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갑의 연애, 을의 연애

사랑에 어떻게 ‘갑을 관계’가 있냐고? 답답한 소리! 한 사무실에서 나란히 앉은 두 에디터, 갑과 을의 연애사는 이렇게 가깝고도 멀다.

프로필 by ELLE 2013.12.13

 

 

 A 자기를 사랑하지만 내가 더 소중해


친구들이 말했다. “너는 좋겠다. 항상 갑이라서.” 후배들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선배처럼 갑일 수 있어요?” 일찍이 로맨스 소설과 주부지를 탐독하고 온갖 TV 드라마를 섭렵하며 깨달았다. 테리우스보다는 안소니, 왕자님보다 집사를 선택하는 게 행복의 현실적인 해답이란 걸. 그리하여 자연스레 갑이라 불리는 연애를 해왔다. 나한테 먼저 관심을 표하는 남자들만 나도 관심을 가졌고, 나이에서 일단 밀리는 ‘오빠’보다 동갑내기나 연하들과의 만남을 선호했다. 메뉴를 정할 때면 그의 입맛보다 ‘내 기분’이 더 중요했고 ‘사랑한다’는 인사보다 ‘나도’라는 답을 더 자주 했다. ‘갑의 횡포’는 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과거 한 남자는 내 앞에서 울었고 한 남자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마침내 ‘반영구적인’ 갑의 입장이 보장되는 남자를 선택해 결혼했다.

 

바로 내가 자신의 수지, 아니 ‘첫사랑’이라고 말하는 남자. 연애라는 ‘멘탈 게임’에서 결국 더 사랑하는 쪽이 약자라는 것 그리고 ‘남자는 잡은 물고기에 먹이 안 준다’는 불멸의 진리가 ‘여자가 갑’이어야 하는 이유를 뒷받침한다. 아무리 능력 있고 스타일 좋고 원빈, 조인성을 닮았으면 뭐 하나. 지금 당장 내 부름에 달려오지 않는다면. <섹스 앤 더 시티>의 사만다가 바람둥이 호텔 재벌 리처드에게 이별을 고하며 던진 말을 기억하는가. “자기를 사랑해. 하지만 나는 내가 더 소중해.” 이는 갑의 연애의 핵심이다. 나도 그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보다 내가 좀 더 소중할 뿐, 내가 계속 나답길 바랄 뿐. 그렇다고 ‘공주 대접’을 요구하며 상대를 쥐락펴락하라는 게 내가 말하는 갑의 마인드는 아니다. 오히려 그의 행동, 그의 생각에 초연해야 한다.

 

남친이 전화를 안 받아서 애가 탄다고?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불길한 상상이 늘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니다(여자들이 보자마자 달려드는 훈남 상속자가 아니라면!). 고작 친구랑 술이나 먹고 있겠지, 아님 말고! 당신의 레이더가 그를 향해 있는 게 아니라 그의 촉각이 당신을 향하도록 해야 한다. 그의 전부를 알려고 하기보다 그가 알고 싶어 하는 나만의 ‘비밀’을 갖는 일에 더 열중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해온 갑의 연애의 키다. 그렇게 나는 전전긍긍 가슴앓이를 하거나 상처받는 일 없이 안정적인 연애의 포만감을 누렸다. 그리고 단언하건대 ‘을 남자친구’의 진가는 연애의 판타지가 휘발되어 현실의 테두리에 들어온 결혼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가사 노동부터 각종 집안 행사까지 그가 나를 우선시하고 내 뜻대로 움직여주는가는 결혼생활의 퀄리티와 직결된다. 시댁이라는 ‘슈퍼 갑’을 만나게 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하지만 갑의 연애가 ‘관계의 승자’일지는 몰라도 ‘사랑의 승자’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모든 여자들이 마음 한구석으로는 을의 연애를 꿈꾼다. “아직 진짜 사랑을 못해봐서 그런 건지도 몰라”라고 여기며. 나 역시 갑이기 위해서 놓쳐버린 인연, 완전 연소하지 못한 사랑이 아쉬울 때도 있다. 실은 이 모든 게 단지 ‘자존심의 스크래치’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자아반성도 한다. 그리고 그간 나를 갑으로 대우해 준 내 남자에게 조금씩 ‘을의 사랑’을 베풀려고 노력하고 있다. 비록 오늘도 마감에 쫓겨 그의 전화에 “왜? 바빠, 끊어!”라고 외치고 말았지만. 그나저나 내 옆에 앉은 후배는 술자리 논쟁에 강하고 식당에서 컴플레인도 잘하는데 남편이랑 통화할 때는 그렇게 공손할 수가 없다. 저건 연극인가? 명백히 을로 보이는 그녀는 정말 행복할까?_김아름

 

 

 

 

