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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마시던 와인은 늘 즐거운 친구였다. 개인적인 취향에도 몸의 상태와도 잘 맞아서였다. 자꾸 손이 가게 되는 라벨을 자연스레 하나씩 익히고 아는 이들끼리 맛에 대한 취향을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마신 와인이 한 병씩 늘면서 유난히 자주 들리는 이름들이 있었다. 그 와인들의 오래된 고향을 마침내 지나친다고 생각하니 하늘의 구름도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지롱드 강변을 마주하고 있는 레스토랑 거리를 지나자 길 가의 양 옆으로 다시 포도밭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낮게 이어지는 지평선 위로 가끔씩 불쑥 솟아오른 것은 여기가 어디쯤인지 알리는 간판들과 그림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웅장한 샤토들, 지롱드 강의 좌안을 중심으로 한 메독 지방은 와인 초보자들도 가장 먼저 상식처럼 외우곤 하는 고급 와인 산지로 더 유명하다. 고급 와인 시장 중 메독 와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40퍼센트에 이를 정도. 메독의 와인들은 다시 원산지를 세분화하여 8개의 아뻴라시옹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메독(Medoc), 오메독(Haut-Medoc), 마고(Margaux), 물리스 앙 메독(Moulis en Medoc), 리스트락 메독(Listrac-Medoc), 생쥘리엥(Saint-Julien), 뽀이약(Pauillac), 생떼스테프(Saint-Estephe)가 그 주인공이다. 메독의 8개 와인 생산지 이름을 사용한다는 것은 AOC라 불리는 전통적인 원산지 시스템의 통제 하에 관리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메독에서 보낸 짧은 일정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건 그동안 미처 눈여겨보지 못한 작지만 이야기가 있는 와인들이었다. 물론 샤토 라피트 로칠드와 같은 그랑 클뤼 클라세 와이너리들은 엄청난 규모와 신기술, 무엇보다 언뜻 보기에도 완벽해 보이는 떼루아들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역시 이 정도라면, 하고 마음 어딘가 수긍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엄청난 빈티지들이 잠자고 있는 그들의 지하 저장고는 또 어떻고. 하지만 그랑 클뤼 클라세 분류법은 1855년 나폴레옹 3세의 지시에 따라 15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이래 재평가 없이 여전히 고스란히 이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부분 엄격한 품질 관리로 맛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문화 유산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더 크다는 이야기다. 화려한 스타들의 뒤안길에서 상대적으로 주목 받진 못하지만 크뤼 부르주와나 크뤼 아르티장 등급의 와인과 와이너리들도 제 각각 개성있는 와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솔직히 장기 보관은커녕 5년 안에 개봉해 가볍게 파티를 즐기기에 제격일거라 생각했던 그랑 리스트락(Grand Listrac)의 1937년 빈티지는 70여 년의 세월을 머금고도 여전히 싱싱한 과일향과 힘찬 구조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크뤼 부르주와 등급이 메독 와인 샤토 드 라 크루와(Chateau de la croix)나 물리스의 샤토 라 물린(Chateau La Moulin) 또한 기대 이상의 바디감과 여운을 남겼다. 아예 등급이 없지만 마니아들 사이에 그랑 클뤼 클라세 와인에 비견된다고 평가받는 샤토 소시앙도 말레(Chateau Sociando-Mallet) 역시 소문 그대로의 섬세함과 구조감을 보여줬다. 내겐 모두 새삼스런 발견 아닌 발견이었다. 이렇듯 세월의 변화 속에도 한결같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까도롭게 와인을 만들어내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아르티장(artisan), 즉 장인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년의 대부분을 포도밭과 양조장 주변을 맴돌며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여전히 기대 만큼의 맛으로 와인 마니아들의 꿈으로 남아있는 위대한 유산, 그랑 클뤼 클라세와 함께 맛과 다양성의 변주를 이끌며 메독 와인을 살아있게 하는 주인공이었다.
생쥘리엥의 그랑 크뤼 클라세로 유명한 사토 랑고아 레오빌 바르통의 아름다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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