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Hermes) 2023 봄 여름 컬렉션.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던 친구의 엄마는 파리지엔느였다. 에르메스의 우수 고객이던 그가 쇼핑에서 돌아오면 잊지 않고 하는 일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새 옷의 택을 모조리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누가 옷 정보를 물어볼 때마다 알려주는 게 정말 싫대.” 나는 만난 적도 없는 그가 단박에 좋아져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목이나 허리께에 자리했던 택이 말끔하게 제거되고 나면, 옷이 지닌 출생의 비밀은 오직 그만 아는 사실이 됐다. 친구가 프랑스인이 황당함을 표현할 때 예의 취하는 그 제스처—입술은 쭉 내밀고, 어깨는 한껏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를 취하자 그의 짧은 곱슬머리가 탄력적인 스프링처럼 리드미컬하게 흔들렸다.
한편, 나의 친구나 연인(이던 사람들)은 내가 언제 어떤 옷을 구매했는지 절대 알지 못한다. 눈썰미로 밥을 벌어 먹고사는 직업을 가진 이조차 그랬다. 그럴 수밖에. 새 옷이라고 티를 내는 일을 낯 간지럽게 여기는 데다가, 유행을 타지 않는 클래식한 스타일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혹 누군가 비범한 관심으로 ‘못 보던 건데’ 라든지 ‘샀어?’ 라고 물어보면 나는 그저 ‘있던 거야’ 얼버무리고 만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옷을 너무 좋아해서 옷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음에도 ‘내’ 옷이 주제로 오르는 건 피하고 싶다. 스타일이란 너무 노력하지 않고 적당히 배어 나오는 것. 대놓고 호들갑을 떨기엔 어쩐지 멋이 없지 않은가.
최근 몇 년간 패션에선 빅 로고 열풍이 지속됐다. 소셜미디어의 영향을 빼놓기는 어렵다. 개미만 한 로고, 더 나아가 노 로고(no logo)는 훌륭한 원단이나 탄탄한 박음질, 완벽한 마감과 함께 휴대전화의 작은 화면에서 확 드러나지 않는다. ‘보여지는’ 것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 시대의 인플루언서에게 빅 로고는 확실히 경제적이며 틀림없는 약속일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로고 자체부터 로고를 활용한 패턴과 거대한 버클, 잠금장치 등은 마치 이스트를 과하게 넣은 빵처럼 점점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시끄러운’ 옷의 경제적 가치는 드라마틱한 ‘개봉박두’ 시점을 지나자마자 급격하게 하락한다. 로고나 컬러, 패턴 등을 요란스럽게 내세우고 정작 품질은 뒤로한 옷이라면 그 꾀가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다. 인플루언서야 하루가 다르게 선물 꾸러미가 쏟아지고, 브랜드 사이의 관계와 계약 등으로 매일 다른 옷을 입기에도 매일이 모자라지만, 그를 ‘추종’하는 우리는 상황이 다르다. 보기에 좋기만 한 옷은 아이러니하게도 2배로 빨리 싫증이 나는 데다가 그들처럼 쇼핑에 막대한 시간과 노력, 예산을 쏟아붓기도 불가능하다!
콰이어트 럭셔리는 오래 입을 수 있는 질 좋은 제품에 투자한다는 점에서 패스트 패션에 대항한다. 토템의 2023 프리폴 컬렉션.
그러던 와중 마치 그 현상에 대한 반작용처럼 콰이어트 럭셔리가 떠오르고 있다. 콰이어트 럭셔리란 럭셔리 앞에 ‘콰이어트’란 형용사를 더해, 가치를 대놓고 드러내지 않는 경향을 가리킨다.
콰이어트 럭셔리의 소비자는 떠들썩하게 자랑하지 않아도 그 가치가 떨어지지 않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당연하다. 미식을 즐긴 후 인증샷을 올리지 않았다고 그 경험이 갑자기 없던 일이 되겠는가?
질 샌더(Jil Sander)의 2023 프리폴 컬렉션.
콰이어트 럭셔리는 브랜드나 로고를 ‘침묵’한다. 그리고 색상, 패턴, 디자인, 프린트 등에 있어서도 유난스럽지 않다. 팔레트는 대부분 크림, 아이보리, 카멜처럼 커피의 다양한 농도를 닮은 컬러. 혹은 자연을 닮은 뉴트럴한 컬러들, 그리고 네이비, 블랙 등이다.
테일러링이 정확하고, 박음질이 물 샐 틈 없이 꼼꼼하되, 실루엣은 과장되지 않은 것, 패턴이나 프린트는 거의 없거나 있을 경우에도 평화로운 호수의 수면처럼 잔잔하다. 고요하다고 해서 존재감이 희석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잘 차려놓은 정찬이 깨끗하고 단정한 흰 접시 위에 제일 빛나듯 옷차림이 조용해질 때 그 옷의 주인공이 가장 잘 돋보이기 때문이다.
워드로브 nyc(wardrobe nyc)의 홀터넥 톱과 품이 넉넉한 팬츠로 콰이어트 럭셔리 룩을 연출한 헤일리 비버. 워드로브 nyc는 블레이저와 베스트, 셔츠, 후디, 팬츠 등 베이식한 아이템을 디자인하는 레이블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모두에게 에르메스나 더 로우, 질 샌더의 고객이 되라고 주장할 수야 없다. 그리고
몇 가지 팁만 숙지하면 합리적인 예산으로도 콰이어트 럭셔리를 누릴 수 있다. 그러니 옷을 고를 땐 튀는 디자인을 고르는 대신 소재나 만듦새를 꼼꼼하게 체크하고 선택하자. ‘이것이 야단법석한가’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해당 디자인을 이틀 내리 입는다고 상상해보면 된다. 모두가 수군거리며 알아챌 만한 옷이라면 아마도 확실하게 야단이다. 다음은 디테일. 값싼 소재의 단추나 조악한 세부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편보다는 군더더기 없이 심플한 게 안전하다. 마지막으로 사이즈. 기성복일지라도 맞춤복처럼 편안하게 맞아야 한다. 지나치게 헐렁하거나 호흡 상태를 걱정할 만큼 옥죄면 안 된다.
개성을 드러내고 싶을 땐 옷을 입는 방식으로 은근하고 세련되게 표현한다. 좋아하는 주얼리를 몇 개 더하고,
스타일링에 성격이나 생활 방식을 반영해보라. 글을 많이 쓰는 직업이라면 늘 비슷한 방법으로 소매를 걷거나 접어 올리면 어떨까? 성격에 따라 단추를 목 바로 아래까지 모두 단단히 채울 수도, 3개쯤은 예사로 휘휘 풀어버릴 수도 있겠다. 작지만 보석 같은 디테일이 진짜 당신에 대해 말해줄 것이다. 그리고 이건 유럽인들이 정말 잘하는 건데, 새 옷이라면 오래된 옷처럼 자연스럽게, 오래된 새 옷 같은 애정으로 곱게 관리해 입는 일을 터득하는 것이다.
이윽고 고요해졌는가? 당신의 존재감은 그 어느 때보다 크고 빛나고 있을 것이다. 침묵은 금이다. 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