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내돈내산’ 장만한 유일한 혼수인 자개 문갑.
수줍어서 익명을 요청한, 아들이 직접 심은 연산홍 꽃나무가 자리한 마당 있는 집에 사는 할머니(75)는 최근 오랜 세월을 함께한 물건을 모조리 처분했다. 3층 자개 장농과 보석함, 피아노, 이불까지. 하지만 끝내 버리지 못한 것은 자식에게도 물려주지 못할 만큼 정이 든 쉰 살 넘은 자개 문갑이다.
이리 와서 봐요. 노루가 뛰어다니고, 하늘에 구름이 한가득이야. 50년이 넘었는데도 자개가 아직 살아 있어요.
풋내기 시절 시집올 적의 살림살이를 양가에서 받았지만 이 문갑만큼은 ‘내돈내산’으로 장만했다고. 당대를 풍미했던 작가가 손수 작업한 작품이라 더 아끼지만, 작가 이름은 ‘까먹으셨다’! 매일 광나도록 닦은 문갑 위에는 할머니가 좋아하는 물건들이 줄지어 있다. 손녀의 손편지, 문배술과 헤네시 코냑, 영감님의 금메달, 튀르키예 여행에서 산 술잔까지. 제일 큰 존재감을 뽐내는 건 친정엄마가 소금도 담고, 장도 담아 물려준 항아리다. 유백색 바탕에 우아하게 핀 푸른 꽃을 볼 때마다 어머니를 생각한다.
할머니의 손수건 위에 몽글몽글 자리한 옥바둑알, 옥팔찌와 반지, 맥심 디카페인 커피믹스.
박옥순(83) 할머니의 취미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바둑을 두는 것이었다. 규칙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지만 그냥 돌이 아닌 옥으로 만들어진 영롱한 바둑알이 예뻐서, 젊을 적부터 할아버지와 마주하는 시간이 ‘두근두근’해서. 통 하나는 이사하다 깨지는 바람에 흑알은 나무 통에, 분홍알은 그냥 흩뿌려지듯 담겨 있는데, ‘님’을 먼저 보낸 뒤 더 이상 바둑은 두지 않고 금은보화 보듯 두고두고 아껴만 보신다. 그리고 ‘옥순’이의 또다른 옥들. 이름 가운데 옥(玉) 자가 들어가니 담수 진주와 엮인 옥팔찌와 옥가락지 등 세상 모든 옥을 자신처럼 아낀다.
험한 세월 당신은 아끼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다. 할머니는 최근 맏딸이 사는 부산으로 이사했다. 노인대학에 다니며 인생 3막쯤을 여셨는데, 학교 가며 꼭 챙기는 물건은 할머니처럼 활짝 핀 손수건과 맥심 디카페인 커피믹스.
믹스커피는 꼭 한 잔 마셔야 하루가 충만한데, 많이 마시면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 이건 괜찮더라. 저승까지 들고 갈란다.
할머니의 구몬 일본어 학습지. 몽당연필로 열심히 공부한 흔적이 가득하다. 그 위의 것은 손수 만든 종이공예품인 손거울.
종로 ‘인싸’ 송혜자(83) 할머니의 고향은 일본 나고야다. 다섯 살까지 살다가 전쟁 때 온 가족이 부산으로 피란 왔다. 어쩔 수 없이 생활에 일본어가 섞인 시대를 살았으니 할머니에게는 낯설지 않은 유년의 언어다. 언제 한번 가족들과 일본 여행을 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얼마 전부터 일본어 학습지 공부를 시작했다. 손때가 묻고 몽당연필이 될 만큼 쓰고 또 쓰고….
아무리 공부해도 깜빡깜빡하는데, 계속 종이가 쌓이고 연필이 짧아지는 걸 보니 뿌듯하더라.
할머니가 가장 아끼는 물건은 종이공예 자격증을 딴 둘째 딸과 함께 만든 손거울, 보석함 등의 공예품. 작품을 만들어 주변에 선물하기도 좋고, 치매 예방에 도움도 되니 좋아하신다. 할머니의 진짜 속내는 무엇보다도 둘째 딸에게 직접 배우는 시간이 자랑스럽고 행복해서다! 젊을 때 옷 공장에 다녀 패션 센스가 남다른 혜자 할머니는 날 좋은 요즘, 잘 차려입고 웃음 치료 교실에 가서 노래를 부른다.
