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캘리포니아에서 온 쿨한 신발, 반스_요주의 물건 #35

캘리포니아의 작열하는 태양이 떠오르는 신발. ‘(G)린다’ 언니가 장보러 갈 때 신을 것 같은 신발.

프로필 by 양윤경 2020.06.10
지난해 12월, <요주의 물건> 페이지에 ‘여든이 되어도 컨버스를 신을 테야!’라는 야심 차고 다소 무모한 제목의 글을 쓴 뒤로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길에서 고령의 여인을 만나면 그의 신발을 먼저 관찰하게 된 것이다(아, 글의 힘이란!). 그리고 알게 됐다. 고령의 여인들은 ‘건강 신발’이라는 요상한 합성어로 통칭하는 정말이지 안 예쁜 신발을 신는다!
최근 에세이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와 소설집 <나의 할머니에게>를 읽으며, 나의 노년을 잠깐 상상해 봤다. 나는 어떤 할머니가 될까. 그때의 나도 저들처럼 반쯤 투명해질까? 분명히 거기에 있지만 누구도 응시하지 않는 존재로. 나도 저렇게 짧고 꼬불거리는 헤어스타일을 하고 저렇게 안 예쁜 신발을 신게 될까? 나는 더 절망하지 않기 위해 한 남자의 사진을 찾아보기로 했다. 57년에 태어난 60대 남자. 그의 이름은 토니 알바(Tony Alva)다.
1977년 5월, 스무 살의 토니 알바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있다. @게티 이미지2006년 1월, 반스 올드스쿨을 신은 49세의 토니 알바. @게티 이미지2019년 5월, 62세의 토니 알바가 한 페스티벌에서 공연하고 있다. @게티 이미지
 
60대에도 20대에 신던 신발을 신는 할아버지, 토니 알바는 전설적인 스케이트 보더다. 그는 1976년, 동료인 스테이시 페랄타(Stacy Peralta)와 함께 신발 디자인을 하기도 했다. 기존에 있던 신발에 약간의 변형(스케이트 보더들에게 꼭 필요한 디테일)을 준 것이었다. 발목을 지지하는 쿠션을 더하고 이전보다 더 견고한 캔버스/스웨이드 소재로 만드는 식이었는데, 이 신발은 스케이트 보더뿐만 아니라 서퍼, 뮤지션, 아티스트 등 수많은 이들에게 큰 사랑을 받게 된다. ‘#95’라는 스타일명으로 알려진 이 신발은 반스 에라(era)였다.

@반스 제공

@반스 제공

 
토니 알바가 디자인한 반스 에라의 원형은 ‘#44’이라는 스타일명을 가진 어센틱(Authentic)이다. 어센틱은 1966년, 브랜드 반스의 탄생과 함께 처음 선보인 모델. 튼튼한 캔버스 소재로 만들고 바닥에는 와플 모양의 고무 아웃솔을 더한 이 신발은 사실 갑판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반스가 탄생한 시기는 파도가 없는 날 할 일을 찾던 서퍼들이 보드에 바퀴를 달아 스케이트보드를 타기 시작한 시기와도 맞물린다. 맨발로 보드를 타던 이들은 곧 미끄러지지 않는 튼튼한 신발을 찾게 되었고, 반스 어센틱은 그 요구에 부합하는 신발이었다.

@반스 제공

@반스 제공

 
1970-80년대, 미국 서부의 서퍼와 스케이트 보더들에게 특히 인기를 끌던 반스가 세계적인 브랜드의 반열에 오른 건 숀 펜의 영향이 크다. 1982년에 개봉한 영화 <리치몬드 연애 소동>에서 숀 펜은 서핑과 스케이트보드, 파티를 즐기는 문제아(그러나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제프 스피콜리 역을 맡았다. 이십 대 초반의 숀 펜은 이 영화로 유명 배우가 되었고, 그가 신은 반스 체커보드 슬립온(그가 매장에서 직접 고른 신발을 가져와 감독에게 제안했다고)도 스타가 되었다. 체커보드 슬립온은 나 역시 매우 사랑하는 신발. 그러나 반스가 등장하는 영화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은 따로 있다. 바로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1999년 영화 <노팅힐>이다. 유명한 배우 역할을 맡은 줄리아 로버츠가 가죽 재킷을 걸치고 올드스쿨을 신고 나왔을 때, 그 자연스러운 룩은 나를 포함한 여성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1982년 영화 <리치몬드 연애 소동>. 숀 펜과 체커보드 슬립온. @imdb.com1999년 영화 <노팅힐>에서 올드스쿨을 신은 줄리아 로버츠. @imdb.com반스 올드스쿨을 신은 벨라 하디드. @게티 이미지반스 올드스쿨을 신은 벨라 헤일리 비버. @게티 이미지
 
“할머니들이야말로 세상에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키키 키린이 남긴 이 문장을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작가 존 디디온과 뮤지션 조니 미첼, 모델 베네데타 바르치니와 카르멘 델로피체, 그리고 스타일 아이콘 아이리스 아펠(무려 21년생이다!)까지, 수많은 시니어가 패션 월드에서 활약하는 걸 보면서도 바다 건너 먼 나라 이야기로 여겼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라고 외치는 할머니 유튜버가 130만 명의 구독자를 거느리는 시대인데도 ‘나이’에 관한 선입견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다가 얼마 전, <삼시세끼 어촌편 5>를 보다가 차승원과 공효진의 신발을 보고 무릎을 쳤다. 50대 차승원은(굳이 나이를 언급해서 미안합니다) 반스의 레드 컬러 슬립온 프로를 신고 있었고, 40대인 공효진은(역시 미안합니다) 반스의 레드 컬러 올드스쿨을 신고 있었다. 두 켤레의 새빨간 반스를 보며 어쩌면 나의 바람은 허황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이는 별거 아니라는, 나이에 따라 아이템이 정해진 건 아닐 거라는 생각. 글을 시작하며 언급했던 책의 제목처럼, 나 역시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 원색의 반스를 신고서 동네를 사뿐사뿐 걸어 다니는 그런 할머니.
 
 
*트렌드를 뛰어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를 지닌 물건 뒤에 숨은 흥미로운 이야기, 김자혜 작가의 ‘요주의 물건’은 매주 수요일에 찾아갑니다.
 

'요주의 물건' 더 보기

Cred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