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자 형태의 커다란 소파를 두고 지금 내 앞에는 지드래곤이 누워 있다. 올해 초 그는 아주 오랜만의 솔로 앨범 계획을 공표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작업을 이어가던 중 가까스로 시간을 내 커버 촬영을 마치고, 어쩌면 잔뜩 기진맥진한 모습이다. 메이크업을 지우고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은 세네갈 다카르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직조감이 도드라지는 컬렉션 피스를 입고 스튜디오 조명 아래 서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대중에게 꾸준히 노출된, 아주 일찍부터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성장해 온 소년의 모습이 원형처럼 내 기억 속에도 자리 잡고 있는 걸까? 마치 오래 알고 지냈던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평온하게 눈을 감은 맨 얼굴 쪽이 더 ‘지드래곤답게’ 느껴진다. 사실 가장 많이 본 그의 모습은 뮤직비디오나 무대 위의 모습일 것이 분명함에도.
“이러다 잠들지 않겠어요?”라는 물음에 그는 “그렇지는 않아요”라며 고개를 내젓는다. 눈은 여전히 감고 있지만, 특유의 느긋하고 리드미컬한 말투로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답변들은 명징하다. 두 눈을 오래 감고 있다 보면 동공을 덮은 얇은 눈꺼풀 위로 아주 희미하게 감지되는 빛과 형체를 느낄 수 있게 된다. 그 흐릿한 빛 너머로 권지용은 어떤 풍경을 그리고 있을까? 그 머릿속에는? 인터뷰 시간은 예상보다 좀 더 길게 주어졌다. “누군가 눈 감고 있는 얼굴을 이렇게 오래 본 건 처음이네요.” 마지막으로 건넨 말은 스튜디오의 분주함 속에 금세 흩어졌다. 그러나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한 순간이 내게 새겨진 건 분명하다. 아마도 그건, 그게 지드래곤이니까.
다이아몬드 패턴의 재킷과 실크 자카르 블라우스, 버건디 컬러 팬츠, 클로슈 비니, 칼라 모티프의 네크리스와 비브 네크리스, 글러브는 모두 Chanel.
지드래곤을 많이 보고 들을 수 있어 좋은 2023년입니다. 특히 태양의 ‘VIBE’ 챌린지 속에서 짧지만 춤추는 모습도 무척 반가웠어요. 여전히 춤 연습을 많이 할까 하는 유치한 궁금증도 들었죠
예전처럼 하지는 않아요. 연습할 게 있으면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시기는 아니니까요. 그래도 평소에 노래가 나오면 몸을 쓰긴 쓰죠. 춤 연습은 어릴 때부터 워낙 많이 해서, ‘찌르면’ 나와요.
찌르면 나오는군요(웃음). 그리고 여러 순간에 샤넬이 함께했죠. 1월에는 샤넬 2023 S/S 오트 쿠튀르 컬렉션 참석차 파리에, 그리고 5월에는 샤넬 2023/2024 크루즈 쇼를 위해 LA에 다녀왔어요
그러게요. 어떨 때는 샤넬이 제 소속사 같아요(웃음). 회사들이 ‘짱짱’하네요.
스트링 디테일이 있는 트위드 코트와 레드 톱, 체인 레더 벨트, 로고 글러브는 모두 Chanel.
특히 ‘Lost in Music’(음악에 빠지다)이라는 테마로 촬영했던 크루즈 쇼 필름 에피소드가 궁금합니다. 캐롤라인 드 매그레가 운전하는 차 안에 나일 로저스 그리고 세바스티앙 텔리에와 함께 앉아 있더군요
아침에 드라이브하는 기분으로 촬영했어요. 나일 로저스도 그렇지만 세바스티앙도 뮤지션이다 보니 음악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누면서 재미있게 진행했죠. 나일 로저스와는 지난해 이맘때 열린 모나코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 사이 그도 샤넬 프렌즈가 돼 여러모로 더 반갑고 신기하더라고요.
