. 컬쳐플랫폼.
 
 
 
 
 
 
 

 
<달려, 토토> 조은영
세계 3대 그림책 상으로 꼽히는 브라티슬라바 일러스트레이션 비엔날레 2011년 그랑프리.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경마장의 풍경과 군상을 사실적으로 담았다. 경주마들의 역동적인 묘사가 일품이다. 보림.
 
 
 
 
 
 
 

 
<거짓말 같은 이야기> 강경수2011년 볼로냐 라가치 상 논픽션 부문 우수상. 세계 곳곳에서 고통받는 아이들의 현실을 짧은 글과 간결한 그림으로 담아낸 인권 그림책. 묵직한 주제를 가볍지도, 어렵지도 않게 풀어낸 수작이다. 시공주니어.
 
 
 
 
 
 
 

 
<어느 날> 유주연
2011년 브라티슬라바 일러스트레이션 비엔날레 황금사자상. 고층 빌딩으로 가득한 도시를 탐험하는 작은 새의 이야기. 전통 수묵화 기법을 활용한 자유분방한 붓 놀림과 다채로운 먹의 농담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보림.
 
 
 
 
 
 
 

 
<파도야 놀자> 이수지2008년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우수 그림책.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작가 이수지의 작품으로, 제한된 색채만으로 생동감 넘치는 그림을 완성했다. 파도 치는 소리와 소녀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비룡소.
 
 
 
 
 
 
 

 
<눈>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2013년 볼로냐 라가치 상 픽션 부문 대상. 한국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지닌 폴란드인 작가가 국내에서 첫 출간한 그림책. ‘본다’는 것에 대한 의미와 깨달음을 시적인 글과 서정적인 그림으로 담아냈다. 창비. 
 
 
 
 
Credit
- editor 김아름 photo 정지은
- 이수현(책) stylist 정진아 hair&make-up 김지혜 design 하주희
엘르 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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