순산 할머니 집 대문과 절구. 절구는 이 집을 지키는 경호원처럼 든든하게 자리한다.
우리 집 감나무에서 열리는 감 따 먹으려면 한참 줄 서야 해요. 동네에서 제일 인기 좋아.
소가 직접 쓰던 100년 된 코뚜레. 집에 행운을 가져다준다며 이사할 때마다 들고 다닌다.
‘오픈런’해도 못 먹는 귀한 감의 주인 이순산(77) 할머니. 할머니 집에는 감보다 더 희귀한 것이 있다. 100년 된 묵직한 절구다. 이 절구는 30여 년 전 할머니가 감나무집에 이사 올 때 전 집주인이 사용하던 것. 한때 중앙시장에 내놓기로 결심한 적도 있지만, 50kg은 거뜬히 넘을 법한 절구를 치워버리지 않은 이유는 뭘까.
순산 할머니 집 대문과 절구. 절구는 이 집을 지키는 경호원처럼 든든하게 자리한다.
이 절구 꼴을 보면 누가 가져가겠어요. 나니까 우리 집 지하에서 썩도록 품고 있지.
사실 할머니는 30년 넘는 세월 동안 절구로 맛있는 요리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방망이로 고추를 갈아 열무김치를 담글 수도 있고, 쌀을 찧고 빻아 인절미 떡도 뚝딱 만들어 먹을 수도 있다며 온갖 절구 레서피를 신나게 말씀하셨으니까. 비록 절구가 너무 무거워서 요리할 땐 10단 조절 믹서를 사용하시지만, ‘똑이’라는 애칭을 받은 것은 오직 절구뿐이다.
할머니의 취미는 알록달록 알람시계를 모으는 것.
대문에는 바람개비가 팽팽 돌아가고, 소담히 쌓인 항아리들이 할머니가 가꾼 계절 꽃과 어우러져 화사하게 빛나는 집. 성북구 장수마을에서 내로라하는 ‘클러터코어’인 정경숙(70) 할머니의 박물관 같은 집이다. 앨리스가 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이곳 오브제의 대부분은 골동품 수집을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모은 것들.
할아버지가 선물한 축음기와 호롱불. 그리고 막내딸 ‘예쁜이’.
할머니는 그중 나팔 모양이 멋스러운 축음기와 그 옆자리를 차지한 호롱불을 가리키며 웃었다. ‘사랑꾼’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해 직접 만들어 선물한 것.
아니 이런 걸 왜 자꾸 갖고 오는지 모르겠어. 갖고 오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는데. 호롱불은 좀 잘 만들었어. 내가 만드는 걸 옆에서 봤거든. 솜씨가 좋더라고. 선물이라고 주는데 참 어디 쓰라고… 하하하.
내심 영감이 천재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동백화와 자개로 만든 액자, 부부의 온기가 담긴 호롱불 사이사이 공간은 할머니의 아기 반려묘 ‘예쁜이’의 놀이터다. 자식들 모두 시집 장가 보내고, 부부가 새로 맞은 귀한 막내딸이다.
전주 여행 때 선물받은 오색찬란 꽃 자수 가방.
경남 마산을 주름잡던 장말분(90) 할머니. 열두 살에 한국으로 건너오기 전, 일본 교토에서 ‘수수꼬짱’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할머니는 장터의 이야기꾼처럼 수다스럽고, 물건에는 통 관심 없는 ‘미니멀리스트’다. 하지만 끔찍이 아끼는 두 가지가 있으니 바로 꽃 자수 가방과 라디오. 꽃 자수 가방은 50년 넘도록 사랑한 ‘그이’가 전주 여행 때 사다 준 선물. 휴대전화, 동전 지갑밖에 넣을 것이 없지만 외출할 때면 꼭 한쪽 팔에 그이와 팔짱 끼듯 걸고 나선다.
손잡이가 내려앉은 1959년산 JVC 나비코 라디오.
이놈의 가방은 입을 헤벌레하지도 않고 튼튼해. 그러니까 들고 다니지
라며 툴툴대지만, 그리움과 사랑스러운 속마음이 훤히 보인다. 1959년 집에 들여온 JVC 니비코 라디오도 할아버지의 선물로, 여전히 할머니 곁을 지키고 있다. 과거 노래와 춤만 있다면 어린아이처럼 거실을 한바탕 파티 현장으로 만들었다는 할머니는 라디오를 침대 머리맡에 두고 주무신다. 오래전 작동이 멈췄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음악 소리가 들린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