아시아 남성 최초로 샤넬 글로벌 앰배서더로 선정된 게 2016년의 일입니다. 지금처럼 ‘K’나 서울이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부터 세계 각국의 인물들과 교류한 셈이에요. 그 일을 자연스럽게 해내는 셀러브리티가 많지는 않아요
처음엔 저도 어려웠어요. 어려울 수밖에 없었죠. 일찍부터 해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여기저기 노출되거나 비춰질 창구가 많다 보니 해외 셀러브리티들과 함께 있는 장면이 좀 친근해졌지만 앰배서더라는 단어조차 생소할 때도 있었으니까요. 그게 동양인인 경우는 더욱 드물었고요. 하지만 운 좋게도 좋은 인연을 맺었고, 버지니 비아르도 그렇지만 ‘칼 할아버지’ 때부터 줄곧 봐왔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제는 샤넬 이벤트에 가면 정말 반가워요. 그들도 저를 친구로 오래 봐와서 편안하게 대해주고요. 잘 어울릴 수밖에요.
카프스킨 블루 재킷과 구슬 장식 베스트, 와이드 핏 버건디 팬츠, 골드 체인 네크리스, 백 모티프의 펜던트 네크리스, 프린트 스카프는 모두 Chanel.
지드래곤의 이름으로 발표했던 음악들은 여전히 당신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가요? ‘ONE OF A KIND’나 ‘SUPER STAR’는 자전적인 곡으로 자주 언급되기도 하는데
아무래도요. 이렇게 저랑 인터뷰하거나 따로 대화를 나누지 않는 이상 저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노래나 음악뿐인 것 같아요. 오늘은 뭘 먹었고, 어떤 일을 했다는 것을 시시콜콜 전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제가 곡을 통해 털어놓았던 것들은 제 경험이 아닌 게 없어요. 모든 게 제 이야기죠.
까멜리아 장식을 더한 트위드 블루종과 새틴 소재 볼캡, 글러브는 모두 Chanel.
내 이야기임에도 지금 돌아봤을 때 낯설거나 달라진 감정은
투어 기간이 아닌 이상 제 곡을 ‘주르륵’ 들은 적이 최근에는 없어서 특정한 곡이 지금 딱 떠오르지는 않는데요. 어떤 부분은 당연히 계속 변하죠. 그러나 일기장의 기록이나 사진첩의 사진을 보는 것처럼 그땐 이랬지, 저때는 이랬지 하고 당시 제가 가졌던 감정을 확인한다는 마음이 더 커요. 커다란 틀에서 보면 나라는 사람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멀티컬러 카디건과 구슬 장식 실크 튤 베스트, 글리터드 트위드 스커트, 스트라스로 장식한 칼라 네크리스와 비브 네크리스, 허리에 묶은 스카프는 모두 Chanel.
새 앨범을 작업하며 새롭게 느끼고 있거나 다루고 싶은 감정선이 있는지
지금 작업하는 곡들은 자연히 제 근황, 현재의 저를 많이 반영한 이야기일 텐데요. 아직은 작업을 하며 계속 찾아가는 상태인 것 같아요. 완성되면 오히려 그걸 보고 저도 제가 감정 상태를 알 수 있을 것 같거든요. 활동을 오래 쉬었잖아요. 뭔가를 꼭 다루겠다고 다짐하기보다 재미있고 설레는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어요. 완성된 곡이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갈지, 저도 기대 중입니다.
글리터 장식의 울 트위드 재킷과 골드와 오렌지 글라스 펄이 조화로운 네크리스는 모두 Chanel.
올 초 태양 씨가 솔로 활동을 마쳤어요. 오랜 동료이자 친구가 활동하는 걸 지켜보며 작업하는 데 힘 혹은 영감을 얻었나요
기분이 좋죠, 일단. 제가 개인 작업 중이냐 아니냐를 떠나 저희가 오래 쉬었는데 영배(태양)가 원래 잘하던 일, 예전 모습을 볼 수 있어서 태양의 팬으로서도 좋아요. 사실 영배에게 부담스러운 일일 수도 있었는데 요즘 무척 행복해 보여요. 여러모로 좋은 작용을 받은 건 분명해요.
하트와 까멜리아로 장식한 슬리브리스 트위드 드레스와 데님 팬츠, 메탈 스카프 네크리스, 글러브는 모두 Chanel.