B 목마른 사슴이 우물을 찾듯이


전화를 끊고 나면 늘 옆자리 선배의 시선이 느껴진다. 신기함 반 불쌍함 반, 선배의 표정은 묘하게 웃고 있으면서도 일그러져 있다. 선배가 왜 그러는지 안다. 선배는 남편이 방탄조끼까지 착용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중동의 분쟁 지역으로 출장을 가서 힘들게 와이파이 존을 찾아내 걸어온 영상 통화도 급히 끊어버리는 ‘슈퍼 갑’이기 때문이다. 무릎만 안 꿇었지, 다정을 넘어 웃어른 공경 수준으로 남편을 대하는 나는 선배 눈에 독특하다 못해 이상한 여자다.  오래 만났다. 별의별 사건이 다 있었다. 님이다가 남이다가 했다.

 

연애 초기라면 밀고 당기는 쫄깃한 긴장감이라도 있지, 속절없이 시간은 가는데 연애의 역사만 대서사시로 쓰여지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남자는 일단 나보다 9년을 더 살았고, 카리스마와 자기애를 겸비한 쾌남. 바쁘기로는 명함 좀 내민다는 에디터보다 더 하고, 끼니는 때우면 그만인 나완 달리 섬세한 절대 미각을 가졌으며, ‘꼼꼼 깐깐한’ 성격은 잘못 건드리면 빨간 불이 점화되는 남자니, 갑이길 즐기는 여자들에겐 기피 대상 0순위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는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내 눈엔 매력이 젖과 꿀처럼 넘쳐 흐를 뿐. 모든 것에 취향 확실하고 선택하길 좋아하는 남자 곁에서 내가 을이 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소개팅한 남자들을 주렁주렁 매달고도 더 괜찮은 남자가 나타나길 바라는 여자들 틈에서 나는 한 남자를 만나며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을 보냈다. 보통 연애에 있어 갑을 관계, 달리 말하면 권력 관계, 더 심하게 말하면 종속 관계는 누가 더 좋아하느냐의 문제라고 한다. 그런데 말하자면 누가 더 못 견디느냐 하는 문제는 아닐까? 나도 급한 걸로 따지면 물 마시고 체할 만큼 성격이 급하다. 그래서 구덩이 파놓고 실한 놈 걸려 들기까지 기다리는 ‘꾼’들의 기술은 알지도 못하지만 해볼 엄두도 나지 않는다. 연애할 때마다 내가 먼저 전화하고 내가 먼저 만나자고 했다. 피드백은 애인에게서 와야 맞는데, 친구들에게서 먼저 왔다.

 

왜 그렇게 지고 들어가냐, 자존심도 없냐, 남자가 널 안 좋아하는 거 아니냐, 걱정이 구만 리 같았다. 하지만 남자 깨나 만나봤다고 자부하는 친구들이 은혜롭게 조언해 준 ‘남자를 애닳게 만드는 방법’들이 내게는 음 소거로 들릴 뿐이었다. 그래, 난 내가 더 좋아한다. 됐냐? 연애 고수를 자처하는 여자들은 지지 않고 또 ‘잡은 물고기’를 운운했다. 내가 강태공이 되어 잡은 남자에게 먹이 대신 조건 걸지 않는 사랑을 배터지게 듬뿍 주면 안 되라는 법 있냐? 나는 내 마음의 평화만큼이나 내 남자 마음의 평화도 중요하고, 내가 배려하고 맞춰주는 걸로 그 평화가 찾아온다면 을 아니라 병, 정도 기꺼이 할 수 있다.

 

갑이고 싶어서 이리 재고 저리 재다 아깝게 놓쳐버리는 대신 내가 선택하고 내가 사랑한 남자와 결혼했으면 그걸로 게임 끝 아닌가? 갑 대접은 각종 서비스센터에서 받는 걸로 충분하다. 이쯤에서 굳이 밝히자면 을로서의 고충은 마음이 아니라 몸의 고달픔이다. 무거운 짐 가방도 나눠 들어야 속이 편하고, 둘이 여행이라도 가려면 온갖 정보 검색부터 예약 확인까지 도맡아야 하며, 말다툼 후엔 먼저 풀어보려고 사과도 하고 개그도 하고 밥상도 차리고…. 신경 쓸 일도 피곤한 일도 많다. 그러는 사이 내 남편은 갑이니까 다리 뻗고 누워 있냐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한다. 오랫동안 신뢰를 바탕으로 이어온 갑을 관계에서 갑으로서의 의리를 지키는 거다. 니 꺼 내 꺼 따져가며 자존심 싸움하는 건 풋내기 연인들 사이에서나 존재하는 거라고 함께 웃어넘기면서 말이다._이경은

 

 

 

Credit

  • EDITOR 김아름
  • 이경은 ILLUSTRATOR 김란 DESIGN 하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