‘시대를 앞서갔다.’ 이 말은 당신에게 칭찬인가요? 때로는 너무 많은 걸 감당하기도 하는 것 같아서요
당시 시점에서 앞서간다는 말은 오히려 들은 적이 없어요. 그게 썩 어울리는 표현 같지도 않고요. 다만 시간이 흘러 비교 대상이 생긴 뒤에 그때의 저를 비교해 보면 앞서갔다는 평가는 늘 받았던 것 같아요. 문화적 사명감을 갖고 제가 보고 배운 것들을, 그걸 배우려는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앞서나가며 계속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죠. 앞서간다, 뒤처진다는 표현을 꼭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한데 일단 듣기 좋아요. 나쁜 말은 아닌 것 같아요.
‘앞서갔다’는 감상은 이번 인터뷰를 위해 당신의 과거를 복기하며 가장 많이 느낀 것이기도 합니다. 무대도, 영상도, 심지어 예능 프로그램에 입고 나온 룩도 ‘지금 보니 좀 촌스럽네’라는 감상이 들지 않더라고요. 아트에 대한 관심을 비롯한 여러 시도를 포함해서요
음, 트렌드에 따라 그때그때 변하는 것. 그 시기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좋지만 나중에 봤을 때는 너무 특정 시기가 떠오르는 모습으로 남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 보니 트렌드도 받아들이되, 고유의 모습을 잃지 말아야겠다는 고집이 생겼나 봐요. 제가 아이콘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면 예전이든 지금이든, 그의 10년 뒤를 상상하거나 혹은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고유의 스타일이 항상 떠오르더라고요. 그런 이들에게 저도 감탄하고, 자극과 영감을 받아요. 그런 존재가 되고 싶고요. 그런 면에서 저를 보며 ‘앞서갔다’는 생각을 했다면, 잘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뭐 좀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러프한 질감의 트위드 롱 코트와 글러브는 모두 Chanel.
무대 혹은 투어에 대한 열망도 시동이 걸린 상태인가요
당연히 열망은 있어요. 오늘 같은 화보 촬영이나 쇼 참석, 광고 등 이런저런 활동을 하고 있지만 본업인 가수로서 컴백은 아직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 시점 이후 무대든, 투어든 원래 지드래곤으로서 할 일들이 벌어지겠죠. 지금은 그때의 제 모습이 좋은 모습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계속 작업하는 단계인 거고요.
클로슈 비니와 다이아몬드 패턴 재킷, 리본 디테일의 블라우스, 반짝이는 스트라스 장식 네크리스는 모두 Chanel.
‘나는 문제가 아니라 문제의 답이에요’ 예전에 썼던 노랫말처럼 내 안에 답이 있다는 믿음은 여전히 확고한가요
확고합니다. 제가 가진 답이 정답이라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문제가 뭔지 몰랐던 때도 있었다면 제 기준이 확고해진 지금은 주변 환경이나 다른 사람의 상황에 저를 대입하거나 흔들리지 않아요. 그렇게 되려고 많이 노력했고요. 일반적인 문제들, 사람들이 살면서 겪는 문제에 대한 답은 저도 모르죠. 그러나 적어도 내가 하고 있는 일, 음악에 대해서는 어떤 문제가 제시되더라도 그 안에서 제가 하는 게 저에게는 답이에요. 저 또한 때때로 자신을 의심하기도 해요. 그런데 누군가 내 걱정을 아무리 진심으로 한들, 겉으로 사는 모습이 어떻게 비춰지든 간에 제일 중요한 건 본인이 본인을 알면 된다는 거예요.
테일러드 롱 코트와 골드 메탈 소재의 시크 체인 백팩은 모두 Chanel.
사실 자기최면처럼 하는 거죠. 괜찮다, 괜찮다 다독여가며. ‘내가 답이야, 괜찮겠지, 좋을 거야’라고 하면서. 그게 바람인지 희망인지 모르겠지만, 문제가 있다고 한들 재미있게 풀면 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어떤 문제를 평생 풀려고 싶었던 수학자가 있어요. 그런데 누군가 그 문제의 공식을 공표해 버리면 그 수학자는 그걸 푸는 과정에서 재미와 삶의 의미를 잃을 수도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문제로 보여도 그게 내게는 문제가 아니라면 답 또한 달라지겠죠. 제 인생을 제가 사는 거라면 지금 현재의 제가 답일 테고요. 누가 맞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